[우리말 산책] 푸르른 하늘 아래 누르른 들판은 없다
지난여름 극성을 부리던 모기의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處暑)가 지났다. 찬바람이 불면서 가을이 깊어지는 때다. 들녘의 알곡들은 더욱 여물어간다. 그러면서 이 무렵이면 ‘누르른 곡식’이나 ‘누르른 들판’ 같은 표현이 많이 쓰인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널리 쓰이는 ‘누르른’은 바른말이 아니다. ‘누르른’으로 쓰려면 ‘누르르다’라는 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말이 없기 때문이다. “황금이나 놋쇠의 빛깔처럼 다소 밝고 탁하다”를 뜻하는 말은 ‘누르다’다. 따라서 ‘누르른 들판’은 ‘누른 들판’으로 써야 한다.
하지만 국립국어원은 과거 ‘푸르다’의 비표준어로 다루던 ‘푸르르다’를 2015년 표준어로 인정했다. ‘푸르르다’는 이제 ‘푸르다’를 강조한 말로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다. 이런 이치라면 ‘누르르다’도 표준어가 되지 못할 까닭이 없다. 아니, 당연히 표준어가 돼야 한다.
들녘이 누레질 때면 갖가지 과실들도 여물어간다. 밤도 그중 하나다. 밤은 참 흔한 먹거리임에도 사람들이 밤과 관련해 잘못 쓰는 말들이 많다. “가을에 밤송이가 저절로 벌어지면서 떨어지는 밤톨”을 가리키는 말도 많이들 틀린다. 그런 밤톨을 얘기하면서 ‘알암’으로 쓰는 일이 흔하다. 그러나 “밤이 충분히 익어 스스로 떨어진 것”은 ‘아람’이다. 밤뿐만 아니라 상수리와 도토리도 충분히 익어 땅에 떨어진 것은 다 ‘아람’이다.
밤 중에는 한 톨 안에 밤알 두 개가 든 것이 있다. 이를 대부분 ‘쪽밤’이나 ‘쌍밤’이라고 부르는데, 둘 다 표준어가 아니다. 이 중 ‘쪽밤’은 우리 국어사전들이 표준어로 인정하지 않지만 북한에서는 문화어로 쓰고 있다. ‘쌍밤’은 우리말샘에는 올라 있으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없다. <표준국어대사전>이 인정하는 말은 ‘쌍동밤’뿐이다.
이 밖에 아람의 겉을 ‘밤 껍질’로 부르는 일도 많은데, 이는 ‘밤 껍데기’가 바른 표현이다. 밤의 외피는 단단하기도 하거니와 “알맹이를 빼내고 겉에 남은 물건”을 뜻하는 말이 ‘껍데기’다. 밤 껍데기를 벗기면 부드러운 속껍질이 나온다. 이를 가리키는 말은 ‘보늬’다.
엄민용 기자 margeu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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