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독립운동사 지우기, 누가 지시하는 것인가
독립운동에까지 이념 잣대를 선택적으로 들이대는 윤석열 정부의 퇴행적·모순적 인식이 ‘홍범도 장군 육군사관학교(육사) 흉상 철거’ 방침으로 다시 한번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국방부는 독립전쟁 영웅 홍범도 장군의 ‘소련 공산당 가입’ 전력 등을 이유로 육사에 있는 그의 흉상을 철거하겠다고 밝혔는데, 이 경우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 앞에도 설치된 홍 장군 흉상은 어찌할 것인지 모순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과도한 이념적 기준으로 독립운동 역사마저 지우려는 윤석열 정부의 행동을 두고 여권 내에서조차 “매카시즘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등 거센 반발이 일고 있다.
국방부는 지난 26일 기자들에게 문자를 보내 “자유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장교 육성이라는 육사의 정체성 고려 시 소련 공산당 가입·활동 이력이 있는 분을 생도 교육의 상징적인 건물의 중앙현관에서 기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전날 육사가 밝힌 홍 장군 등 흉상 철거 방침의 ‘정당성’을 강변한 것이다.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25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북한을 대상으로 전쟁 억제를 하고 전시에 이기기 위해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는 곳(육사)에서 공산주의 경력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됐다”고 했다.
국방부와 이 장관 논리대로라면, ‘육사 정체성’에 안 맞는다는 홍 장군 흉상이 국군 지휘부가 근무하는 ‘국방부 정체성’에는 맞느냐는 의문이 뒤따르게 된다. 현재 국방부 청사 중앙현관 좌우에는 홍범도 장군과 함께 윤봉길·이봉창·안중근 의사, 박승환 참령, 강우규·이순신·강감찬·을지문덕·김좌진 장군, 신돌석·이강년·유인석 의병장 등 모두 13개 흉상이 세워져 있다. 지난해 5월, 대통령실에 자리를 내준 국방부가 그 옆의 합동참모본부(합참) 청사로 이전하면서 옛 청사 앞에 있던 홍 장군 등의 흉상을 새 청사 중앙현관 들머리에 그대로 옮긴 것이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27일 한겨레에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된 홍범도 장군의 유해나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 국방부 앞에 놓인 홍범도 흉상은 모두 어떻게 할지 묻고 싶다”며 “군이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민의힘 소속인 유승민 전 의원도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육사의 흉상을 철거하면 국방부 청사의 흉상들은 어떻게 할 거냐”며 “윤석열 정권의 이념 과잉이 도를 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공개서한을 내어 “민족적 양심을 저버린 귀하는 어느 나라 국방장관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며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으면 국방장관 자리에서 퇴진하는 것이 조국 대한민국을 위한 길”이라고 이종섭 장관의 사퇴를 촉구했다.
일각에선 홍 장군 흉상 철거 계획이 ‘문재인 정부 지우기’의 일환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카자흐스탄에 안치돼 있던 홍 장군의 유해를 2021년 한국으로 봉환하는 일에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비단 흉상만이 아니라 이번 정부가 독립운동가·호국영웅을 재평가하면서 친일 행적은 가볍게 보고 반공 행적은 무겁게 강조하는 등 편의적·선택적인 역사 해석을 일삼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달 국가보훈부는 일제강점기 만주군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백선엽 장군의 친일 행적을 국립현충원 안장기록에서 삭제했다.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백 장군이 친일파가 아니고 “대한민국을 구한 호국의 별”이라고 띄우고 있다. 반면 일제강점기 의열단을 만들어 무장독립투쟁을 벌인 약산 김원봉은 “북한 정권과 직결돼 있다”며 깎아내리고 있다. 정부는 홍 장군 등의 흉상을 치운 육사 공간에 백선엽 장군 흉상 설치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승민 전 의원은 “친일매국에는 지나치게 눈감고 종북좌익에는 일제시대의 이력까지 끄집어내어 매도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이념편향이고 이념과잉 아니냐”고 질타했다.
대통령실은 이런 논란에 거리를 두고 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흉상 철거는 육사에서 하는 일이고, 대통령실에선 그런 얘기가 나온 적이 없다”며 “대응도 육사나 국방부에서 할 일”이라고 했다.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박환 수원대 교수는 “국군의 근간이 되는 육사는 국군의 뿌리인 독립군의 정신을 역사적 맥락에서 계승, 발전시키는 게 당연한 일인데, 현재의 모습은 해방 뒤 자유 수호만 강조하는 몰역사적인 사고를 보여준다”며 “국민적 합의가 필요한 역사 인식 문제를 이렇게 툭툭 던지는 식으로 제시하는 건 대중적 지지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권혁철 장예지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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