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욱 칼럼] 무규범 사회의 폭력, 우리는 무사한가

한겨레 2023. 8. 27. 18:2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신진욱 칼럼]공권력만을 강화하는 치안국가의 해법은 반사회적 사회의 문제를 결코 다룰 수 없다. 세상에 나와 칼을 휘두른 자를 잡아 가둬도, 그 아래 거대한 불행의 저수지에서 끝없이 새로운 폭력이 올라올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무너진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무사할 수 있는가.
지난달 23일 오전, 서울 관악구 ‘신림동 흉기 난동 사건’ 현장을 찾은 한 시민이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신진욱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최근 공공장소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범죄가 계속 발생하여 불안이 고조되고 있다. 범인들은 진학이나 취업에 실패하고 장기간 고립 상태에 있으면서 사회에 대한 증오를 키워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범죄는 누구나 잠재적으로 희생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관심사가 되기도 하지만, 더 넓은 차원에서 우리 사회의 어떤 문제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징후이기도 하다.

효과적인 범죄 대책을 위해서는 범죄의 정확한 특성을 규명해야 하지만, 사안을 일부 정신질환자나 은둔형 외톨이의 문제로 좁힌다면 우리는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 전체가 병들어 있다는 사실, 이 사회가 매일 폭력을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명시적 범죄로 발현되지 않은 거대한 폭력의 저수지가 우리 사회 저변에 형성되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제일 안전한 나라’라는 말이 있는데 실제 통계상으로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에 따르면 2021년에 세계 200여개국 중 한국은 살인율이 15번째로 낮았다. 절도율은 세계 최저다. 데이터플랫폼 ‘슈타티스타’가 제공하는 통계로, 인구 10만명당 절도 건수는 뉴질랜드(1086), 덴마크(953), 스웨덴(781) 등 서구 나라들에 비해 한국(63)이 현저히 낮다. 지난 10년의 추이도 긍정적인 면이 많다. 검찰청 통계로 인구 10만명당 형법범죄는 2011년 1997건에서 2021년 1773건으로, 살인은 2.4건에서 1.3건으로, 강도는 8.1건에서 1.0건으로 줄었다.

하지만 이런 통계를 위안으로 삼을 수 없는 여러 이유가 있다. 폭력·상해는 장기적으로 증가 추세여서, 2000년에 인구 10만명당 106건이던 것이 2021년에는 290건까지 올랐다. 국제적 사회조사기관 입소스의 2023년 다국가 조사 결과에서도 한국의 폭력 피해는 다른 나라들보다 그렇게 좋지 않았다. 성범죄도 증가했다. 검찰 통계로 2014년에 강간을 포함한 성폭력 건수가 인구 10만명당 58.8건이었는데 2021년에 63.6건으로 늘었다. 말하자면 한국은 살인, 강도, 절도의 위험이 상대적으로 작지만 일상 속에 많은 폭력이 편재해 있는 나라다.

실제로 한국인의 범죄 불안이 매우 크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에서 확인되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우선희 박사의 2018년 논문을 보면 한국인의 범죄위해 경험률은 조사 대상 16개국 중 최저였으나 범죄불안지수는 제일 높았다. 범죄 불안은 피해 경험이나 범죄율을 단순히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 보도, 사회·인구학적 특성 등 다양한 사회적 요인에 영향받는데, 한국은 특히 사회관계의 단절과 타인에 대한 불신이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최근 무차별 범죄의 배경으로 조명된 고립의 문제가 여기서 또 등장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공동체의 해체와 개인들의 파편화는 최근 여러 인식조사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중대한 사회문제다. 고립된 생활 속에서 범죄화된 자들이 사회를 향해 폭력을 표출한다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사회를 증오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해치는 자살로 희생된다. 한국의 자살률은 지난 30년간 3배로 뛰었고, 20년째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는 극단적인 자살률이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한국의 높은 자살률은 처음에는 주로 노인 자살률의 문제였다. 독재 시대에 복지제도 하나 없이 각자도생해온 이 세대의 빈곤 때문이다. 이후 복지 확충으로 노인 자살은 감소 중이지만, 최근엔 10~20대와 40대 자살률이 급등하고 있어 전체 자살률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매일 36명이 정신적·경제적·육체적 고통으로 목숨을 끊고, 96명이 자살 시도로 응급실에 실려 오는 현실에 이 사회가 무관심하다면, 개인들은 더는 사회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주시할 대상은 살인범 정유정, 조선, 최원종의 얼굴이 아니다. 진정 두려운 마음으로 직시해야 할 것은 아노미, 무규범 상태에 이른 사회 해체의 현실이다. 극한의 경쟁, 끝없는 비교와 평가, 실패와 낙오의 두려움, 힘 있는 자들의 횡포, 숱한 미시적 차별과 무시, 일터의 폭언과 성과 압력, 인간관계의 단절 등의 현실은 그 자체로 ‘반사회적’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공권력만을 강화하는 치안국가의 해법은 이 반사회적 사회의 문제를 결코 다룰 수 없다. 세상에 나와 칼을 휘두른 자를 잡아 가둬도, 그 아래 거대한 불행의 저수지에서 끝없이 새로운 폭력이 올라올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무너진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무사할 수 있는가.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