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돌봄이 흐르는 그곳

한겨레 2023. 8. 27.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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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만행산 중턱에는 귀정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그 절집 주변에는 흙으로 지은 열 칸 정도, 뜨끈뜨끈 등을 지질 수 있는 구들방이 있다.

생물처럼 숨 쉬는 흙집에서 천천히 숨을 고를 수 있고, 자연과 교감하면서 채식으로 탁해진 몸과 마음을 맑힐 수 있고, 불멍으로 명상을 대신할 수 있는, 말 그대로의 친환경 공간이다.

돌봄은 이렇게 그저 흐르고 또 흐를 수도 있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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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전북 남원시에 있는 귀정사 ‘인드라망 사회연대쉼터’.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서울 말고] 명인(命人) | 인권교육연구소 ‘너머’ 대표

전라북도 남원시, 만행산 중턱에는 귀정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그 절집 주변에는 흙으로 지은 열 칸 정도, 뜨끈뜨끈 등을 지질 수 있는 구들방이 있다. 밤낮으로 풀벌레 소리, 새소리, 계곡물 소리가 섞여드는 방. 귀정사에서 터를 내어주시고 많은 사람이 마음을 모아 만든 ‘인드라망 사회연대쉼터’다. 산책 삼아 가볍게 걸을 수 있는 둘레길이 있고, 등산로를 따라 천왕봉 정상까지 오를 수도 있는 곳. 하루종일 무위의 시간을 보내도 눈치 볼 필요가 없는 곳. 딸랑딸랑 밥때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면 슬렁슬렁 내려가 남이 해주는 밥을 먹을 수 있는 곳. 생물처럼 숨 쉬는 흙집에서 천천히 숨을 고를 수 있고, 자연과 교감하면서 채식으로 탁해진 몸과 마음을 맑힐 수 있고, 불멍으로 명상을 대신할 수 있는, 말 그대로의 친환경 공간이다. 이곳에서 꼭 해야하는 일이라고는 자기가 잘 구들방에 불을 지피는 일 말곤 없다.

하지만 호텔 같은 편의시설을 기대하고 온 사람이라면 몹시 불편할 수도 있는 곳이다. 군데군데 갈라진 흙벽, 검게 그을린 종이장판, 가끔은 문이나 흙벽의 틈새로 들어온 벌레들, 메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공양간. 무엇보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욕실과 화장실은 툇마루를 내려가 신을 신고 걸어가야 하는데 방에 따라 가깝기도 혹은 멀기도 하다. 기껏해야 욕실과 화장실, 카페 정도이지만, 공동 사용이란 각기 다른 사람들의 사물을 대하는 태도와 습관이 부딪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쉼터 곳곳에선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손길을 발견하는 일 자체가 힐링이 된다. 누가 대들보를 올리고 서까래를 걸고 툇마루를 놓았을까? 옷도 수건도 걸 수 있게 굵은 대나무를 베어다 방마다 매달자는 생각은 누가 처음 했을까? 좁은 방에 벽장처럼 책장을 짜넣은 손은 어떤 손일까? 뒤란마다 가득 쌓인 장작은 누가 나무를 하고, 도끼질을 해서 아궁이 앞까지 날라다 놓은 걸까? 공양간 식탁에 오르는 텃밭의 채소들은 누가 심었을까? 대나무를 엮어 만든 저 안락의자는 누구 솜씨일까? 심지어 이 모든 것은 어떻게 공짜인 걸까? 대체 어떤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위하여 돈을 내고, 시간을 내고, 구슬땀을 흘리며 노동을 한 걸까? 이런 질문들에 이르면 깨닫게 된다. 이곳은 공동생활의 규칙이란 게 필요 없는 곳이었구나. 내가 너에게 준 만큼 나도 너에게 받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이유가 없어도, 심지어 누군지 몰라도 우리는 돌볼 수 있는 거구나. 돌봄은 이렇게 그저 흐르고 또 흐를 수도 있는 거구나. 그러다 기운이 좀 나는 어느 날에는 문득 일어나서 만행당에 쌓인 이불들을 죄다 꺼내 빨게도 된다. 누가 덮고 간 이불들인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뽀송뽀송한 이불들을 덮고 잘 누군가의 안녕을 비는 마음이 된다.

누군가는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이 자본에 맞서고, 국가폭력에 맞서고, 사회적 소수자들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인드라망 사회연대쉼터’는 그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는 것을 넘어 지친 몸과 마음을 함께 보듬어가는 삶의 연대를 실현해가고자 하는 많은 사람의 뜻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국가나 대기업의 지원도 없이 단지 후원자들의 십시일반과 자원 활동을 이어온 쉼터지기들, 힘쓸 일이 있을 때마다 무조건 달려오는 사람들만으로 이 쉼터는 올해 10주년을 맞았다. 기적 같은 일이다. 이 기적을 이어가기 위해 오는 9월2일에는 가수 정태춘의 후원 공연과 더불어 10주년 기념행사를 연다고 한다. 나는 이 기적이 우리 사회에도 일어날 수 있다고 믿기로 했다. 바로 이 쉼터처럼, 상호호혜의 원칙을 넘어 묻지마 돌봄이 흘러넘치는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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