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가습기살균제 폐암 유발 가능성 첫 확인, 200명 넘는 폐암 피해자 눈물 닦아줄 수 있을까
가습기살균제 독성물질이 인체에서 폐암을 일으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국제학술지에 발표됐다. 기존에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인정받지 못했던 폐암 피해자들을 구제할 길이 열릴지 주목된다.
27일 고려대 안산병원, 국립환경과학원 가습기살균제보건센터, 고신대 등 연구진이 지난해 3월 국제학술지 ‘BMC Pharmacology and Toxicology(바이오메드 센트럴 약리학과 독성학)’에 게재한 논문을 보면 가습기살균제 독성물질인 PHMG-p(폴리헥사메틸렌구아디닌-P계열)이 폐암을 일으킬 가능성이 확인됐다. 해당 논문의 제목은 ‘장기간, 저농도로 가습기살균제 독성물질을 인간 폐 상피세포에 노출시켰을 때의 폐암 관련 유전자 변화 분석’이다.
현재 정부가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일어날 수 있다고 인정한 피해 질환에 폐암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시민단체 추산에 따르면 이미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 가운데 폐암을 앓고 있거나, 폐암으로 사망한 사례는 200명이 넘는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가운데 오래전 폐암으로 사망한 경우 근거자료가 없어 피해 접수를 못한 경우도 있기 때문에 전체 폐암 피해 규모는 더 클 수도 있다.
연구진은 가습기살균제 독성물질(PHMG-p)을 인간 폐의 상피 세포에 장기간, 저농도 노출시킨 뒤 종양 유전자와 종양 억제 유전자에 변화가 일어나는지 여부를 관찰한 결과 정상적이었던 폐세포의 유전자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즉, 가습기살균제 독성물질에 장기간, 저농도 노출되었을 경우 폐세포에서 폐암을 일으킬 수 있는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장기간, 저농도 노출은 거의 대부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겪은 노출 형태다.
전문가들은 인간에게 직접 가습기살균제 독성물질을 노출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인간 세포를 이용한 이번 실험 결과는 인체 발암 여부 판단에 있어 중요한 근거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국립암센터 초빙의인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명예교수는 해당 논문을 살펴본 뒤 “앞으로 연구결과가 더 축적되면 가습기살균제 독성물질이 세계보건기구(WHO) 국제암연구소(IARC)의 발암물질 범주에도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인정하는 가습기살균제 독성물질로 인한 피해 질환의 범위는 매우 느리게 확대되어 왔다. 초기부터 피해 질환으로 인정됐던 폐섬유와 달리 천식과 태아 피해는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처음 드러난 2011년으로부터 6년이 지난 2017년에야 피해 질환에 포함됐다. 이후로도 일부 호흡기계질환을 제외한 피부질환, 심혈관계 질환, 폐암 등 다수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질환 중 상당수가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인 상태다. 전문가들은 가습기살균제 독성물질이 폐암을 일으킬 가능성에 대해 꾸준히 제기해 왔지만 아직까지 정부는 폐암을 피해 질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과학적 근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번 연구 결과는 기존 연구들이 동물실험에서 폐암 발병 가능성을 확인했던 것을 넘어서 인간 폐 세포에서 발암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폐암 피해자들을 구제할 수 있게될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앞서 고대 안산병원, 서울대병원 연구진은 2021년 9월 국제학술지인 플로스원(PLOS ONE)에 실험용 쥐 대상 동물실험에서 폐암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2019년에는 경희대와 안전성평가연구소 연구진이 동물실험에서 폐암 발병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처럼 동물실험에서 발암 여부가 확인됐지만 사람에서는 아직 제한적 자료만 있는 물질을 세계보건기구(WHO) 국제암연구소(IARC)는 ‘암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하는 ‘2A군’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 IARC는 발암물질의 동물실험 증거, 인체 증거 등에 따라 발암물질을 1군, 2A군, 2B군, 3군 등으로 나눈다.
이번 연구에서는 또 폐뿐 아니라 다른 장기에서의 발암 여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도 제시됐다. 연구진은 논문에서 발암 관련 연구를 폐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가습기살균제 독성물질을 흡입할 때 노출되는 기관지 등 호흡기에 대해서도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폐암이 가습기살균제 피해 질환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는 동안 200명이 넘는 폐암 피해자, 유족 들은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건강 피해에다 막대한 병원비로 인한 고통까지 겪고 있다. 예를 들어 온가족이 옥시싹싹 가습기당번 등 가습기살균제를 1997년부터 장기간 사용한 김성열씨 가족의 경우 2001년 장인 김모씨가, 2011년에는 아내 김모씨가 폐암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아내 김씨는 2017년 피해 접수를 했음에도 아직 피해 단계 판정을 받지 못했고, 장인 김씨의 경우 시일이 오래 지나다보니 근거 자료를 찾기가 어려워 피해 접수조차 하지 못했다. 2022년 폐암 판정을 받은 모은주씨의 경우는 폐암이 피해 질환이 아닌 탓에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김성열씨는 “어릴 때부터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된 자식 세 명까지 온가족이 피해를 겪다보니 가습기살균제라는 말만 들어도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진정이 안 된다”며 “장인 어른, 아내뿐 아니라 나 자신이나 자녀들까지 폐암에 걸릴 위험이 크다는 것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폐암 가능성이 과학적으로 확인된 만큼 정부가 신속하게 폐암을 피해 질환으로 인정하고, 이미 폐암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추가 연구를 실시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피해자 가운데 폐암을 겪거나 폐암으로 사망한 이들의 규모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피해자들의 생애주기에 맞춘 모니터링을 실시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시민단체들은 특히 과거 폐섬유화 외에 천식과 호흡기질환을 피해 질환에 추가할 때처럼 정부가 과학적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명목으로 피해 질환 추가를 미룰수록 피해자들의 고통도 커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동물실험과 인체 폐 세포 실험을 통한 과학적 증거가 충분한 것은 물론이고, 임상적으로도 이미 폐암 피해를 겪고 있는 이들이 200명이 넘는 것을 감안하면 정부는 빠르게 폐암을 피해 질환으로 인정하고, 피해자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가 과학적 증거가 충분함에도 피해 질환 추가를 미룬다면 가해기업 편을 드느라 피해자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며 “오는 29일 피해자들과 함께 폐암의 피해 질환 인정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 것”이라고 밝혔다.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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