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급제·대기만성, 당신은 어느 쪽?…와인 ‘생로병사’의 비밀 [김기정의 와인클럽]
와인도 사람처럼 삶에 꽃 피는 시기가 있습니다. 너무 어린 와인은 입안 가득 텁텁함을 뿜어냅니다. 강건함이 사라진 나이든 와인은 갱년기가 찾아온 중년 남성의 느낌이 날수도 있습니다.
와인은 죽으면 ‘식초’가 됩니다. 아무리 고급 와인이라도 결국에는 ‘식초’로 변합니다. 와인에는 여러가지 ‘산(acid)’이 존재하는데 와인이 수명을 다하면 ‘아세트산’이 많아지게 됩니다. 아세트산은 식초에 주로 있는 산으로 와인이 오래되면 식초 맛이 나기 때문에 ‘식초로 변한다’는 표현을 씁니다.
일반 소비자들이 와인에 관한 가장 큰 착각 중 하나가 ‘와인은 오래될수록 맛있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와인 투자자 중에는 저장고에 와인을 두고 가격이 비싸지길 기다리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인간처럼 와인도 모든 와인이 나이가 든다고 좋아지는 게 아닙니다.
‘와인바이블’이란 책에 따르면 와인의 90%는 생산한 지 1년 안에 마셔야 하고, 9%는 5년을 넘기면 안 됩니다. 5년 이상 숙성가능한 와인은 1%미만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보졸레 누보는 바로 마셔야 합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더 맛이 있어지는게 아니기 때문에 장기보관할 ‘경제적 이유’가 없습니다. 반면 프랑스 최고급 그랑크뤼급 와인들은 40~50년동안 장기숙성이 가능합니다.
장기숙성이 가능한 와인들은 특유의 캐릭터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탄탄한 구조감과 충분한 산(Acid), 밸런스를 갖춰야 합니다. 사람도 장수하려면 기초 체력과 충분한 영양섭취, 삶의 밸런스를 갖춰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뉴욕에 있을 때 1964년 샤토 무통 로칠드를 마셔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60년 가까이 된 와인인데 이미 ‘절정’을 지나가 힘이 빠져버린 상태였습니다. 반면 샤토 무통 로칠드 2005년, 샤토 무통 로칠드 2010년은 최고의 빈티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타닌’이 빡빡하게 살아있어 5년, 10년 뒤에 마시면 더 부드럽게 변할 것 같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기존 프랑스, 이탈리아의 구대륙 와인들은 장기숙성이 가능한 ‘대기만성’형 와인들을 고급와인으로 생각했습니다. 프랑스 부르고뉴 그랑크뤼 와인의 수명은 30년, 보르도 그랑크뤼 와인의 수명은 40년 정도로 보는데 아주 천천히 멋있고 우아하게 나이가 드는 모습을 보입니다.
칠레 에라주리즈에서 만든 비네도 채드윅 2014년 빈티지, 미국 투 칼론 빈야드 컴퍼니에서 만든 HWC. 카베르네 소비뇽 2018 빈티지는 각각 9년, 5년 숙성된 와인이지만 지금 마셔도 20~30년 숙성시킨 프랑스 최고급 와인과 비교해 크게 뒤지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소년급제’해 초년에 성공한 인생이 말년에 평탄하지 못한 사례가 있는 것처럼 ‘조기숙성’한 와인도 너무 일찍 꽃피웠다 너무 일찍 시드는 경우들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아끼고 아꼈던 미국의 대표 고급와인을 지인모임에서 열었는데 부드러움이 지나치다 못해 이미 기운이 살짝 빠진 적도 있습니다. 카베르네 소비뇽의 강건함은 사라지고 갱년기가 찾아온 중년 남성의 기운이 느껴졌다고나 할까요.
“20년 묵힌 보르도 그랑크뤼를 칠레 영 빈티지 프리미엄 와인이 꺾었다면... 굳이 칠레와인에게 20년 숙성 뒤에도 맛있기를 기대할 필요가 있나요? 그냥 4년된 칠레와인을 마시는게 합리적 판단 아닌가요.”
제 생각도 댓글을 달아준 독자분과 같습니다.
채드윅 회장은 칠레의 대통령을 4명이나 배출한 명문 ‘에라수리스(Errazuriz)’ 가문의 후손입니다. 칠레의 케네디 가문으로 불립니다. 후손 중 한 명인 돈 막시미아노 에라수리스가 1870년 칠레 중부 아콩카과 밸리(Aconcagua Valley)에 포도밭을 일구고 와인사업을 시작하는데 채드윅 회장이 ‘돈 막시미아노’의 5대손입니다.
채드윅 회장은 칠레 와인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기획합니다. 브랜드를 가린채 칠레 와인들과 프랑스 보르도 그랑크뤼, 이탈리아 수퍼투스칸 등 명품 와인들을 비교 시음합니다. 결과는 칠레 와인의 완승.
하지만 와인 평론가들은 쉽게 수긍하지 않습니다. 소위 ‘밀레니엄 빈티지’라 불리는 2000년, 2001년에 생산한 와인들을 2004년에 비교하는 건 칠레 와인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겁니다. 칠레, 미국의 신대륙 와인들이 빨리 숙성하는 편이라, 비교 대상인 ‘대기만성’형 프랑스, 이탈리아 와인들이 불리했다는 거지요.
채드윅 회장은 다시 시음회를 기획합니다. 이번엔 20년된 프랑스 보르도 그랑크뤼와 비교했습니다. 다시 칠레와인의 완승.
논리적인 결론은 프랑스 와인이 숙성될 때 까지 20년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냥 4년만에 숙성된 맛있는 칠레 와인을 마시면 된다는 겁니다.
사실 이게 채드윅 회장의 마케팅 포인트였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와인산지에서 소비자까지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길었고 장기유통을 위해 천천히 숙성할 수 있는 ‘대기만성’형 와인도 귀했습니다. 유통기한을 늘리기 위해 산도를 높이는 방법도 동원됐습니다. 밥에 식초를 넣으면 유통기한이 길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오래 기다릴 필요가 있느냐, 칠레 와인은 4년만 지나도 20년된 최고급 프랑스 와인보다 더 맛있다. 이런 논리입니다.
“내년(2024년)은 베를린 테이스팅 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당시 1위 와인이었던 비네도 채드윅 2000년 빈티지는 지금 어떤 맛으로 변해 있을까요? 국내 와인업계에선 벌써 내년 20주년 행사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조기숙성’한 칠레 와인은 20년 후에도 맛이 있을까요? 오랜 숙성이 보여주는 우아함과 동시에 강건함을 유지하고 있을까요?
얼마 전 칠레와인협회(Wines of Chile) 주최로 열렸던 ‘92+ 칠레 와인’ 행사에서도 칠레 와인의 장기숙성 가능성이 언급된 바 있습니다. 수입사들도 칠레와인의 장기 병 숙성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 고객들을 대상으로 ‘버티칼 테이스팅’을 진행 중입니다.
칠레나 미국의 고가 와인들은 카베르네 소비뇽 기준으로 4~5년 지나면 꽃이 피기 시작하고, 10년 전후로 맛의 절정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 절정의 순간이 얼마나 오랜기간 지속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질문입니다.
결론은 같은 고급 와인이라도 숙성의 성격이 ‘다를 수 있다’는 겁니다. 지인과 와인의 ‘숙성’에 대해 아주 오랜시간 토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의 표현도 재미있었습니다.
“100년이 넘은 샤토 라피트를 마셔 본 적이 있다. 물론 최고 절정의 맛은 아니었지만 그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식초가 돼버린 샤토 마고도 마셔봤다. 야채 샐러드에 소스로 뿌려서 먹으니 맛있더라.”
사람처럼 와인도 그떄 그때 쓰임과 용도가 다를 겁니다. 김치를 처음 담갔을 때, 잘 익었을 때, 아예 묵은지가 됐을 때 그 맛과 풍미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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