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후진 예술? 시대의 민감한 촉수"
단 30분 만에 한 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오게 해주는 장르가 있다. '단편소설'이다.
한때 단편소설은 언어 예술의 정수로 통했다. 분량의 제약, 치밀한 구성, 간결한 문체 때문에 작가의 능력치를 시험하는 잣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경재 문학평론가는 "소설이 시효가 다한 예술인 양 말하는 자도 많지만, 인생과 세상을 제대로 성찰하게 해주는 건 여전히 소설"이라고 말했다. 비평 에세이 '요즘 소설이 궁금한 당신에게'를 출간한 이 평론가를 숭실대 국문과 연구실에서 만났다.
"소설은 후진 예술이 아니에요. 급속도로 발전하는 세상에서도 가장 첨예한 지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깊이와 밀도 측면에서 가장 탁월한 장르가 소설이지요."
이 평론가의 이번 신작은 단편소설 36편에 관한 안내서다. 첫 번째 비평 대상은 이서수 작가의 '미조의 시대'다.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회사에서 성인 웹툰을 10년째 그려온 수영은 야근과 저임금에 시달린다. '변태적이고 가학적인 성행위'를 그리는 수영과 같은 '웹툰 어시'(보조 작업자)는 여성 탈모를 겪고 우울증 약을 삼키며 벗은 몸을 그린다. 구로에 사는 '현대판 여공'이다.
"현실을 백안시하지 않고 문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을 담은 소설입니다. 그간 리얼리즘 소설은 딱딱한 이데올로기를 독자에게 강요하는 측면이 있었어요. 이서수 소설은 어깨에 힘을 빼고 '어떻게 해야 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같이 고민해보자'는 말을 건넵니다."
책의 네 번째 비평 대상은 장류진 작가의 소설 '도쿄의 마야'다. 준경 부부는 여행을 떠난 도쿄에서 대학 동기이자 재일 동포인 경구 형을 만난다.
경구 형이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오래전, 동기들은 경구 형에게 짓궂게도 욕설을 잔뜩 가르쳐놨다. 경구 형은 당시 말끝마다 '씨'로 시작하는 욕설을 문장 앞, 뒤, 중간 어디에나 넣어 욕해서 별명이 '욕사마'였다. '도쿄의 마야'가 발표된 건 '노재팬(No Japan)' 캠페인이 가장 뜨거웠던 2020년이다.
"작가는 우리 내부의 한일 양국 콤플렉스, 어디에도 귀속시킬 수 없는 정체성, 그리고 혼란과 당혹감을 시대라는 콘텍스트에 넣어서 풍부한 의미를 갖게 했어요. 경구 형 아기 이름이 '마야'인데, 인도 철학에서 마야는 사물에 고정적 실체가 없음을 뜻하기도 하는 단어이고요."
당대성과 보편성은 소설이 확보해야 할 당위적 가치라고 이 평론가는 말한다. 사실 당대성과 보편성은 이율배반적이다. 어느 시대에나 읽히면서(보편성) 동시에 한 시대를 움켜쥐어야(당대성) 해서다.
"개별적 사건에 매몰돼 버리는 시의성은 경계해야겠지요. 하지만 보편성을 상정하더라도 '당대성에 바탕을 두고 발화되는 보편성'이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도스토옙스키의 명작 '악령'은 여전히 읽히지만 당시 지식인 청년이 동료를 살해했던 파장 안에서 만들어진 소설입니다. 시대의 민감한 촉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소설은 존재하기 어렵겠지요."
그는 강의가 없는 금요일 하루만큼은 연구실에서 소설만 읽는다. 한국문학 잡지에 실린 거의 모든 작품 속 인물이 그의 동공을 스쳐간다.
작년 출간된 평론집 '비평의 아포리아'에서 그는 각 문학작품이 바다과 같다고 썼다. "단편 하나도 제겐 무한한 바다처럼 느껴져요. 제가 가질 수 있는 건 바다가 지닌 흔적일 뿐이에요. 이 글들은 문학이라는 바다를 물안경 하나만 가지고 잠수해본 기록의 일부일 겁니다."
소설이 좋아 국문과를 선택했지만 "소설을 쓰려면 서울대가 아니라 막노동을 택해야 한다"(조동일 교수)는 이야기를 대학 면접장에서 들었다. 그래도 소설을 포기할 수 없어 지금껏 소설 비평 외길을 걸었다. 그는 소설이 '길'이라고 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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