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안지고 목소리만 큰 정치 … 국민은 "극혐이에요"

이상훈 전문기자(karllee@mk.co.kr) 2023. 8. 27.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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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모두에 진저리치는 유권자

◆ 매경 포커스 ◆

파행, 갈등, 대립, 혼란. 우리 정치를 묘사할 때 절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표현들이다. 정치라는 게 권력을 놓고 다투는 경쟁이다 보니 격해지기도 하고 상대와 적대적으로 되기도 한다. 그러니 늘 싸움이고 정쟁으로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정치가 그래도 권위를 인정받고 역할을 해온 건 결국엔 국민을 위해 타협하고, 과오를 반성하고 책임을 지려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선은 유지한 거다. 하지만 이제는 이 선마저 무너졌다. 정권을 빼앗기고 큰 선거에 연거푸 졌어도 도무지 변할 줄을 모르는 정당이 있다. 문제가 불거졌는데 반성도 책임도 없다. 오히려 당 안에서 자기들끼리 계파 싸움을 하느라 바쁘다. 또 이 정당 소속의 전직 대통령은 여러 현안에 생각을 내놓긴 하는데 마치 남 일처럼 말한다. 스스로 '무결점' 존재라고 생각하는 듯도 하다.

또 다른 정당은 생각하지도 못한 재난·참사가 연거푸 벌어져도 주로 남 탓이다. 집권당인데도 똑 부러지게 책임을 얘기하지 않는다. 안 하는 건지 못 하는 건지 알 도리가 없다. 게다가 이 정당이 배출한 정부는 툭하면 전 정권 탓을 한다. 이미 집권 2년 차인데 말이다.

요새는 '내로남불'이 아예 정치 용어로 자리를 잡았다. 정치인이 양쪽 진영으로 딱 갈라졌다. 그러고는 '우리는 절대로 잘못을 한 적도 없고 하지도 않는다'는 굳은 신념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무책임과 남 탓, 네 탓의 만연이다. 그러니 정치가 갈등을 해결하기는커녕 끝장의 갈등으로 치닫는다. 열광하는 소수의 지지자만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정치가 이대로 유지될 수 있기는 한 걸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아파도 너무 아픈 정치

지금 정치는 위기다. 아파도 단단히 아프다. 얼마 전 국회미래연구원(국회 소속 연구기관)은 한국 정치가 해결할 과제로 양극화를 꼽으면서 그 특징을 분석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는 '아픈' 한국 정치의 증상을 보여준다. 우선 극단적 당파성에 따른 무책임한 정당 정치다. 거대 양당으로 딱 갈라져서 네 편 내 편인지가 거의 모든 사안의 판단 기준이 돼버렸다. 당연히 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반영할 이유도 없고, 능력도 없다.

또 열성적 지지자와 반대자가 지배하는 정치다. 대통령 등 권력을 가진 정치인 개인에 대한 선호나 적대 강도가 높은 열성적 소수가 주도하고 있다. 이른바 팬덤정치 양상인데, 맹목적 지지와 일방적 혐오가 한 쌍을 이룬다. 이들 열성적 지지자는 당파성이 강해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의원들의 목소리를 억누르려고 한다. 이들이 큰 목소리를 내면서 정치를 지배하기 때문에 정당들 사이에 협력이 생길 여지가 적어졌다. 게다가 이런 팬덤에 영합하려는 정치인이 등장하고 일정 부분 득세하기도 한다. 경멸과 야유를 일삼는 정치인이 더 지지를 받는 상황이 돼버렸다.

대통령 의제가 갖는 과도한 지배력도 증상의 하나다. 국회에서 여야가 극한 대립을 하는 쟁점은 대개는 대통령과 관련된 거다. 이를 놓고 사활을 걸고 싸운다. 대통령에 대한 자율성이 낮은 집권당, 그 대통령과 경쟁했던 정치인이 대표가 된 야당이다. 야당은 무조건 '공격 앞으로'이고 여당은 무조건 '실드'다. 타협의 여지는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 정치는 정당 내 파벌의 양극화란 모습도 보여준다. 보통 양극화는 외부에 적대 세력이 존재하니 내부적으로는 응집하고 당내 파벌은 약해진다. 하지만 한국에선 정당 내부에서 최고권력자 개인과의 거리감에 따라 양극화가 전개됐다. 친윤·비윤, 친명·비명이란 표현이 그저 언론이 편의적으로 만든 건 아니라는 거다.

싸우는 여야 탓 정치 관심도 '뚝'

한국 정치가 가진 문제의 심각성을 유권자는 이미 알고 있다. 정치가 위기임을 인식하고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행정연구원은 해마다 '사회통합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한다. 가장 최근 공개한 것이 2022년 조사 결과다. 작년 9~10월 전국 19세 이상 성인 8200여 명을 대상으로 면접 조사를 했다.

우선 눈길을 잡는 것은 여야를 떠나 정치권 전체에 대한 평가와 인식이다. 조사 항목에 '평소 정치에 얼마나 관심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있다. 응답자의 41.2%가 '(매우 혹은 약간) 관심이 있다'고 답했고 58.8%는 '(전혀 혹은 별로) 관심이 없다'고 응답했다. 한 해 전인 2021년엔 '관심이 있다'가 45.2%, '관심이 없다'가 54.8%였다. 정치 외면 현상은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점점 심화되고 있다. 특히 20대 연령층에선 정치 무관심 비율이 77%를 넘어섰다.

또 '평소 지지하는 정당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는 '있다'가 32.3%, '없다'가 67.7%였다. 대선 전인 2021년 조사 당시에는 '있다'가 39.6%였고, '없다'가 60.4%였다. 대선이 끝난 뒤인 지난해 말 조사에서 이른바 '무당층'이 크게 늘어난 거다. 정당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커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번 조사 결과는 최근 나온 정당 지지율 여론조사에 비해 무당층 비율이 두 배 이상 높다. 통상 정당 지지율 조사에서는 정당 이름을 나열한 뒤에 '다음 중 어느 정당을 지지하십니까'라고 물어본다. 이와 달리 사회통합실태조사에서는 정당 이름을 제시하지 않고 단순히 지지 정당 유무만을 물어본다. 평소에 특정 정당의 존재를 생각하고, 관심을 두며 그 이름을 떠올릴 수 있어야 '있다'를 선택할 수 있다. 더욱 엄격하게 정당 지지 여부를 물어보는 조사다.

이번 조사에는 여당과 야당의 협력 정도에 대한 질문도 있었는데, 22.2%만이 협력이 (매우 혹은 약간) 이뤄지고 있다고 답했다. 77.8%는 협력이 (전혀 혹은 별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판단했다. 2021년 조사에선 이 같은 응답이 각각 31.2%, 68.8%였다. 특히 협력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응답은 2021년 29.1%에서 2022년 42.0%로 급증했다. 협력을 통한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갈등과 정쟁이 국회에 가득하다는 인식이 더 확산된 거다.

이러니 정치에 대한 만족도가 낮다. '현재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만족하십니까'라는 질문(0~10점, 전혀 만족하지 않으면 0점, 보통이면 5점, 매우 만족하면 10점)에 2021년에는 5.5점이 나왔는데, 2022년에는 4.5점으로 내려갔다. 또 정치 상황이 좋아질 것인지에 대한 전망(매우 나빠질 것이면 0점, 매우 좋아질 것이면 10점)을 물어본 결과, 1년 사이 5.9점에서 5.2점으로 떨어졌다.

유권자 절반, 스스로 중도층 판단

사회통합실태조사는 2013년부터 유권자의 이념 성향을 줄곧 조사해왔다. 이념 성향이 보수적·중도적·진보적인지 묻는 질문이다. 2022년 조사에서 '중도적'이란 응답이 48.7%를 기록했다. 앞선 연도의 조사 모두에서 중도적이란 응답 비율이 46% 이상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비율이 49%에 육박한 건 2015년(50.0%) 이후 처음이다. 정당들은 보수 혹은 진보를 정체성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막상 유권자의 절반은 스스로를 중도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다.

그런데 2022년 조사에선 한 가지 특이점이 보인다. 그동안 이념 성향 조사에서 나타난 경향 중 하나는 보수 정부 시절엔 보수적이란 응답이, 진보 정부 시절엔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유권자가 더 많다는 점이다. 2013년 출범한 박근혜 정부와 2017년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서 공통적으로 보인 현상인데, 특히 정권 초·중반에는 보수적 혹은 진보적이란 응답이 '확' 늘어나는 모습이었다.

이번 조사에서도 보수적이란 응답은 28.1%로 진보적이란 응답 23.3%보다 높다. 하지만 '흐름'에서는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진보 정부 마지막해인 2021년과 보수 정부 첫해였던 2022년 조사를 비교하면 보수적이란 응답은 30.4%에서 28.1%로 오히려 줄었다. 진보적이란 응답은 22.8%에서 23.3%로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최고점이던 2018년에 31.3%를 기록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큰 폭으로 줄었다.

중도층이 50%에 육박한 결과와 묶어서 보면, 보수층은 줄었고 그만큼 중도층이 늘어났으며 진보층은 이미 쪼그라들어 20% 초반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국회미래연구원의 분석대로 지금 정치는 열성적인 소수가 주도하고 있고, 맹목적인 추종과 혐오의 팬덤정치가 만연해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가 아닐까. 보수층이나 진보층 모두 20%대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전반적인 정치 외면 속에 열성적 지지자만이 목소리를 내는 상황이 아닐까.

바꿀 의지도 힘도 없는 정치판

정치가 국민을 편안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 국민이 정치를 걱정한다는 지적은 이제 진부하지조차 않다. 정치는 언제나 위기라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선을 넘은 위기이고 국민은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타개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 선거에 연거푸 졌고 도덕성마저 의심을 받는 야당은 혁신위원회라는 걸 뒤늦게 만들었지만 정말 위기를 극복하려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혁신안을 내놓았다. 당의 선거 경쟁력과 도덕성이 문제인데, 대의원의 역할 축소 등 당내 합의조차 안 되는 안건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다. 위기를 위기라고 인식하고 있는지조차 미지수다. 여당은 집권 2년 차를 보내고 있지만 아직도 남 탓이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판단하니 달라질 리가 없다. 정당 지지율을 보면, 온갖 잡음이 나오는 야당과 거기서 거기인데도 심각성 자체를 외면하는 듯하다. 어느 때보다 늘어난 무당층을 바라보며 출발한 제3지대 신당들이 여기저기 보이지만 아직은 무기력하다. 한마디로 정치권 자체가 스스로 달라질 의지나 힘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외부의 충격이 변화를 이끌 수밖에 없다. 바로 선거다. 내년 4월에 총선이 있다. 여의도 정치판 일각에서는 "지금 이 상태가 지속돼 총선을 치른다면 여야가 '똔똔'일 것"이란 말도 나온다. 여야가 적대적 공생을 하고 있고 열성·강성 지지자 위주로 투표에 나설 것이기 때문이란 설명이 뒤따른다. 또 총선 뒤에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란 결론까지 낸다.

하지만 우리 국민은 선거에서 늘 교정 역할을 했다. 승패를 결정해 주기도 했고, 때론 절묘한 판단으로 정치가 갈 방향을 정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선거 뒤엔 정당의 판이 바뀌고 인물도 달라졌다. 지금으로선 총선이 정치를 바꿀 유일한 기회다. 결국 냉정하게 회초리를 드는 유권자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이상훈 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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