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R&D 예산 삭감 후폭풍으로 들끓는 연구현장…"연구비 수주 경쟁으로 내모나" 반발

이준기 2023. 8. 27.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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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연이 집적해 있는 대덕특구 전경

정부의 2024년 국가 R&D 예산 삭감 후폭퐁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속에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윤석열 정부가 R&D 시스템의 비효율과 R&D 카르텔을 문제 삼아 예산 삭감 카드를 꺼내들자, 연구현장 연구자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정부가 내놓은 R&D 예산 삭감과 제도혁신 방안이 현장과 소통하지 않고 정부 관료 주도로 급조해 낸 전형적인 톱다운 방식의 정책이라며 날선 비판을 이어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R&D 삭감에 방점을 둘 게 아니라, R&D 과정의 비효율과 낭비 요인 등을 걷어내고 연구자의 안정적인 연구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R&D 삭감에 연구현장 혼란 현실화…슈퍼컴 6호기 사업부터 빨간불

내년 국가 주요 R&D 사업 예산은 올해보다 13.9% 줄어든 21조5000억원이 배정됐다. 이 가운데 국가 R&D의 핵심 연구주체인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예산은 10.8% 삭감된 2조1000억원으로 확정됐다. 매년 두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했던 R&D 예산이 정부의 긴축재정 기조에 따라 제동이 걸리자 연구현장은 상당한 혼란에 빠졌다. 당장 내년 R&D 예산 감소에 따른 연구비 확보 경쟁에 내몰리면서 안정적인 연구활동에도 차질이 빚어질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R&D 삭감 위기는 벌써부터 연구현장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이 내년 도입을 추진하는 슈퍼컴퓨터 6호기 운영 예산이 전면 삭감 위기에 처해 정상 구축되더라도 운영과 서비스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KISTI는 전기요금 인상 영향으로 당초 예상보다 전기요금 부담이 커지자,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방사광가속기 등이 대용량 실험데이터를 저장·분석하기 위해 이용하는 '글로벌 대용량 실험 데이터 허브센터(GSDC)'의 전원을 일시적으로 꺼 서비스가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여기에 과기정통부가 장기 프로젝트로 추진하고 있는 중이온가속기 구축사업과 다목적방사광가속기 사업 등과 같은 대형 연구장비와 시설 구축도 R&D 예산 삭감 여파를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출연연의 한 관계자는 "국가 재정이 어려울 때 가장 먼저 손쉽게 손을 대는 것이 과학기술 R&D 예산이라는 점이 명명백백해졌다"면서 "대형 연구장비 구축 등의 사업은 당장 가시적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비R&D성 인프라라는 점에서 최우선 삭감 항목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고 밝혔다.◇"PBS 제도 속에 연구자들 더 치열한 연구비 경쟁 내몰릴 것"

출연연 연구자들은 국가 R&D 예산 삭감으로 인해 연구자들이 PBS(연구과제중심제도) 구조 안에서 연구비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더 많이 수주해야 하는 환경으로 내몰릴 것이라고 우려한다. PBS는 연구자가 외부 연구과제를 경쟁을 통해 수주해 연구비와 인건비 등을 충당하는 제도로, 지난 20년 넘게 연구자들이 개선 또는 폐지를 요구하고 있는 과학계의 해묵은 과제 중 하나다. PBS 구조 하에서 연구자들은 단기 소액과제 수주와 수행을 위해 이리저리 노력을 분산시켜야 하다 보니 중장기 관점에서 도전적·모험적 연구를 하는 것은 물론 미래를 선도하는 연구에 제약을 받고 있다.

내년 국가 R&D 예산과 출연연의 기본 사업비 예산이 두자릿수 이상으로 줄어들면서 출연연 연구자들의 연구비 수주 부담은 더 한층 커질 전망이다. 각 출연연 고유의 역할과 책임에 맞게 안정적으로 지원받아 연구할 수 있는 출연연 기본 사업비도 20∼30% 감소함에 따라 총체적으로 연구비 확보에 어려움이 예상된이다.

전직 한 출연연 원장은 "R&D 예산 삭감은 연구자들에게 연구하지 말라고 통보하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라며 "이전부터 해온 계속과제의 경우 삭감폭이 크고, 신규 과제 추진도 높은 경쟁을 뚫고 해야 하는 부담감이 크다 보니 창의적·도전적 연구는 생각하지 못할 뿐더러 연구자 개인과 출연연 기관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리게 될 것"이라고 토로했다.

◇R&D 비효율·낭비 등 코리아 R&D 패러독스 해결 '숙제'

올해 우리나라 R&D 전체 예산 규모는 30조원에 달한다. R&D 투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세계 2위 규모로 양적으로 팽창했다. 이런 상황에서 민간과 대학의 R&D 역량이 높아지면서 출연연의 R&D 성과는 투입 대비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 과학기술 분야 연구과제의 성공률이 99%에 이를 정도로, R&D 기획 단계부터 성공 가능성이 높은 연구에만 매달리고 있다. 그렇다 보니 과거와 같이 국가와 국민이 체감할 만한 대형 연구성과들이 창출되지 못하는 R&D 생태계로 변질되고 있다. 출연연의 경우 기관 운영 시스템이나 경직된 조직·인력 운용으로 기관 간 칸막이가 고착화돼 급변하는 기술과 환경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정상적인 R&D 생태계의 원인으로 '나눠먹기식·갈라먹기식 R&D' 등을 지목하며 낡은 관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R&D의 비효율과 카르텔 등을 지적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연구현장에서는 '코리아 R&D 패러독스'를 해결하기 위한 R&D 혁신의 목소리가 제기돼 왔다.

김복철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은 "R&D 비효율과 낭비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이런 문제를 찾아서 풀기 위해서는 예산 삭감보다 현장과 소통하며 R&D 배분이 잘 되고 있는지, 배분 과정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찾아야 할 것"이라며 "그런 부분을 해결하는 게 연구 혁신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이준기기자 bongchu@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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