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암 투병 후에도 이쇼라스(다시 한번)! 56살 최고령 발레리노 이원국

김수현 문화전문기자 2023. 8. 27.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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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콜+] 발레리노 이원국의 파란만장 발레 인생

'한국 최고령 발레리노'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10여 년 전부터 줄곧 이원국 씨를 따라다닌 호칭입니다. 그는 1967년생, 올해 56살입니다. '한국 발레리노의 교과서'로 불렸던 발레 스타이고, 유니버설 발레단과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활약했고, 2004년 이원국 발레단을 창단해 발레 대중화에 앞장서 왔습니다.

이원국 발레단의 '신데렐라' (2016)


저는 1990년대 말 이원국 씨가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였던 시절 그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국립발레단이 '해설 발레'와 더불어 해외 유명 안무가들의 작품을 한국에 처음 소개하며 발레 팬들을 늘려가기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볼쇼이 발레단의 전설적인 안무가 유리 그리가로비치의 '스파르타쿠스'나 몬테카를로 발레단 크리스토프 마이요 감독이 안무한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작품들에서 그가 보여 줬던 강렬한 춤과 연기를 지금도 선명히 기억합니다.

이원국 씨는 자신의 발레단을 창단한 후에는 대학로 소극장에서 매주 월요일에 공연하는 '월요 발레' 등 참신한 시도로 발레 대중화에 앞장서 왔습니다. 발레는 30대 후반만 되어도 힘들다는데, 그는 30대 후반 국립발레단을 나온 후 이원국 발레단 '간판'으로 계속 무대에 섰고, 단체 운영까지 책임져야 했죠. 고군분투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동안 이원국 발레단 활동이 뜸하다 했는데, 몇 달 전에 그가 2년 넘게 암 투병을 했다는 얘기를 뒤늦게 전해 들었습니다. 그는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 건강검진에서 식도암이 발견돼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 후 한동안 목소리도 제대로 안 나오고 쇠약한 상태였지만, 최근 많이 호전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지난 4월 광명문화재단이 주최한 최태지 전 국립발레단장 진행 공연에 출연한 데 이어, 8월 초 용인문화재단에서 주최한 힐링 발레 콘서트에 출연했습니다. 4월 공연은 보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그의 공연을 보기 위해 용인을 다녀왔습니다. 최소빈 발레단의 해설 발레 프로그램 중에 그는 발레 '해적' 3인무, 그리고 가족이 함께하는 탭댄스를 선보였습니다.

발레 '해적' 3인무


암 투병을 한 56살 발레리노가 '해적'의 알리 역을 한다니. '해적'은 화려한 회전과 도약이 필요한 고난도 작품이죠. 한창 전성기인 젊은 무용수들이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닙니다. 암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지만, 오랜만에 만난 이원국 씨는 많이 늙었고 지쳐 보였습니다. 굵었던 목소리는 수술 이후 가늘고 쉰 목소리로 변했고 체중도 많이 줄었더라고요. 탄탄하던 근육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연습할 때 보니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들어하는 기색이어서 좀 걱정도 되었습니다.

공연 직전까지, 분장실에서도 이원국 씨는 연습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의 '해적' 무대 의상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있었는데요, 가까이서 보니 많이 낡아서 덧댄 부분도 있더라고요. 이원국 씨는 의상을 보여주며 "많이 낡았죠. 그래도 무대에서 조명 받으면 달라져요"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이 맞았습니다. 과연, 무대에 올라가니 달라졌습니다. 의상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이원국 씨의 춤은 여전한 카리스마와 관록으로 관객을 사로잡았고,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습니다. 동작의 정확성이나 스피드는 전성기 때보다 무뎌진 게 사실이지만, 요즘 말로 하면 '짬'이 어디 가는 게 아니더라고요. 아내 이영진 씨, 아들 이태율 군과 함께 탭댄스 'Shall We Dance?'를 공연할 때는 내내 행복한 미소가 가득해서 저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골라듣는 뉴스룸 커튼콜에 이원국 씨를 초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고 SBS 8뉴스에 기사도 냈는데, 그래도 아쉬워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원국 씨는 코로나 기간에 공연이 '올 스톱' 된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암 선고까지 받아 힘들었지만, 빨리 발레를 다시 하고 싶은 열망 덕분에 슬픈 줄도 몰랐고 병도 빨리 나은 것 같다고 했습니다.

"병실에 누워서 생각하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건 또 발레밖에 없더라고요. 발레 하는 순간을 생각하니까 전혀 슬프지도 않았어요. 빨리 나가서 발레해야지, 하면서 병실에서도 걸을 수 있을 때부터 움직이면서 탕뒤(발을 쭉 뻗는 발레 기본 동작) 하고 그랬어요. 아내가 그때 제가 호스 여러 개 달고 그렇게 탕뒤 하는 거 보면서 눈물을 흘렸는데, 저는 빨리 발레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났어요. 그래서 병이 빨리 호전돼서 무대에 설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Q. 무대 오랜만에 서는데 힘들지 않으셨나요?

A. 좀 힘들어요. 연습할 때 특히 힘들었어요. 열량, 당분이 떨어지면 손 떨리는 증상이 좀 있었어요. 수술 후부터는 제가 두 시간마다 먹어야 하는데 연습할 만하면 배고프고, 배고파서 먹고 나면 배불러서 연습 못 하고, 굉장히 괴로웠어요. 처음엔 '이래서 발레 다시 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이제는 2년 좀 지난 거잖아요. 많이 나아졌어요. 괜찮아요.

수술하고 몇 달 뒤부터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고, 1년 반쯤 지나면서 아이들 가르치는 거 시작했고, 지금은 그냥 정상인처럼 돌아다니고 발레 동작 시범도 보이고 하죠. 처음엔 그냥 말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지나온 것도 다 잊어버렸어요.
Q. '해적' 알리 역할을 춤추는데, 특별히 이 작품을 고른 이유는?

A. 1987년쯤 처음 했던 거 같아요. 저한테는 아주 각별한 역할이죠. 상체 탈의하고 남성미를 보여줘야 하는데, 제가 전성기를 넘기고 나서는 잘 안 했던 작품이에요. 그런데 아프고 나서 살이 쫙 빠졌어요. 그래서 이번엔 아예 좀 과감하게 해 보자, 해서 이 작품을 하게 됐어요. 수원 발레 축제에서도 이 작품을 해요.
Q. 직접 해보니까 느낌이 어떠세요?

A. 좀 불쌍하죠(웃음). 체력이 가장 큰 문젠데 요령은 최고죠. 요령과 체력을 섞어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술적인 느낌은 나이 들고 나서 더 좋아요. 그래서 그걸로 체력이 달리는 걸 커버하는 거예요.

일단 무대 올라가면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너무 행복해요. 젊었을 때도 그랬지만, 나이가 드니까 이런 게 바로 무대구나, 이런 게 바로 행복이구나, 싶어요. 그리고 긴장감이 남달라요. 무대에서 나는 특별한 냄새가 있는데, 저한테는 향수 같은 느낌이에요. 그래서 무대에 가면 저절로 에너지가 더 나오는 것 같아요.

이원국 씨는 지난 4월 공연을 위해, 아내 이영진 씨의 제안으로 아들 이태율 군까지 같이 탭댄스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는 탭댄스를 배우면서 안 되는 동작이 있으면 될 때까지 끈질기게 매달리는 아들의 모습이 자신과 닮은 것 같다고 했어요. 그래서 이원국 씨가 처음 발레와 만났을 때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화제가 옮겨갔습니다.
Q. 발레를 굉장히 늦게 시작하셨잖아요?

A. 저는 20살, 만 나이로는 18살 때 시작했어요. 늦은 만큼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남들이 잠잘 때도 하자는 게 당시 저의 목표였어요. 무조건 열심히 하자, 두 배로 세 배로 하자.
Q. 뭐가 그렇게 좋으셨어요?

A. 발레 하면서 처음으로 성취감을 느꼈어요. 내가 노력한 만큼 되는구나, 이런 걸 처음 느낀 거죠. 잘한다고 하니까 주변에서 칭찬도 해주고. 알고 보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봐준다는 게 사실 굉장히 두렵고 무서운 건데, 그때는 그게 참 좋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주려고 더 열심히 연습도 하고 연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게 참 예술적이면서 한계가 없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이원국 씨는 방황하던 10대의 끝 무렵, 어머니의 권유로 발레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인생에 목표가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의 책을 보면 중1 때 사소한 오해가 계기가 되어 방황하기 시작했고, 학교를 그만두고 가출해 배달, 웨이터 등 온갖 직업을 전전하고 난지도의 폐지를 줍는 일도 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때 방황을 많이 했죠. 당시는 공부 아니면 실패한 인생 둘 중 하나였어요. 공부는 적성이 아니었고, 그래서 실업계인 공고로 갔는데, 거기서도 부모님은 '너 대학 갈래?' 하시고. 그래서 그냥 포기했어요. 공고에선 자격증을 따야 하는데 그것도 못 땄어요. 그냥 저는 학교를 포기하고 끝낼래요, 하고 자퇴했단 말이죠. 그러다가 발레를 우연히 만난 거예요.

발레를 하다 보니, 계속하려면 학교를 가야겠더라고요. 그래서 자퇴하고 3년 만에 다시 고등학교에 복학했어요. 22살에 공고 졸업하고 발레로 대학에 들어간 거예요. 당시만 해도 발레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제가 좀 잘했어요(웃음)."

중앙대 무용과 88학번으로 대학 생활을 시작한 그는 다음 해 권위 있는 동아무용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대학 2학년 재학생이 큰 상을 받고 신문 1면에 기사가 나자 도대체 누구냐고 총장님이 찾았다고 하죠. 그는 전액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를 졸업하고, 꿈꾸던 뉴욕 발레 연수도 하고, 유수의 발레단에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유니버설 발레단에 있을 때는 동양인 최초로 당시 문훈숙 단장과 함께 러시아 키로프(현 마린스키) 발레단 객원 주역으로 공연하기도 했죠.
Q. 파란만장하네요. 발레를 안 만났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A. 그러게요. 발레 안 만났으면 뭐 하고 있을까요. 어머니한테 정말 감사해요. 살아가면서 제가 발레를 했다는 게 정말 다행스럽고 기쁘죠. 그러니까 끝까지 발레로 한길로만 가야죠.

저희 아버지가 항상, '누구든지 10년을 한길로만 가면 성공한다. 그러니까 배수의 진을 쳐라' 하셨죠. 저는 처음에는 '배수의 진'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설명도 안 해주시고 그래서 나중에 알았어요. 배수의 진. 제가 정말 그런 마음으로 살았어요. 여기 아니면 낭떠러지다, 이런 느낌으로 살았어요. 저는 지금도 그렇고, 제자들 가르칠 때도 그런 느낌으로 가르쳐요.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고 행복하죠.

유니버설 발레단과 국립발레단에서 수석무용수로 활약하던 시절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가 발레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늦게 시작해서 테크닉이 부족하다거나, 유연성이 떨어진다거나 이런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김수현 문화전문기자 shk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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