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장관, 법률 취지 몰이해·호도”···각양각색 커플들이 말하는 생활동반자법
“혈연·혼인으로 묶이지 않아도 가족 될 수 있다”
“결혼 원치 않아도 공동체·가족으로서 보호 받아야”
지난 15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법무부 공식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생활동반자법의 실질은 동성혼 제도 법제화”라며 “충분한 논의와 그에 따른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고, 저는 국민적 합의가 이뤄진 바 없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주디스 버틀러 UC버클리대 석좌교수는 그 전날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생활동반자법은 시기상조’라고 한 한 장관의 지난 6월 국회 발언에 대해 “한국 정부는 피할 수 없는 일을 피하려 한다”고 했다. 이 기사를 한 장관이 직접 반박한 것이다.
경향신문은 27일 이 법안이 ‘생활동반자 관계’로 규정하는 이들을 만났다. 남남, 여여 등 소수자 부부부터 남녀 비혼 동거 연인, 결혼 준비 중인 남녀 동거 연인 등 다양한 형태의 동반자들은 “혈연이나 혼인으로 묶이지 않아도 가족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또 입법이 어려운 것은 사회적 합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한 장관과 같은 정치권의 차별적 시선 때문이라고 했다.
국내 레즈비언 부부 중 처음으로 아이를 임신해 출산을 앞둔 김규진씨(31)·김세연씨(34) 부부는 “모든 이가 결혼을 원하지는 않는다”면서 “그들도 공동체 혹은 가족으로서 보호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미 미국에서 혼인신고를 한 이들에게 필요한 건 생활동반자법보다는 동성혼을 인정하는 혼인평등법이지만, 다양한 형태의 관계를 공적으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생활동반자법은 필요하다고 했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김세연씨는 법의 공백을 자주 느낀다. 그는 “수술 같은 중요한 결정을 앞두면 가족이나 보호자가 필요하다”면서 “노인 환자의 경우 배우자와 이혼·사별을 했거나 자식들과 연을 맺고 있지 않아 난감한 경우가 꽤 많다”고 했다. 김세연씨는 병원에서 연명 치료를 앞두고 있던 한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는 “가족들은 다 사이가 안 좋아 할아버지가 생전에 연명치료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었는지 아무도 몰랐지만, 함께 살던 여자친구 할머니는 알고 있었다”면서 “이런 결정을 할 때 멀리 떨어진 형제보다 함께 사는 동반자가 하는 게 훨씬 더 자연스럽지 않겠냐”고 했다.
생활동반자법안이 통과되면 동반자는 배우자에 준하는 권리를 갖게 된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성인 두 사람이 상호 합의에 따라 일상생활과 가사 등을 공유하며 서로 돌보는 관계를 ‘생활동반자관계’로 규정한다. 이 관계에 있는 이들은 동거 및 부양·협조의 의무, 일상가사대리권(일상가사에 대해 서로의 위임행위 없이 상대방 이름으로 여러 가지 법률 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 가사로 인한 채무의 연대책임, 친양자 입양 및 공동입양 등 혼인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가 주어진다. 사회보험, 공공부조, 사회서비스, 출산휴가 등 제도에서도 마찬가지다.
김규진씨는 “특히 나이가 들고 주변 이들이 아프기 시작하는 노년기에는 혼인 관계에 있지 않으면 서로 돌보기 굉장히 힘들어진다”면서 “성인과 성인 간의 계약으로 서로를 돌볼 수 있는 권리를 줘야 한다”고 했다.
‘생활동반자법=동성혼 법제화’라는 한 장관 주장은 법 취지의 왜곡이라는 게 김규진씨 생각이다. 그는 “한 장관의 입장문은 모든 면에서 너무 많이 틀렸다”면서 “생활동반자법과 동성혼 법제화는 다른 법률로 입법 시도가 되고 있을 뿐더러, 생활동반자법의 의의가 결혼이 아닌 방식으로 가족을 만들 수 있게 하는 것인데 어떻게 두 법이 같다고 할 수 있냐”고 했다.
동성커플에게도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야 한다며 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던 소성욱씨(32)와 김용민씨(33)도 한 장관의 발언을 비판했다. 소씨는 “법무부 장관이 차별적인 현재 시스템을 유지하겠다고 공식 채널로 밝힌 것 자체가 유감”이라고 했다. 생활동반자법 반대 논거로 동성혼 법제화를 든 것 자체가 차별적이라는 것이다.
소씨는 “사회적 합의가 안 됐다고 하는데, 올해 갤럽 조사에서 동성혼 법제화에 찬성하는 비율이 40%를 넘겼다”면서 “대통령 국정수행 평가보다 높은 수치”라고 했다. 이어 “학교·일터 등 관계를 맺은 모든 이들이 저희 관계를 축하했다. 사회적 합의·인식이 부족한 게 아니라 정치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해석하려 하는 것”이라고 했다.
소씨와 김용민씨는 한 장관이 의도적으로 두 법을 섞어 혼란을 유도한 게 아니라면, 법안 발의 배경과 소수자 인권에 대한 상식이 부족한 것이라고 했다. 김용민씨는 “(한 장관이)생활동반자법을 동성혼 법제화로 가는 길 정도로 보는 것 같은데, 둘은 엄연히 다른 법안”이라며 “장관이라는 사람이 법을 구분도 못 하고 전후 관계로 생각하는 게 어이가 없다”고 했다.
이성애 관계에 있는 이들도 생활동반자법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직장인 커플인 최민석씨(36)·윤나래(34)씨는 3년째 비혼 동거 중이다. 이들은 ‘연애의 끝에 결혼과 헤어짐 두 가지 선택지만 있다’는 데 동의하지 않아 비혼 동거를 시작했다. 윤씨는 “주변을 보면 애정 관계에 있더라도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이기 싫어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면서 “이들도 가족관계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아직은 비혼 동거 관계에서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면서도 “이성애·동성애, 또 성애 관계가 아닌 친구 관계 등 다양한 관계를 가족으로 인정하자는 게 법의 취지인 만큼 도입이 필요하다”고 했다.
최민석씨도 법안이 통과되면 사회가 다양성을 포용하는 능력이 향상될 것이라고 했다. 최씨는 “가족의 형태가 다양해지면 비혼 동거를 특이하게 보는 시선도 많이 사라질 것”이라며 “법적 권리를 보장받는다는데 반대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결혼을 준비하며 2년6개월째 동거 중인 프리랜서 진모씨(29)와 최모씨(30) 커플도 생활동반자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진씨는 “당장 내일 어떤 사고가 터질지 모르는데 결혼 도장을 찍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의 보호자가 될 수 없다는 게 가장 치명적”이라며 “동성혼 찬반 문제로 끌어들여 논쟁할 게 아니라 법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실익을 봐야 한다”고 했다. 최씨는 “소소하지만 자동차 보험료만 해도 배우자가 아니면 굉장히 비싸진다”면서 “성소수자만 법의 혜택을 받는 것처럼 논의가 흘러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 장관은 법무부를 통해 “경향(신문)은 지난 번에는 ‘익명의 누리꾼’ 의견을 앞세우더니 이번에는 ‘소수의 익명 시민 인터뷰’를 근거로 ‘경향의 입장’을 담은 기사를 내려는 것 같은데, 법무부와 장관의 입장은 두번에 걸친 입장문과 같다”면서 “그 법률안은 동성혼 법제화 이슈를 포함하고 있고, 국민 모두에 큰 영향을 주는 내용이므로, 다수당 힘으로 어물쩍 통과시킬 게 아니라 국민적 공감대와 합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익명 인터뷰’가 아니라 ‘실명 인터뷰’라는 경향신문의 추가 설명에도 법무부는 “한 장관의 입장은 변함 없다”면서 “길지 않은 내용이니 불필요한 오해가 없도록 기사에 전부 반영해 주시기를 강력 요청드린다”고 했다.
이홍근 기자 redroo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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