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 죽인 흉악범과 숨 쉴 수 없다"…가해자가 된 유족[이현정의 현실 시네마]
[헤럴드경제=이현정 기자]"그냥 이렇게 멍하니 앉아 있는 게 최선의 방법이에요? 이렇게 병신같이?"
하루 아침에 고등학생 딸을 잃은 이상현은 경찰 앞에서 울분을 토합니다. 딸은 또래 친구들에게 강간을 당한 뒤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범인을 잡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경찰의 말이 와닿을 수 없는 상황이었죠.
참다 못한 이상현은 익명의 제보를 받고 범인의 집에 쳐들어갑니다. 빈 집에서 발견된 사건 당시 영상 CD. 이를 확인하려던 찰나 범인이 집에 들어오자 이상현은 방에 몸을 숨깁니다. 그러나 범죄를 당하는 딸의 영상과, 이를 보며 웃는 범인을 보고선 피가 거꾸로 솟습니다. 그리곤 야구 방망이로 범인을 우발적으로 숨지게 합니다. 피해자가 한 순간에 가해자가 된 순간이죠.
"지금부터 이상현은 피해자가 아니라 살인 사건 용의자다."
어느 새 용의자 신세로 쫓기게 된 이상현. 그는 다른 범인인 조두식을 찾아 강원도로 이동합니다. 경찰은 이상현의 추가 살인을 막기 위해 조두식을 동시에 찾아 나서죠. 이상현의 딸 사건을 수사하며 유족을 위로하던 형사 장억관은 이젠 그를 쫓는 동시에 조두식을 보호해줘야 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모르겠어요 정말. 왜 우리가 이런 새끼를 보호해야 하는 건지. 조두식이 미성년자라 잡혀가야 몇 년 살지도 않을 거고, 제가 그 아버지라도 죽여버렸을 거에요."
형사 후배의 이 같은 말에 장억관 역시 아무 말을 못합니다.
같은 시각 경찰서엔 사망한 범인의 부모가 왔습니다. 범인의 컴퓨터에서 복수의 성폭행 영상이 확인됐다고 경찰이 말하자 부모는 울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17살이에요. 17살이라고요. 잘못해봤자 얼마나 잘못했다고. 내 새끼가 죽었잖아요. 내 피 같은 새끼가 죽었는데 이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우리 애가 피해자라고요. 범인 좀 잡아줘요. 내가 죽여버릴거야."
다친 몸을 이끌고 끈질기게 조두식을 찾아낸 이상현은 훔친 총을 조두식에게 겨눕니다. 대체 왜 그랬냐는 질문에 조두식은 자기가 한 게 아니라 친구가 한 짓이라고 변명하죠. 그런 그에게 이상현은 이렇게 소리칩니다.
"조두식은 내 딸에게 마약을 먹이고 짐승처럼 강간하고 죽인 놈이다. 나는 이런 놈하고 같이 숨 쉬고 살 수가 없다."
이 영화는 2014년에 선보인 '방황하는 칼날'입니다. 딸을 억울하게 숨지게 한 범인들을 찾아 나서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립니다. 영화는 단순히 복수의 심리에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대신 딸을 잃은 아버지가 느끼는 분노와 슬픔을 온전히 전합니다. 우발적인 사건으로 가해자가 되었지만 이마저도 아버지의 절망과 상실을 대변하죠.
사랑하는 가족, 특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자식을 억울하게 잃으면 그보다 슬픈 일은 없을 겁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그 말은 감히 상상조차 어려운 깊은 슬픔입니다.
장억관도 영화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경찰 생활 17년 동안 피해자 가족들에게 해주는 말은 하나도 변한 게 없어. 그저 참아야 한다고. 그래도 법은 지켜야 한다고. 모든 걸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말이야. 자식 잃은 부모한테 남은 인생 같은 건 없어."
최근 잇따르는 각종 흉악 범죄로 아무 죄 없는 피해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자식을 잃은 부모들도 있습니다. 사건 소식을 접하기만 해도, 신상이 공개된 범인들의 사진만 봐도 분노가 치미는 요즘입니다. 생존한 피해자들은 극심한 트라우마 속에서, 가족을 잃은 가족들은 평생 분노와 슬픔 속에서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이들을 최대한 위로하는 동시에 이들의 아픔이 조금이라도 헛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몫입니다. 우리가 지금 느끼는 이 분노를 그저 시간에 흘려보내기 보단 사회를 좀 더 안전하게 만드는 에너지로 사용하면 어떨지 생각해볼 시점입니다.
범인을 한창 찾아다니던 이상현은 환영 속에서 딸을 만납니다. 이제 그만하라는 딸의 설득에 이상현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만두면 내 딸이 너무 불쌍하잖아. 다들 금방 잊어버릴 거 아냐. 그러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잖아. 우리 딸 수진이가 죽었는데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게 되잖아. 너무 억울하고 너무 분하고 너무 미안해서.."
ren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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