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만에 내한한 빅토리아 물로바의 사색하듯 이어진 연주
(서울=연합뉴스) 나성인 객원기자 = 예술의전당 여름 음악 축제 초청 공연으로 바이올리니스트 빅토리아 물로바가 5년 만에 내한했다. 물로바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1983년 미국으로 망명한 뒤 유럽으로 건너간 연주자다. 그의 망명은 냉전 시대이던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었다.
물로바는 2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브람스, 슈베르트, 아르보 패르트, 다케미쓰 도루 등의 작품을 선보였다. 피아노 연주는 다채로운 음색으로 최근 독주와 협연 무대에서 주목받고 있는 라트비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레이니스 자린스가 맡았다.
1부 시작은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이었다. 보통 묵직하고 중후하거나 활화산 같은 격렬함이 이 작품의 대표적인 이미지지만, 이날 빅토리아 물로바는 작품의 새로운 매력이 느껴지는 신선한 해석을 선보였다.
1악장부터 특유의 담백하고 사색적인 음색이 호소력 있게 다가왔다. 외향적이거나 극적인 제스처는 전혀 없으면서 선율은 선명했다. 공간으로 뻗는 힘도 충분했다. 공연 내내 물로바의 운궁법(활을 다루는 방법)은 대가다웠다. 리듬, 강세의 변화는 매우 예민하게 조형했고, 갑작스러운 도약이나 점증적인 음세(음의 강약)의 증가도 극히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난도 높은 악구도 마치 쉬운 것처럼 연주하면서 시종일관 깊은 호흡을 유지했다. 더욱 인상적이었던 점은 따뜻함과 차분함이었다.
서정적인 2악장은 다정했다. 템포 자체는 다소 빠르게 설정됐지만, 듣는 이에게 말을 건네는 듯한 느낌으로 선율을 조형했다. 독한 독백이라기보다는 받을 사람이 멀리 있는 편지글 같았다. 여기서도 감정은 달관의 태도로 정제되어 있었다. 일부러 자제하려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러한 관조가 자기 목소리가 되어버린 이의 음색이었다.
3악장에서는 자린스의 피아노가 분위기를 바꿨다. 톡톡 튀는 리듬과 풍성한 잔향이 춤곡풍 악상에 생명력을 불어넣었고 물로바의 바이올린은 결코 감정 과잉 없이 거기에 선뜻 호흡을 맞췄다. 기교적인 4악장은 대단히 집중력 있는 연주였다. 극적인 연출을 멀리하고 충실하게 악상만을 따라가지만, 클라이맥스에서는 은근한 불꽃이 일었다.
1부 마지막은 다케미쓰 도루의 '요정의 거리'와 아르보 패르트의 '형제들'이었다. 물로바의 요청에 따라 두 작품 사이에 휴식 없이 연주됐다. 그 효과는 놀라웠다.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부터 이어져 온 사색적인 감정이 이어졌다. 요정의 신비로운 매력보다는 요정의 작별 인사가 형상화된 느낌이었다.
마치 하나의 곡처럼 이어진 '형제들'은 피치카토 악구가 마치 론도처럼 등장하고, 그 사이사이 다양한 음악적 에피소드들이 펼쳐진다. 패르트는 틴틴나블리(종소리)라고 불리는 작곡기법으로 현대음악 작곡가 가운데서는 드물게 대중성을 얻었다. 종소리에 착안한 3화음과 그 배음을 다채롭게 배열하되 중세 교회음악에서 받은 영감과 침묵을 통해 깊은 영성을 드러낸다.
단순하지만 따뜻한 화음 속에 속주, 하모닉스, 더블스톱 등 현란한 기교가 펼쳐지지만, 자신을 드러내려는 과시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침잠, 명상, 애도 같은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패르트의 음악 세계가 깊게 다가왔다. 이날 공연의 물로바는 단순히 바이올리니스트가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는 시간 예술가였다. 브람스, 다케미쓰, 패르트가 하나의 사색으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2부는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과 슈베르트의 론도로 채워졌다. '비의 노래'라는 부제로 잘 알려진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은 가곡에서 3악장 주를 가져온 만큼 노래하는 서정성이 전곡 내내 중심을 차지한다. 물로바와 자린스는 뛰어난 호흡으로 담백하고 관조적인 브람스를 들려줬다. 특히 3악장에서는 완벽한 기교와 클라이맥스로 음악을 이끌어가는 에너지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마지막 곡은 슈베르트의 화려한 론도였다. 춤곡의 대가였던 슈베르트는 듣는 이에게 음악적 인상을 단시간에 각인시킨 뒤 이를 곧바로 흐트러뜨리는 방식의 유희에 능숙하다. 물로바와 자린스의 앙상블은 그러한 유머러스한 의외성, 춤곡다운 신체적 움직임을 잘 드러냈다. 물로바 특유의 초연한 음색은 후기 슈베르트 작품의 쓸쓸함도 훌륭하게 부각했다.
앙코르곡 중 하나는 물로바와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아들인 물로바 아바도의 '브라질'이었다. 남미 특유의 흥겨움이 느껴졌다. 또 무소륵스키의 '호팍'에서는 거칠고 진실한 러시아의 혼을 초절기교에 담았다. 물로바의 모든 것을 보여준 공연. 성숙한 예술가만 줄 수 있는 품격 있는 무대였다.
lied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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