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중국] 우리에게도 중국에게도 아픈 역사, 톈진조약 이야기
- 19세기 톈진은 서구 열강의 놀이터…중국 역사의 아픈 곳
- 장쉐량 고택 통한 애국심 고취…제국주의 산물은 관광지로 개발
탕! 탕! 탕!
1909년 10월 만주 하얼빈역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침략 앞잡이였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다. 메이지유신 후 일본 내각의 초대 총리를 비롯해 무려 4번이나 총리를 지낸 제국주의 일본 실세 중의 실세 이토는 구한말 우리나라 치욕의 역사에서 가장 빈번하게 거론되는 인물이다.
이토 저격에서 시계추를 20여 년 전으로 돌려보자. 1885년 청나라의 리홍장(李鴻章)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중국 톈진(天津)에서 만났다. 직전 해인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혼란스러운 조선에 누가 더 영향력을 행사할지를 두고 청과 일본이 조약을 맺었다. 내용은 이랬다. “청과 일본 양국 군대는 조선에서 동시에 철수하고, 동시에 파병한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근대화의 길로 들어섰지만, 아직은 청과 전면전을 주저해 결정한 차선책이다.
다시 시간은 흘러 1894년이 되고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난다.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농민 반란을 막아달라며 원군을 요청했는데, 이게 돌이켜보면 큰 패착이 되고 말았다. 청군이 조선에 들어오자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군도 자동으로 파병이 됐다. 이제 힘이 생긴 일본은 조선에서 치러진 청일전쟁에서 청군을 누르고 조선에 대한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했다. 이후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한일합방을 속전속결로 진행해버린다. 구한말 치욕의 역사의 가속 페달 역할을 한 건 바로 톈진조약이었다.
제5호 태풍 독수리가 지나간 직후인 이번 달 초 톈진에 가봤다. 대륙의 심장 베이징으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톈진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 서구 열강의 놀이터였다. 대륙을 집어삼키려는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 무려 9개 나라가 바로 이곳 톈진 일대에 조계지(租界地)를 확보했다. 조계지란 주로 항구를 중심으로 외국인이 상주하며 그 나라 정부로부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는 구역을 뜻한다. 한마디로 청나라 안에 있는 서구 열강의 땅이란 뜻이다. 그래서인지 톈진은 도시 곳곳에 서양식 건축물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톈진의 명소 중 이탈리아풍경구(天津意大利風景區)가 바로 이런 제국주의 시대의 흔적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그 당시 톈진에서 이탈리아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을 지금은 관광지로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이탈리아풍경구에 가보면 마르코폴로 광장과 단테 광장 등을 중심으로 200여 개 이상의 유럽식 건축물이 한곳에 모여 있어서 이곳을 걷고 카페에서 차를 한 잔 마시고 있으면 마치 유럽에 온 듯 착각을 들게 한다. 이탈리아의 중국 진출 전초기지 역할을 한 곳이 이제는 훌륭한 관광지로 바뀐 사례이다. 물론 이곳에 오지 않고도 톈진은 어디를 가더라도 이렇게 유럽식 건물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사실 톈진조약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와 연관이 깊은 톈진조약을 제외하고라도 굵직한 톈진조약만 10번 이상이다.
먼저 1856년 6월 애로호사건에 관련하여 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 네 나라가 각각 청나라와 맺은 4개의 조약을 들 수 있다. 이 4개 조약은 개별적이지만 모두가 편무적 최혜국조관(片務的最惠國條款)이 삽입되어 있어 내용상으로는 동일한 조약으로 본다. 편무적 최혜국조관이란 한마디로 청나라는 조약을 맺은 4개 나라에 최혜국 대우를 해주는 의무가 있지만, 상대국들은 청나라에 아무런 의무도 없는 불평등 조약이란 뜻이다.
또 1871년 청‧일 양국이 상호 대등한 입장에서 맺은 영사 재판권을 상호인정하고, 최혜국조관을 포함하지 않는 것을 골자로 한 통상조약도 톈진조약이며, 1885년 청‧프랑스 전쟁 끝에 청나라가 베트남이 프랑스의 보호국임을 인정하는 톈진조약도 있다.
이 밖에도 1860년대 독일‧포르투갈‧덴마크‧네덜란드‧에스파냐, 1870년대 페루‧브라질과도 톈진조약을 맺는 등 청나라의 역사에서 톈진조약은 수없이 많이 나온다.
왜 그럴까.
톈진은 우리로 치면 인천과도 같은 곳이다. 비행기가 없던 당시 외국에서 중국에 오려면 배를 타고 와야 했고, 수도 베이징에 들어오려면 무조건 항구도시인 톈진을 거쳐야 했다. 그렇기에 톈진은 서구 열강의 중국 진출 교두보가 될 수밖에 없는 곳이다.
반대로 당시 청나라의 시각에서 보면 적들이 톈진까지 진출했다면, 황제가 거처하는 베이징까지 당도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목에 칼이 들어온 격이랄까. 황제는 천하 그 자체이기 때문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 결국 청나라는 톈진에서 서구 열강을 어르고 달래서 베이징까지 오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렇듯 청나라의 입장에서, 또 현대를 사는 중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톈진은 아픈 기억들만 쌓인 곳일 수밖에 없다. 특히나 지금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특별한 대우를 받지는 못하지만,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가 쯔진청(紫禁城)에서 쫓겨나 만주로 떠나기 전 2년여 동안 머물렀던 곳도 바로 이곳 톈진에 있다. 당시 일본 조계지의 한 건물에서 지냈는데, 그곳이 징위안(静园)이라는 곳이다.
이런 톈진에 최근 중국인들의 애국심을 고취 시키는 곳이 등장했다. 바로 장쉐량(張學良) 고택이다. 장쉐량은 중국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는데,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국민당 장제스(蔣介石)를 구금하는 시안사변을 일으켰다. 이를 통해 2차 국공합작이 이뤄졌고, 중국 대륙의 주도권을 놓고 국민당과 경쟁하던 공산당이 기사회생하는 발판을 마련해준 인물로 평가된다. 당연히 현재 공산주의 체제의 중국에선 장쉐량을 구국의 영웅으로 띄우며 톈진 고택과 랴오닝성 선양 장쉐량 박물관을 중국 국민에게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실제로 기자가 톈진 장쉐량 고택을 방문한 날은 평일 오전이었는데도 지나가기가 힘들 정도로 많은 중국 관광객들이 고택을 찾았다. 이들은 진열품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장쉐량 초상화와 사진 앞에서 연신 기념사진을 찍기 바빴다. 특히나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시진핑 3기가 시작되고 미-중 패권 다툼이 본격화한 이후 중국 정부가 장쉐량 띄우기를 통해 중국인들에게 애국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서구 열강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중국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 동시에 중국 공산당 애국주의가 점점 강해지는 곳. 중국 속의 작은 유럽, 톈진을 가보면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경험할 수 있다.
<톈진=윤석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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