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국가주의·민족 문제가 덮어버린 자본주의 모순
식민지 시절 노동운동 역사 시작
독재·노동착취 등 한국과 닮은꼴
미·중 수교 등 국제적 외부충격
노동 외면…자본친화적 민주화로
지난 5월 말 대만 타이베이에서 내 또래의 노동운동가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따뜻한 환대에 국적을 넘어선 연대와 우애를 느낄 수 있었다. 이주노동자와의 연대, 노조 확대 사업, 최저임금 인상, 플랫폼노동 등 고민하는 주제도 유사했다. 앞서 대만 노동운동계는 2015년 대만 기업 이잉크가 대주주로 있는 하이디스가 335명의 한국 노동자를 해고했을 때 투쟁을 지지하며 국제적 연대를 보여줬다. 대만 노동운동의 고민을 전해 들으며 그들이 한국의 노동자들과 꽤 유사한 경로를 거쳐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양국 노동자들은 상호 참조를 통해 자신의 상황을 통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억압적 노동정책 산물 ‘신흥공업국’
두 나라는 식민지 상황에서 자본주의를 이식받았고, 이와 함께 노동운동의 역사도 시작됐다. 1945년 일본 패전 뒤 집권한 대만 국민당은 불과 몇년 만에 큰 실망감을 안겨줬다. 명·청 시기부터 살아온 본성인들은 장제스와 함께 입도한 외성인들이 일제와 다를 바 없는 식민주의자에 불과하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물가 인상과 경기 침체, 실업률 확대로 불만이 폭발해 대중 시위로 번지자, 장제스 총통은 대량 학살로 대응했다. 이는 해방 정국에 제주·대구에서 이뤄진 이승만 정부의 학살을 연상케 한다.
1980년대 후반까지 대만과 한국은 독재와 반공주의 탄압을 경험했다. 대만의 계엄정권이 진보 지식인과 원주민 독립운동가를 표적으로 삼았다면, 한국 군부정권은 진보 지식인과 노동운동가를 탄압했다. 이 시기 양국은 극심한 노동착취로 얼룩진 수출지향적 산업화를 통해 신흥 공업국으로 부상했으며, 철강·화학·통신 등은 국가전략산업으로 정부가 관리했다.두 나라 정권은 흡사 국가사회주의처럼 국가 주도 산업화를 기획했고, 외국 자본의 투자를 유인하기 위해 억압적 노동정책을 펼쳤다.
1970년대 유신독재 시기 한국에선 방직공장 여성노동자들의 운동이 있었다면, 대만에선 계엄령에 맞서 민주주의를 목표로 삼았던 ‘당외세력’이 형성됐다. 1977년 11월 선거 부정에 항의하며 폭발한 중리 시위와 1979년 12월 가오슝 시위에서 노동자들은 약 30년 만에 첫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원동신세기나 철도 등 대기업에서 노조 민주화를 위한 모임이 결성됐고, 파업이 가파르게 늘자 계엄 정부는 1984년 근로기준법을 제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모순은 자본과 노동의 갈등에서 촉발되기 마련이다. 한국 진보세력이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주류 지식인들과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한 제도 밖 민중운동으로 갈라질 때, 대만에서도 유사한 분열이 드러났다. 나중에 민진당으로 거듭나게 될 당외운동 주류는 외성인 기업들의 이익을 위해 정치·경제적 특권의 피라미드를 구축해온 계엄국가의 개혁을 목표로 삼았고, 노동자들의 권리 신장을 중요하게 여긴 이들은 별도의 정치세력화를 도모했다.
1980년 약 6천명이 참여한 대만의 파업 물결은 1989년 약 10배인 6만3천명으로 늘었다. 노동자들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한국 노동자들이 그랬듯, 집권당이 통제하는 어용노조의 통제를 벗어나 자주공회를 만들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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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MC 시선이 아니라
통상 노동운동이 국가권력과 자본의 억압에 맞서는 가장 큰 이유는 땀 흘려 일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일터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고, 그러한 목소리들의 정치적 구심으로 부상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대만 노동운동은 이런 과제를 한참 뒤로 미뤄야 했다. 1984년 137만명까지 늘었던 조합원 수는 1998년 57만5천명까지 추락했다. 무엇보다 식민지 시기 제정된 노동법은 민주화 이후에도 계속 방치됐다. 단체교섭 자체가 거의 제도화되지 않았고, 그나마 체결된 것도 정부가 제정한 법령을 그대로 받아 적은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한국에선 단체행동권의 회복과 함께 발언권이 대폭 확대됐고, 노동쟁의 절차와 해결에 대한 규정이 어느 정도 상세하게 정립됐다. 이에 반해 2010년까지도 대만 노조법은 쟁의권에 대한 강력한 제한을 유지했다.
대만 노동운동이 권력과 자본가 연합의 헤게모니를 넘지 못한 이유는 뭘까? 많은 이들이 국가주의적 사회에 뿌리내린 정치·경제적 역학관계와 반공주의를 지적한다. 1949년 국민당은 국공내전에서 패퇴했고, 1965년 미국의 원조가 중단됐으며, 급기야 1979년 미-중 수교 이후엔 대만이 유엔에서 배제됐다. 이런 외부충격은 자본-노동 갈등을 탈정치화해버렸다. 자본주의가 낳은 모순들이 손쉽게 민족문제로 대체된 것처럼 인식된 것이다.
197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 전선으로 모인 본성인 지식인들은 본성인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 갈등을 애써 무시했다. 당외세력의 ‘대만 독립’이라는 정체성 역시 그들이 재정적으로 의존하던 본성인 기업가들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강화됐다. 결국 1990년대 이후 대만의 대만화와 민주화가 갖는 정치적 대표성은 자본 친화적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대만 기업의 대륙 이전은 별 저항 없이 이뤄졌고, 노동자 계급을 분열로 인도했다.
물론 노동자들의 불만은 폭넓게 존재했고, 이는 얼마든 사회운동 조직화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풀뿌리의 힘은 불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강화되지 않는다. 전근대적 사회통합 기제가 독립적 노동운동을 가로막았고, 자율성과 조직화 정도가 미약했기에 더 강한 운동을 구축하기엔 역부족이었다. 1989년 원동신세기 공장의 대규모 파업이 실패한 이유 역시 공동체성의 결여, 보수적 사고방식, 노조 지도부와 조합원 간 소통의 부족 등으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대만 노동운동은 임금 인상과 노동 안전을 위해 치열하게 싸워왔고, 정치권의 친기업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에 맞서며 독립성을 강화해왔다. 이제 대만 노동운동가들은 노조 가입률을 높이고, 제조업·어업·돌봄서비스에서 급증하는 이주노동자들을 모으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양당 정치를 극복하고 대안적인 정치세력을 구축하는 것, 신냉전 전쟁 위기나 국가주의로의 압박에서 벗어나야 할 과제 역시 중장기적 숙제다. 양국 노동자가 티에스엠시(TSMC)나 삼성의 시선이 아닌, 자기 계급의 관점을 만들어갈 때 캄캄했던 길도 차츰 밝혀지지 않을까? 이웃 나라 노동자들과 더 많은 마주침과 대화가 이뤄지길 소망한다.
동아시아 연구활동가
플랫폼C 활동가. 동아시아 이야기를 씁니다. 각 사회의 차이를 이해하고, 같은 꿈을 지향하자(異牀同夢)는 의미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상을 품은 동아시아의 꿈(理想東夢)이라는 뜻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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