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자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소설이 됐으면”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김용출 2023. 8. 27.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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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대학에 다닐 때 큰 자극을 받고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강의 대부분은 젊은 여자 강사가 했던 수업들이었어.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했던 동기와 전화 통화를 했다. ⋯맞아, 우리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강사가 애정을 갖고 자신이 공부한 것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랬던 것 같아.

2018년 겨울, 소설가 최은영은 대학원 동기와 함께 대학 시절 젊은 강사들의 수업에서 자극을 받았던 경험을 화제로 통화했다. 그러다가 이들 유능한 젊은 강사들 가운데 정교수가 된 경우가 드물다는 현실을 환기하곤 이내 씁쓸해졌다.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결론은 모아지고 있었다.⋯근데 유능했던 그 젊은 강사들은 정교수가 되지 못하고 어떻게 되었을까. 도대체 그들은 다 어디에 간 걸까.
최은영 작가.
문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서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했지만 논문은 쓰지 않기로 결심한 뒤였다. 대학원에선 문학 작품을 읽을 시간이 오히려 많지 않았다. 대신 연구와 논문 공부가 줄을 이었다. 조교를 맡으면서 사무적인 일도 많았다. 후회가 밀려왔다.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라면 대학원에 가는 방법 말고 다른 것도 있었는데.

“문학 강의를 처음 해본 뒤, 박사학위 논문을 쓰지 않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것과 잘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행정적인 일이 많은 것도 걸렸고, 젊은 학생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도 두려웠어요. 무엇보다 소설을 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 스타일이었는데, 논문을 쓰기 위해 소설을 쓸 시간과 어떤 감각을 낭비하는 게 안타깝게 생각됐습니다.”

공부하기 위해서 대학원에 왔다가 상처받은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다. 연구자들의 능력에 의해서만 평가받는 곳도 아니었고, 대학 사회 바깥보다 더 보수적인 면도 적지 않았다. 만약에 공부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진 학생을 만난다면 말해주고 싶었다. 공부는 대학원에 가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마침 용산참사도 십주 년이 다 돼가던 때였다. 충격적인 참사였지만, 참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 보였다. 이미 지워져버린 이야기가 돼가고 있었다. 얼마 전 용산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과 「공동정범」을 보고 가슴이 아팠던 그는 용산에 대한 생각도 담고 싶었다.

그리하여 뒤늦게 편입한 학생 ‘희원’과, 그녀가 좋아한 젊은 강사 ‘그녀’와의 복잡한 어긋남과 화해의 과정을 용산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담은 단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잡지 『릿터』 2019년 2/3월호에 발표했다.

소설은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스물일곱의 나이에 영문학과 편입생이 된 희원이 지적인 자극을 주는 젊은 강사 ‘그녀’에게 매료되면서 시작된다. 소소한 일들로 가까워지던 어느 날, 대학원 진학을 희망하던 희원은 “공부는 대학원 아닌 곳에서도 할 수 있는 거, 희원씨도 알죠”(37쪽)라고 되묻는 그녀의 말에 상처를 받고,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뱉어버리면서 둘의 관계는 파탄 난다. 다시 9년이란 시간이 흘러서 그녀처럼 젊은 강사가 되었을 때, 희원은 비로소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을 때 어떤 희미한, 아주 희미한 빛을 보게 된다.

“나는 아직도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기억하는 일이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을 증명하는 행동이라는 말을.”(33쪽)

사람간의 관계 문제를 그리는데 특출한 감각을 발휘해온 작가 최은영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비롯해 각종 잡지에 발표했던 중·단편 7편을 엮은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문학동네)를 들고 돌아왔다. 5년 만의 소설집 출간이다.

소설집의 작품들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처럼, 독자들을 사회적 맥락을 가진 다양한 관계 속으로 이끈다. 비정규직 문제 속에서 동갑내기 인턴 다희와 카풀을 하면서 전혀 다른 대화를 하는 지수의 관계를 다룬 「일 년」, 엄마가 집을 나간 뒤 부모 역할을 해온 언니와 그 언니가 무시당하는 현실과 맞서려는 ‘나’의 모습을 그린 「답신」, 텃밭을 배경으로 일찍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자신을 보살펴준 오빠와, 오빠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는 여동생 이야기를 담은 「파종」, 작고한 이모와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여온 조카의 관계를 그린 「이모에게」⋯.

등단 10년을 맞이한 최은영 작가가 깊이 있게 천착한 다양한 관계 속에는 우리 사회의 어떤 모습이 담겨 있을까. 작가의 문학적 여로는 어디로 향해 나아갈까. 최 작가를 지난 4일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표제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속에서 희원은 ‘능동적 순응’, 그러니까 ‘안전한 글쓰기’를 반성하는 대목이 나온다. 스스로 생각하는 글쓰기는 어떤가.

“저는 용기 있는 글을 쓰고 싶었지만, 제 마음만큼 용기 있게 쓰지는 못했다. 사회를 비판하거나 부정의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에 두려움은 없다. 하지만 제 자신의 어리석음 같은 것을 쓰는 것이야말로 진짜 용기가 필요한 부분 같다. 남들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 어두운 부분, 후지고 못난 모습, 나쁜 면을 보여주는 게 더 용기 있고 진실한 글쓰기다. 사람들은 누구나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더구나 자기 피알을 잘해야 되고 에쓰엔에스 같은 것으로 멋진 자신을 전시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는 요즘 아닌가. 하지만 글쓰기, 소설쓰기는 어쩌면 이런 것과 반대로 가야 한다.”
작품 「몫」은 도서관 앞에 쌓인 교지를 우연히 집어 들었다가 선배 정윤의 글에 마음을 빼앗긴 스무 살 해진이 교지 편집부에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해진은 날카로운 글을 쓰는 동기 희영에 압도되고, 여성문제를 둘러싸고 갈등과 논쟁이 첨예해지면서 해진과 희영, 선배 정윤 사이에 점점 틈이 만들어진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고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내가 그랬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달랐겠지만.”(79∼80쪽)

―이 작품은 어떻게 태어났는지.

“대학교에 다닐 때 교지 편집을 하면서 친구들과 책을 읽고 의견을 말하고 글쓰기를 배웠다. 소중한 경험이자 기억이었다. 그때 기지촌 여성 문제를 비롯해 한국 여성인권 운동사를 공부하면서, 미군에 의해 피살된 윤금이씨 사건 당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고 사건을 이용했는지 알게 됐다. 살아있을 땐 거의 사람 취급을 하지 않다가 죽고 나선 ‘민족의 누이’로 만들어 시신 사진을 유인물로 뿌렸다. 제가 윤금이씨나 그 가족이었다면 무척 슬프고 화가 났을 것이다. 고려대생이 이화여대에 가서 여대생들을 폭행했다는 대자보를 보고서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라고 생각했다. 그런 기억들을 더해 쓴 것 같다. 아울러 글 쓰는 사람으로서 어떤 문제에 대해 글을 썼으니까 할 일을 다 했어, 난 부정의하고 잘못된 것의 반대에 있는 사람이야,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마음 편해질 위험성이 있다고 경계해 왔다. 나르시시즘이고, 위험한 일이다. 글 쓰는 것은 그저 노동일뿐이지, 다른 노동에 비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소설 속의 희영과 정윤, 해진의 길과 글쓰기가 모두 다른데.

“저에게는 희영도 있고, 해진도 있고, 정윤도 있다. 대학교 때 고민을 했다. 여성단체 활동가가 될 수도 있고, 글 쓰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공부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어느 순간 선택을 해야 했는데, 글쓰기를 선택했다. 저에겐 글쓰기가 가장 큰 욕망이었는데, 해진이 가장 비슷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교지 편집부에서 활동할 때 잘 쓴 글은 어떤 기교라든가 하나마나한 이야기나 입에 발린 말을 예쁘게 포장해 쓰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관점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자기만의 개성, 자기만의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소설집을 닫는 「사라지는 또 사라지지 않는」은 식모 출신의 육십 대 여성 기남의 시각으로 복잡하면서 어려운 모녀 관계를 긴 호흡으로 풀어간 작품이다. 식모 출신 기남은 홍콩에 살고 있는 작은딸 우경을 만나기 위해 짧은 여행을 떠난다. 기남은 우경과 손자 마이클과 함께 홍콩 시내에 구경 갔다가 실수를 저지르고, 집에 돌아와 자신의 삶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일곱 살 손자 마이클은 부끄러워도 된다고 위로하자, 기남은 비로소 어떤 ‘따뜻한 통증’을 느낀다.

“기남의 품에서 나온 마이클이 기남의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부끄러워도 돼요. 부끄러운 건 귀여워요. 에밀리가 그랬어요.’⋯기남은 조심스럽게 마이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숱이 많은 곱슬머리가 우경의 어린 시절과 똑같았다. ‘마이클은 다정하구나.’ ‘맞아요. 엄마가 그랬어요. 마이클은 너무 다정해. 한국 할머니처럼.’ ‘정말?’ ‘근데 너무 다정하면 안 된대요.’ 마이클이 잠시 기남을 보다 말을 이었다. ‘너무 다정한 건 나쁜 거래요.’ 따뜻한 통증이 기남의 등과 배에 퍼져 나갔다. 기남은 마이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클은 자신을 몰랐고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몰랐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 애는 오히려 자신보다 자신을 더 많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건 무슨 이유였을까. 부끄러워도 돼요. 기남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말. 기남은 그 말을 잊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319쪽)

―이 소설은 어떻게 나오게 됐나.

“(2021년 출간된) 장편 『밝은 밤』을 쓰면서 많은 논문이나 자료를 봤다. 그 가운데 한국 사회 식모에 대해 쓴 논문도 있었다. 1970, 80년대 딸이 많은 가난한 시골집에서 어린 딸을 다른 집의 식모로 보내곤 했고, 식모로 보내진 어린 아이들은 돈도 받지 못하거나, 맞고, 강간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들 어린 아이들은 한국 사회로부터 보호받거나 구제되지 못했다. 먼 옛날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도 엄연히 일어나는 일이다. 싱가포르나 홍콩에선 필리핀 여성을 싼 값에 데려와 가사노동을 하도록 한다. 싱가포르 아파트엔 다용도실 같은 작은 곳에 일하는 사람의 방이 있다. 홍콩에선 가사 노동하는 여성이 주말 휴가 차원에서 집밖에 나가 살도록 했는데, 많은 이들이 갈 데가 없어 길바닥에서 잔다고 한다. 지금 정부에서도 필리핀 여성들을 모시고 오면 저출산 문제가 다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지만 이런 사람도 있겠지. 어느 날 동네를 산책하다가 이런 세상을 살아온, 할머니라기엔 조금 젊은 기남이 떠올랐다. 구체적인 생애까진 아니었지만, 사랑받는데 실패한 외로운 어떤 60대 여성과 그 마음이. 마음이 아팠다. 부끄러워도 돼요. 얼마 뒤 도서관에 앉아 있는데, 이번에는 아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남의 손자가 기남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부끄러워해도 된다고.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서둘러 메모한 뒤,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며 소설을 써내려갔다.”

―사라지는 것은 무엇이고,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시간이나 사건 자체는 다 사라진다. 기남이 어렸을 때 고생한 시간도 사라졌고, 딸들을 키웠던 시간도 사라졌으며, 생모를 만나러 명동 중식당에 가서 생모에게 거부당했던 순간도 사라졌고, 할머니가 돼 홍콩 여행하는 시간도 사라졌다. 하지만 비록 아픈 손가락이지만 첫째 딸 진경이 자신을 사랑해줬던 순간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마음에 남아 있고, 생모에게 거부당했던 그 기억 역시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손자 마이클이 기남을 위로한 것은 사라지고 마이클 역시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마이클의 그 마음이나 기남이 받은 위로의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앞으로 기남이 살아가는 데 힘이 될 것이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에세이 쓰기, 「몫」의 해진과 희영의 기사, 「답신」의 편지글, 「파종」의 딸 등 네 작품에서 글쓰기를 다루고 있는데.

“아무래도 작가 생활을 5년 정도 한 뒤에 쓴 작품들이라서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묻어난 것 같다.(독자들 역시 어떻게 하면 글을 쓸 수 있을지, 더 잘 쓸 수 있을지 궁금해할텐데) 저도 늘 고민한다. 우선 좋은 작품을 많이 읽어야 할 것이다. 읽지 않으면 잘 쓰기 어렵다. 어쩌면 읽는 게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또 교훈을 주거나 멋있게 쓰려고 하면 망하는 것 같다. 솔직하게 자연스럽게 써야 한다. 문장이 엉망이어도 글 안에 생명이 있으면 좋은 글이고, 문장은 멋지고 많은 내용이 들어가 있더라도 생명이 없다면 죽은 글이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쓰는 게 아니라 자신의 아픈 부분을 쓰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5년만의 소설집 출간인데,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쓴 것이어서 그 기간 저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소설 같다. 지금까지 달려왔구나. 열심히 하려고 했던 마음이 느껴지는 작품집 같다. 독자 100명이 소설을 읽으면 100명 모두 다르게 받아들일 것이다. 모두 다른 삶이겠지만, 그래도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살면서 슬픔이라든지 두려움이라든지 미움이라든지 여러 부정적인 감정을 만난다. 마지막 단편에서 마이클이 부끄러워도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래도 되는구나, 하고 자신의 마음을 읽고 바라볼 수 있는 소설이 됐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단편을 조금 많이 쓴 것 같다. 앞으로 숨을 돌리면서 당분간 단편은 좀 쉴 생각이다.”

나도 이런 것을 쓰고 싶어! 중학교 때 소설책을 읽다가 문득 글 쓰는 세계를 생각하게 됐다. 내성적인 성격에 어릴 때부터 소리 같은 것에 민감해 책 읽기를 좋아한 그였다. 교사로, 책을 좋아했던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책을 읽고 있으면 외부와 단절이 됐고 집중도 잘 됐다. 심지어 책으로 성을 쌓아놓고 그 안에서 책을 읽을 정도였다.

여고생 최은영은 1학년 때 혼자 처음 소설을 썼다. 다 쓰고 나니, 마치 다른 사람으로 빙의된 기분이 들었다. 너무 좋았고 즐거웠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어떤 마음이 들어앉았다. 나도 창작을 하고 싶어. 소설가 최은영의 원점이었다.

나는 절대 저쪽으로 갈 수 없을 거야. 그럼에도 정작 대학 국문학과에 진학해 문학을 공부하면서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문학사에 등장한 작가와 작품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되면서 마음이 오히려 작아졌다. 문학은 범접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였다. 한편으론 현실적으로 돈을 벌어야 된다고 걱정 역시 그를 짓눌렀고.

뒤늦게 모교 대학원에 들어가 공부했지만 매 순간이 힘들었다.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고통을 받는 게 힘들었다. 물론 회사에 들어갔거나 다른 일을 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글쓰기가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있어서 힘들었다. 자신을 속이고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물고기가 물에서 살아야 하듯, 그는 글을 써야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글을 쓰고 싶어. 이십 대 후반이 되자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마음이 터져 나왔다. 모든 일이 어렵고 힘들겠지만, 고통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스스로 선택한 방식으로 힘들고 싶었다. 작가로서 힘들겠지만, 사랑하는 일이기에 감수할 만한 고통이라고 생각했다.

1984년 광명에서 교사인 아버지와 직장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최은영은 습작을 거듭한 끝에 2013년 「쇼코의 미소」로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등단 이후 소설집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 장편소설 『밝은 밤』 등을 펴냈다.

팬데믹 직전이던 2019년 말, 미국의 어느 작가 레지던스 방에 짐을 풀고 책상 앞에 앉아서 노트북 모니터를 마주보고 있었다. 창밖에는 눈 쌓인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고요가 한없이 몰려왔다. 이때 문득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옛날 백정 신분으로 살았던 여자 아이의 삶은 어떠했을까. 언젠가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를 읽다가 에피소드 가운데 백정의 딸 부문에서 잠깐 스쳐 지나갔던 생각이. 상상하면서 스케치했던 백정 소녀가. 사람이 무서우면서도 사람의 따뜻함을 그리워한 ‘삼천’이란 인물이. 고구마 엮듯이 이야기가 밀려왔고,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그는 다시 쓰는 세계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증조할머니 ‘삼천’으로부터 시작해 할머니, 엄마, 나로 이어지는 여성 4대의 서사를 다룬 장편 『밝은 밤』을 발표했다.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허균문학작가상, 김준성문학상, 이해조소설문학상,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 한국일보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어떤 작품 세계를 그려왔는지.

“특별한 의도를 가지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창작해 왔다. 무엇을 쓰는지도 모르고 쓰다가 첫 번째 소설집이 나왔을 때 독자들이 관계를 중요시하고 관계에 대해서 쓰는 사람이라는 리뷰가 많았다. 아, 나는 관계에 대해서 쓰는 사람이구나. 관계에 관심이 많고, 특히 마음이 여린 사람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쓰거나 작가를 꿈꾸는가.

“1984년 한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나서 다른 세계에서 태어난 사람들과 다른 경험을 했다. 나이대가 다른 사람들과도 다른 경험을 했다. 저의 시대적, 세대적 정체성이나 이 나라에서 사는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들여다보면서 어떤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대학교 2학년 때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고 있을 때, 은희경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시계 끈에 향수 냄새가 배었는데, 그 냄새를 맡으니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는 식의 장면을. 은희경 작가를 기억할 때마다 항상 그 순간이 생각난다. 작가와 작품이 자신도 모르게 한 사람의 인생에 들어가는 순간이 있다. 몇 살 때 최은영의 소설 어떤 부분을 읽었던 게 생각난다, 라는 식으로 기억되면 좋을 것 같다.”

―글쓰기의 전략이나 방법, 원칙이 있다면.

“나는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글을 쓰지 않는다고 어떤 작가가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제 마음을 얘기해준 것 같다. 머리로 아는 것을 썼을 때 읽는 사람이 공감하기 어렵다. 이렇게 글을 쓰면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하겠지, 하는 식의 얕은꾀로 깊이 있는 글을 쓸 수 없다. 인물에 대해 공감이 되지 않고, 그 사람의 마음을 잘 모른다면 쓰기 힘들고 쓰지 않으려고 한다. 대신 떳떳하지 못하거나 더럽거나 부끄러운 것일 수도 있지만, 진짜 자신의 마음으로 알고 있는 것을 인물과 함께 느낄 수 있는 글을 쓸 때 독자들도 공감하는 것 같다. 진짜를 써야 한다. 자신에게 진실하고 솔직해져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 같다.(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는) 항상 안 써지지만, 안 써질 때와 더 안 써질 때, 더더 안 써질 때가 있다.(웃음) 진짜 안 써지면, 스마트폰을 멀리하고 책을 많이 읽는다.”

낮 최고 기온이 섭씨 34도가 넘던 그날, 최은영은 처음 얼마간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있는데도. 아마 코로나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어서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창문 두 개를 활짝 열어 환기를 시켰다. 마스크를 편하게 벗을 수 있도록.

단순한 삶과 학교 또는 동네 도서관 어디에선가 썼을 소설집 단편 모두를 이야기할 순 없어서, 편의상 3개 작품만 골랐다. 그는 작품 선택 기준을 무척 궁금해 했다. 특히 사랑받는 데 실패한 식모 출신의 60대 여성 기남을 그린 마지막 단편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을 선택한 이유를 거듭 물었다.

기자의 소설 이야기는 이날 이상하게도 정돈되지 못하고 주저리주저리 이어졌다. 그럼에도 그는 인내심을 갖고 들어준 뒤, 자신의 마음을, 부끄러울 수도 있는 진심을 솔직하게 들려줬다.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천천히 따라가다가 그의 어떤 마음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날 마음이 어떤 마음에 천천히 가닿고 있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허정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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