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가 죽고 북극곰도 죽으면 다음은…? [여여한 독서]
제마 워덤 지음 박아람 옮김
문학수첩 펴냄
더위를 이기자고들 한다. 임계온도를 넘어서면 살 수 없는 게 인간인데 무슨 수로? 더위는 이길 수 없다. 어디 더위만 그런가, 다른 괴로움도 마찬가지다. 지나기를 기다리며 잠시 피하거나 잊을 수 있을 뿐. 이길 수 없는 더위를 이기려 에어컨을 빵빵하게 트는 대신 내 안에 서늘함을 들여 잠시나마 더위를 잊어보면 어떨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엔 납량 독서용 책을 골랐다. 제마 워덤의 〈빙하여 안녕〉이다. 차가운 빙하가 죽어가는 이야기이니 이보다 추운 책도 없지 싶은데.
이 책을 만나기 전에 내가 애용하던 납량 도서는 두 가지다. 사진 예술가 레이첼 서스만의 〈위대한 생존〉(개정판 〈나무의 말〉, 김승진 옮김, 윌북 펴냄)과 자연주의 작가 배리 로페즈의 〈북극을 꿈꾸다〉(신해경 옮김, 봄날의책 펴냄). 배리 로페즈의 〈북극을 꿈꾸다〉는 사진 한 장 없이 500쪽 넘게 북극의 자연과 역사에 대해 풀어내는데, 얼음결정처럼 순정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더위를 잊게 한다. 하지만 너무 더워 집중력을 발휘할 수 없을 때 긴 글은 아무래도 버겁다.
그럴 땐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들의 이야기를, 영혼을 담은 사진과 글로 보여준 〈위대한 생존〉이 제격이다. 나무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는 사진들은 볼수록 경이롭고, 책의 도입부와 마지막을 장식한 남극 이야기는 가슴 서늘한 감동을 준다. 책에 실린 사진들이 다 놀랍지만 특히 서스만이 남극에서 숭어를 직접 죽여 요리한 흔적을 담은-피 묻은 바위-사진은 잊을 수가 없다. “내 손으로 죽일 수 없는 것은 먹지 않는다”라는 원칙대로 살려 했고 남극의 척박한 환경에서 이를 실천했다는 서스만의 정직함에 감동해 나도 그를 본받으려 애쓰지만 쉽지 않다.
그나저나 이 책들은 나온 지 10년이 다 돼간다. 업그레이드되는 더위에 맞춰 책도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시점인데, 딱 맞춰 〈빙하여 안녕〉을 만났다. 저자인 제마 워덤은 30년 가까이 그린란드, 남극, 스발바르, 히말라야, 파타고니아, 페루 안데스까지 전 세계 빙하를 탐사하며 연구한 세계적인 빙하학자다. 그리고 이 책은 빙하의 구조와 역사, 활동방식,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까지 그야말로 빙하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파헤친 보기 드문 빙하 교과서다.
책을 읽기 전까지는 빙하에 별 관심이 없었다. 빙하 하면 얼음덩어리를 떠올렸고 빙하가 녹는다는 뉴스를 보면, 큰일이다, 해수면이 오르겠구나, 생각한 게 전부다. 이 책 역시 빙하에 대해 알고 싶다기보다 목숨 걸고 빙하를 연구하는 워덤이란 사람이 궁금해서 읽기 시작했다.
한데 알면 사랑한다던가. 빙하에 대해, 빙하를 사랑하는 저자에 대해 알게 되니 전처럼 빙하를 냉대할 수가 없다. 무지에서 기인한 나의 냉대가 이 변방의 존재를 사라지게 만들고 있다는 걸 아니 더욱 그렇다. 뇌종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을 때 빙하를 떠올렸고 소멸 위기를 겪는 빙하를 구하고픈 절박한 심정으로 책을 쓰게 됐다는 저자의 마음도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그래서 책을 열심히 읽었고 열대야가 이어지는 복더위에도 에어컨 없이 견뎠다. 그 간절함을 전하고 싶어 이 글을 쓴다.
빙하 장례식이 열리다
시작은 스위스 알프스산맥이다. 지리학과 학생이던 스무 살 워덤은 그곳에서 처음 빙하를 만난다. 크레바스와 빙폭이 뒤엉킨 얼음 위를 걷고, 거센 하천에 휩쓸리고, 얼음 절벽에 몸을 던지는 극한 경험으로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나라면 최대한 빨리 멀리 달아났을 텐데 그는 이 살벌한 현장을 떠나는 대신 빙하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꽁꽁 숨은 빙하의 비밀에 매료된 것이다.
이후 수십 년간 그는 25회 이상 원정대를 이끌고 세계 각지의 빙하를 탐사하며 비밀을 파헤친다. 그렇게 드러난 빙하의 비밀은 놀랍기만 한데, 우선 비밀이랄 것도 없는 단순한 사실 확인부터 하자. 책을 보기 전엔 빙하는 희고 단단한 거대한 얼음덩어리라고 생각했다. 아니다. 색깔만 해도, 얼음 속 공기와 퇴적물에 따라 흰색, 파란색, 갈색 등 여러 색을 띤다. 언뜻 보면 가만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계속 움직인다. 매년 2~3m씩 기어가는 것부터 하루에 1m씩 이동하는 것까지 속도도 제각각이다. 또한 지역과 지형에 따라 구조도 성질도 다르다. 가령 같은 극지방이라 해도 북극엔 남극과 달리 부위별로 온도가 다른 ‘다온성 빙하’가 많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겠지만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일테면 빙하의 이동속도는 지형을 변화시킬 수 있고 영양이 풍부한 빙하분의 공급과 미생물 생존에 영향을 미치며, 빙하가 녹은 융빙수는 그린란드나 파타고니아에서처럼 피오르 먹이사슬의 토대가 된다. 그뿐 아니라 5만 개 이상의 곡빙하가 있는 히말라야에서 융빙수에 의존하는 인구는 10억명이 넘는다. 한마디로 빙하는 불모의 얼음덩어리가 아니라 그 아래 생명이 가득한 지구 생물권의 일부이며 인간의 생존과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다.
그런 빙하가 죽고 있다고, 워덤은 비통하게 전한다. 빙하의 죽음은 수사가 아니라 현실이다. 이미 2019년 아이슬란드에서는 최초로 ‘오크예퀴들’ 빙하의 장례식이 열렸다. 빙하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추모비에는 ‘미래에 보내는 편지’가 새겨졌다. “앞으로 200년 사이에 모든 빙하가 같은 길을 갈 것”이며, “우리는 현재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라고 적힌 편지다.
편지글과 달리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이들을 위해 워덤은 말한다. 우리가 무엇을 먹고, 냉난방을 어떻게 하고, 어디를 어떻게 여행하는지 그 모든 선택에 빙하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빙하만이 아니라 북극곰의 운명도, 너와 나, 우리의 운명도 달려 있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김이경 (작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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