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안중근 순국지' 현판도 철거…중국서 사라지는 항일운동 자취들
윤동주 생가·교실, 명동학교 등 룽징 항일운동 산실도 줄줄이 문 닫아
"내부 수리"라지만 공사 움직임 안 보여…"시설 낡아, 과도한 반응 불필요" 시각도
(뤼순·룽징=연합뉴스) 박종국 특파원 =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의 본거지였던 중국 동북 지역에서 우리 민족의 항일 투쟁 산실들이 잇따라 문을 닫은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당국은 보수 공사를 위해서라는 이유를 내세웠으나, 현장을 취재한 결과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들이 적지 않았다.
최근 들어 중국이 '중화 민족 부흥'과 '중화민족 공동체 건설'을 전면에 내세우는 기조 속에 우리 민족의 항일운동 산실을 '홍색 혁명의 교육장'으로 삼으려는 큰 그림에서 이뤄지는 움직임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어 보인다.
뤼순감옥 박물관, 안중근 수감됐던 별채 감옥·항일운동가 전시실 폐쇄
특파원이 지난 24일 찾은 중국 랴오닝성 '뤼순 일아(일본과 러시아)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 박물관'(이하 뤼순감옥 박물관)에는 중국을 침략한 일제 만행의 현장을 자녀에게 알려주려는 가족 단위 관람객들로 붐볐다.
비좁고 열악한 감방과 노역장, 수감자들을 교수형에 처했던 시설들이 당시의 모습대로 보존돼 관람객들에게 공개됐지만, 일제 침략을 이끈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가 수감됐던 별채 감옥은 찾기가 쉽지 않았다.
1909년 10월 26일 헤이룽장성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체포된 안 의사는 사형선고를 받아 이듬해 3월 26일 순국할 때까지 뤼순감옥에 수감됐다.
일반 수감자들이 투옥됐던 감방 건물 옆에 지어져 안 의사가 따로 수감된 별채 감옥은 항일 운동가들이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음을 알려주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과거 중국은 이 별채 감옥 외벽에 안 의사의 사진과 그의 의거를 알리는 안내문을 내걸고, 안 의사가 사용했던 침대와 책상 등을 관람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또 입구에는 '안중근 의사 취의지(就義地)'라는 현판을 내걸어 이 별채 감옥이 안 의사가 수감됐던 곳임을 알렸고, 뤼순감옥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은 가장 먼저 이곳을 찾곤 했다.
취의지란 '의를 취하기 위해 희생된 곳'이라는 의미로 안 의사의 거사를 중국도 높게 평가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날 방문했을 때 이 현판은 떼어져 있었고, 창문은 가림막이 설치돼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었다.
이 별채 감옥을 드나들 수 있었던 통로에는 흰색 담장이 설치됐고, 일반 감옥 건물에서 별채 감옥으로 갈 수 있는 쪽문도 폐쇄돼 관람객들의 접근이 원천 차단됐다.
박물관 입구에 동판으로 새겨놓은 시설 안내도를 주의 깊게 확인하지 않는다면 이 별채 감옥을 찾는 것은 고사하고 존재 자체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안내원은 폐쇄 이유를 "내부 수리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별채 감옥에는 보수 공사를 알리는 안내문도, 공사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국제 전사 전시실' 역시 '안전상의 위험으로 인해 수리가 필요해 잠시 폐쇄한다'는 안내문과 함께 굳게 닫혀 있었다.
국가보훈처(현 국가보훈부) 등이 2009년 중국 당국의 허가를 받아 설치한 이 전시실에는 안 의사와 단재 신채호 선생, 우당 이회영 선생의 흉상과 사료 등 뤼순감옥에 수감됐다 순국한 우리의 독립운동가 11명의 활약상을 소개하는 사료가 전시됐다.
창문을 통해 들여다본 내부에는 간이 삼각 사다리 3개가 세워져 있었지만, 공사를 진행하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롄의 한국 영사출장소는 "국제 전사 전시실은 지난 5월부터 폐쇄됐고, 안 의사가 수감됐던 감옥은 지난 13일까지는 창문을 통해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그 이후 가림막이 설치됐다"고 말했다.
국제 전사 전시실과 맞붙어 있는 또 다른 전시실에서는 지난 5월 1일부터 '사도적수(四渡赤水)' 특별 전시전이 열려 대조를 이뤘다.
사도적수는 국민당의 공격을 피해 '대장정'에 나섰던 중국 공산당 홍군이 구이저우와 쓰촨, 윈난 등 3개 성(省) 경계의 강인 츠수이(赤水)를 네 번 건너면서 국민당 포위망을 벗어난 일로, 마오쩌둥의 '출중한 지략'을 홍보하는 데 활용돼왔다.
이 전시실 마지막에는 '국치를 잊지 말고 중화를 진흥하자(勿忘國恥 振興中華)'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걸려 있었다.
박물관 잔디밭에는 뤼순 감옥에 투옥됐던 중국인 3명이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1940년 옥중에서 공산당 지부를 건설해 활약했다는 표지석과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중국이 항일운동 교육 기지였던 뤼순감옥 박물관을 '홍색 혁명'의 선전 공간으로 전환하려는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항일 운동 색채를 옅게 하기 위해 안 의사 수감 시설과 국제 전사 전시실 폐쇄에 나선 것일 수 있다는 관측이 일각에서 제기되는 이유였다.
'조선족 시인' 부각한 윤동주 생가·명동 학교·'윤동주 교실'도 줄줄이 폐쇄
일제 강점기 항일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생가도 지난 7월 문을 닫았다.
지난 25일 찾아간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룽징시 명동촌(明東村)에 복원된 윤동주 생가 문 앞에는 중국어와 한글로 '내부 수리 중이어서 참관을 잠시 중단한다'는 안내문이 걸려 있었다.
중국은 2012년 윤동주 생가를 복원하면서 입구에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이라고 적힌 비석을 세워 그의 국적을 둘러싼 논쟁을 일으킨 바 있다.
그러나 안을 들여다보니 공사를 한 흔적이나 수리를 준비하는 움직임은 없었다.
이곳에서 100m가량 떨어진 곳에 세운 '명동학교 옛터 기념관'도 '수리 기간이라 참관을 사절한다'라는 안내문과 함께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명동학교는 김학연 등 애국지사들이 1908년 설립한 학교로, 윤동주와 나운규를 비롯한 수많은 항일 운동가를 배출한 민족교육기관이다. 일제는 이 학교를 조선인 독립운동의 소굴로 규정, 탄압해 1925년 폐교시켰다.
수리 기간이라는 안내와는 달리 창문으로 들여다본 내부는 말끔해서 육안으로 봐서는 공사해야 할 곳이 있을까 싶었다. 내부 수리를 하는 움직임도, 공사를 준비하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항일운동의 요람이었던 룽징(龍井)중학교에 2011년 윤동주 시인의 재학 시절 교실 모습을 재현한 '윤동주 교실'도 외부인들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룽징중학교는 윤동주의 모교인 광명중과 이준 열사가 다녔던 은진중, 대성중 등 룽징지역 6개 학교가 1946년 통폐합돼 옛 대성중학교 터에 세워진 조선인 학교였다.
지금도 현지 학생들이 다니는 룽징중학교 내 건립된 '대성중 전람관' 1층에 50㎡ 규모로 마련된 이 교실에는 당시 대성중학교 교가가 쓰여 있고 대성중 학생들이 입었던 교복과 당시 학생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들도 걸려 있었다.
윤동주가 공부했던 책상에는 그의 흉상도 놓여 있어 한국 방문객들이 많이 찾았던 곳이다.
이 교실이 문을 열 당시 대성중 전람관 관계자는 "윤동주 시인의 넋을 기리고 그의 애국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한편 후대들에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당시의 교실 모습을 재현했다"고 소개한 바 있다.
룽징의 이들 시설의 잇따른 폐쇄는 공교롭게도 국가보훈부의 중국 내 보훈 사적지 방문 프로그램에 따라 한국의 청년 방문단 100여명이 이곳을 다녀간 직후인 지난달 10일 이뤄졌다.
이에 따라 한국 관광객들의 방문으로 윤동주의 국적 표기를 둘러싼 논쟁이 다시 불거지고, 룽징 일대가 조선인의 항일운동 근거지로 부각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실제 윤동주 생가 등이 폐쇄되면서 이곳을 찾는 한국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긴 실정이다.
현지의 한 택시 기사는 "과거에는 옌지에 오는 한국 관광객들의 필수 방문 코스 가운데 하나가 룽징이었지만, 지금은 주로 백두산(중국명 창바이산)을 간다"며 "최근에는 룽징에 가는 한국 관광객을 태운 적이 없다"고 말했다.
"시설 낡고 침수 잦아 보수 필요…과도한 반응 삼가야" 반응도
앞서 이달 초 중국 외교부는 뤼순감옥 박물관의 항일운동가 전시실·윤동주 생가 폐쇄와 관련한 연합뉴스의 서면 질의에 "내부 공사로 대외 개방을 잠시 중단한 것"이라고 밝혔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등 관영 매체들도 "윤동주 생가는 건물 일부가 붕괴 위기에 있어 수리가 필요하고, 뤼순감옥 전시실도 누수 문제로 다른 전시실과 함께 문을 닫은 것"이라며 한국 일부에서 생트집을 잡는다는 뉘앙스의 주장을 펼쳤다.
실제 뤼순감옥 박물관의 한 전시실은 지난 20일 찾았을 때 인부들이 내부 공사를 하고 있었다.
다롄 영사출장소 관계자는 "뤼순감옥 박물관 측으로부터 2021년부터 보수 공사를 준비했으나 코로나19 확산으로 미루다 올해 시작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1902년 세워졌으니 시설이 워낙 낡고, 보수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윤동주 생가 역시 벽체 일부가 떨어져 있었고, 벽에 금이 가 있었으며 기와지붕에는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옌지의 한 교민은 "명동촌은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되는 곳"이라며 "이달 초 쏟아진 폭우 때 명동촌 입구 일부 건물이 물에 잠기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는 "중국의 의도가 분명치 않아 보이는 상황에서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이 가뜩이나 안 좋은 한중 관계에 불필요한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우리 민족의 항일운동 산실이 있는 그대로 유지·보수되도록 외교적인 노력을 하는 것은 맞지만, 그 의도가 아직 분명치 않은 상황에서 신중한 대응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다만 중국이 한중 간 갈등이 있을 때마다 보복성 조치를 했다는 점에서 의심의 눈초리는 계속되고 있다.
불필요한 논쟁 불식을 위해서는 중국 당국의 구체적이고 명확한 해명과 재개관 시기 등에 대한 로드맵 제시가 필요해 보인다.
pj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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