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비정규직, 정권교체…모든 현재의 시작은 1990년대였다
[최용락 기자(ama@pressian.com)]
선출된 대통령에서 선출된 대통령으로의 정권교체가 일어났다. 고성장에 대한 기대가 깨지고 불안정 노동이 확산됐다. 컴퓨터를 이용해 사람들이 비대면으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맑스주의의 위상이 흔들리고 생태주의와 여성주의가 본격적으로 당도했다. 대중음악의 중심에는 아이돌 그룹이 있다. 신세대, X세대 같은 세대 담론이 유행했다.
사회학자인 윤여일 교수(제주대학교 '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 연구센터')는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에서 우리에게 공기처럼 느껴지는 이 일들이 1990년대에 시작됐음을 상기시킨다. 그가 1990년대를 지금 시대의 "근기원"으로 지금 시대를 1990년대의 "장기 국면"으로 주장하는 이유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 시대를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으로 책을 시작한 그가 1990년대를 골라 탐색한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가 1990년대를 들여다보는 창으로 고른 것은 잡지, 그 중에서도 발행주기가 긴 계간지다. "긴 호흡과 넓은 안목의 사고들을 만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저자는 잡지에 비친 1990년대를 문학, 사상, 문화, 세대, 디지털, 지식인, 진보, 국가, 통제, 여/성, 생태, 위기, 대중이라는 분야로 나눠 그리며 우리 시대에 남긴 정신적 유산을 추적한다.
예컨대 "위기"를 다룬 장에서 저자는 "지금 시대의 저층"에서 이어지고 있는 변화의 시작을 1997년 IMF 사태로 지목한다. 그 변화를 요약하기 위해 가장 자주 사용된 개념은 기업에 유리하고 노동에 불리한 의미를 담은 '유연화'다. 이는 일용직‧임시직‧파견‧용역‧촉탁‧파트타이머 등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 고용의 확산을 주로 지칭한다.
고용관계를 넘어 사회 전반에 기업의 힘이 강해지며 기업적 가치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도 커졌다. 결혼, 교육, 주거등 "인생에서 하는 중요한 선택들을 마치 기업의 재무제표처럼 이익과 손해로 계산"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뜻이다. 주식 투자로 얻었든 부동산 투기로 얻었든 "부자의 부가 공공연한 자랑거리"가 되는 현상도 1990년대 후반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IMF 사태 이후 사용횟수가 늘어난 또 다른 단어는 '구조조정'이다. 저자는 IMF 때 등장한 구조조정 자체가 하나의 구조였다고 이야기한다. 경쟁의 패배자를 끊임없이 조정(배제)하는 일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불안감을 체득한 사람들은 강력한 구조를 타격하기보다는 각자의 불행 속으로 침잠했고, 때로 불안감을 자신보다 약한 이들에 대한 공격으로 전이했다.
저자는 '세대'와 '여/성'을 주제로 한 장에서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곤 하는 세대론과 페미니즘의 영향력도 1990년대에 커졌다고 기술한다.
자유와 삶의 질 중시, 개인의 욕망 실현, 대중문화와 일상생활을 통한 저항, 소비 자본주의로의 편입 등 복합적 해석이 가해진 '신세대론'의 등장 이후 "세대는 계급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사회 변수"로 자리 잡았고 다양한 세대론이 활발하게 뒤를 이었다. 다만 이후 한국 경제가 불황기에 접어들며 88만 원 세대, N포 세대 등으로 세대론의 성격은 달라졌다.
계급 모순에 기초한 거대담론의 해체, 1987년 한국여성단체연합 결성 등으로 인해 페미니즘이 성장할 공간도 커졌다. 성평등, 동성애 운동 등이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고, '성적 자기결정권', '성희롱'과 같은 말도 생겼다. 다만 군가산점제 폐지를 이끌어낸 여성들에 대한 혐오표현이 최초로 등장한 것도 이 때였다.
이밖에도 책에는 환경운동연합의 결성과 <녹색평론>의 창간 등 생태주의의 성장, 전투적 글쓰기를 무기로 한 논객의 등장, 정보화 정책과 인터넷의 성장, 예술작품 사전 검열제 폐지 등 1990년대의 다양한 모습과 우리에게 남긴 흔적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책에서 1990년대가 주조해낸 문제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기는 어렵다. 저자 역시 잡지를 통해 1990년대를 들여다보며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고민하던 문제의 답이라기보다 제대로 형상화하지 못하고 있던 물음 자체"였다고 썼다. 책에 담긴 문제들이 20년 넘게 이어져온 것들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바꿔 말하면 한국사회가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어떤 문제들의 시작점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최용락 기자(ama@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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