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년 역사의 디캔팅, 안하면 와인알못?”…마시기 전에 싸움날라 [전형민의 와인프릭]
“소믈리에, 디캔터를.”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와인 애호가들에게 디캔팅은 고가 와인의 맛과 향을 살리기 위한 필수 과정처럼 와전돼 있습니다. 어떤 분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시켰는데, 디캔팅을 해주지 않는 것을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하죠.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디캔팅은 와인의 맛을 살리기 위해 시작된 행위가 아닙니다. 만화 속 시즈쿠처럼 무슨 명주실을 풀어내듯 길게 와인의 물줄기를 늘어뜨리는 퍼포먼스 쇼잉은 더더욱 아니고요.
이번 와인프릭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유구한 디캔팅의 역사부터 디캔팅을 하는 이유와 주의점, 다양한 종류의 디캔터(Decanter)까지 와인 디캔팅에 대한 이모저모를 얘기해보겠습니다.
현대식 유리공예 기술도 없던 2500년전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미 그 시절부터 와인을 디캔팅해 마셨던 것일까요? 정답은 ‘아니오’ 입니다. 그렇다면 왜 2500년 전 유물에 디캔터라는 이름이 붙은 것일까요.
먼저 디캔트(Decant)의 정의를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캠브릿지 영어사전은 ‘to pour a liquid from one container into another(액체를 한 용기에서 다른 용기로 붓다)‘라고 설명합니다. 엄격하게 사전적 정의를 따지면, 디캔트는 와인을 그냥 다른 용기에 담는 과정일 뿐입니다. 즉, 앞에서 언급한 고대 유물 디캔터는 그냥 포도주 용기라는 뜻이죠.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보통 암포라(Amphora)라고 불리는 큰 토기를 비교적 온도가 시원한 땅에 뭍고, 거기에 와인을 담아 보관했습니다. 하지만 와인을 마실때마다 암포라를 파낼 수 없으니, 암포라 속 와인을 디캔터에 옮겨 담아 식탁에 올렸던 것 입니다.
사실 이때의 와인은 디캔팅이고 뭐고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신선도를 유지할만한 방법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장기간 숙성된 와인을 찾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와인을 보존할 다양한 방법이 발견되고, 1600년대 이후 유리공업이 발달, 유리병이 와인을 담아 유통하는 용기로 주로 쓰이면서 디캔트라는 용어가 재정립 됩니다.
오래 숙성·보관된 와인은 병 안에서 침전물이 생깁니다. 특히 와인이 지금과 같이 규격화된 와인병에 담겨 유통되기 전, 오크통 등에 담겨 대량으로 유통되었을 때는 침전물이 더 심했죠. 대표적인 침전물은 와인의 숙성 과정에서 생기는 화학 반응으로 인해 주석산입니다. 종종 코르크 안쪽 면에 결정체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와인 양조 과정에서 다양하고 복합적인 맛과 향을 위해 첨가한 포도의 줄기, 씨, 껍질 등의 찌꺼기를 걸러내지 않고 와인과 같이 병에 담아 침전물이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녀석들은 필터로 정교하게 걸러내더라도 오랜 기간 병속에서 안정화되면서 응집하게 됩니다.
물론 침전물이 몸에 해롭거나 먹으면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음용 중에 목에 걸리거나, 입안에서 안 좋은 느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에 대개 와인을 마시기 전에 침전물을 걸러내는 작업을 거치는데요.
바로 이 과정에서 디캔터가 과거보다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병속에 담긴 와인을 디캔터에 조심스럽게 옮기면서 1차적으로 와인과 분리되고, 디캔터에서 와인잔으로 서비스될 때 한 번 더 걸러지게 됩니다.
원래 병에서 디캔터로 옮기는 과정에서 와인은 필연적으로 산소와 다량의 접촉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시즈쿠처럼 와인을 명주실 늘이듯 길게 뽑아낸다면 더더욱 공기와의 접촉면이 늘어나겠죠.
물론 만화는 과장돼있습니다. 그렇게 낙차를 크게 준다면, 자칫 오히려 와인의 섬세한 향과 맛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소믈리에들은 디캔팅시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와인을 용기 벽을 타고 흘려내립니다.
젊은 와인, 어린 와인의 경우에는 ‘와인을 여는 목적’으로 디캔팅 하기도 합니다. 숙성이 덜 이뤄져서 아직 시음 적기에 도달하지 않은 파워풀한 와인을 디캔팅을 통해 인위적으로 충분히 산화시키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와인과 공기의 접촉을 강제하면, 오랫동안 병속에 갇혀있던 올드 빈티지 와인의 경우 안좋은 향을 날리고 잠자고 있던 좋은 향들이 산화를 통해 깨어나게 됩니다. 마시기 이른 어린 와인이라면 아직은 거칠고 떫은 타닌을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만들고 과실향을 끌어내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주로 숙성 초기 상태의 까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네비올로, 쁘띠 시라와 같이 타닌이 많은 품종을 이렇게 엽니다.
그러나 목적이 브리딩을 통한 에어레이션이라면 얘기가 좀 다릅니다. 겉절이와 묵은지처럼 같은 배추김치더라도 사람마다 좋아하는 취향이 다르듯 의견이 분분합니다.
섬세한 디캔팅을 통해 해당 와인이 현재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맛과 향을 즐기는 게 낫다는 쪽과, 디캔팅 하지 않고 첫 잔부터 마지막 잔까지 서서히 변해가는 와인의 모습 자체를 즐기는 게 낫다는 쪽으로 나뉘는데요. 철저하게 취향의 문제라 논쟁이 의미가 없죠.
다만, 전문가들은 올빈(Old Vintage) 와인을 디캔팅 할 때 만큼은 극단적으로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읍니다. 오래된 와인은 오픈해 공기와 접촉이 되는 것만으로도 향이 상당히 소실될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반면 어린 와인을 빨리 열리게 하기 위해서라면 종종 더블 디캔팅을 하기도 합니다. 디캔팅 작업 후 5~20분의 안정화 시간을 주고, 세척한 와인병에 와인을 도로 옮겨담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디캔팅보다 더 많은 산소가 강제로 접촉되는 효과가 발생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침전물 문제가 아니라면, 디캔팅을 하지 않는 편 입니다. 와인을 오픈하고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즐기는 것은 생각보다 큰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첫 잔부터 마지막 잔 까지 변해가는 과정을 함께하면서, 온전히 한 병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만족감을 누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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