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당 배제한 태국 총리 선출…악마와의 연합인가, 다음 단계를 위한 과정인가 [박종현의 아세안 코너]
“탁신계 정당의 악마와 악수·총리 선출”
제1당의 반발…젊은층, 정치권 구태 비판
“전진당, 최후 승리를 위한 난제 극복해야”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가 무대연출을 하면서 복귀했다. 탁신과 그의 막내딸 패통탄 친나왓의 영향력이 큰 제2당 프아파이당의 ‘악마와의 연합’은 탁신의 개인적 야망과 신변보장을 위한 장치로 활용됐다. 프아타이당은 기득권 정당들이 받았던 불신의 늪에 빠지고 있다.”
5월 총선 이후 3개월 동안 지속됐던 혼란 양상을 끝내고 새 총리를 선출한 태국 정치 현실에 대한 서방 외교소식통의 관전평이다.
유권자들은 수도 방콕 압승 등을 통해 전진당을 제1당으로 밀어줬지만, 젊고 개혁적인 피타 림짜른랏 대표의 총리직 도전은 의회에서 2차례 좌절됐다. 프아타이당과 군부세력은 적대적 관계를 뒤로하고, 나이든 정치신인 세타 타위신(61)을 총리로 선출했다. 그는 총선 직전까지 부동산 개발업체에서 일했다.
5월 14일 총선 이후 지지부진했던 총리 선출이 마무리된 22일 프아타이당과 끈끈한 관계를 지닌 전임 총리는 모종의 약속이 있었던 듯 오랜 해외 도피생활을 끝내고 전용기로 귀국했다. 전용기에서 포착됐던 수십억원에 달하는 최고급 ‘파텍필립’ 손목시계는 공항에서는 중저가 브랜드 스와치 시계로 바뀌어 있었다. 귀국 직후 교도소에 수감됐던 전 총리는 건강 이상을 이유로 국립 경찰병원으로 이송됐다.
태국 정치권 소식을 전하는 외신은 익숙한 듯 낯선 풍경에 황당해 했다. 그간의 흐름을 간략히 살펴보면 이렇다.
총선에서 개혁성향 정당을 지지하며 변화를 열망했던 유권자들은 낙담과 분노감을 드러냈다. 세타 총리 선출은 유권자 다수가 원했던 결과가 아니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일종의 배신 행위였다. 시민혁명과 민주화 행보가 강화되면 곧잘 발생하는 군부 쿠데타로 국민적 열망이 좌절됐던 기억이 온전한 가운데 이번엔 친군부 세력과 정치 기득권이 일종의 ‘의회 쿠데타’로 총선 민의를 져버린 것이다.
정치권이 희극과 비극의 교차로에서 기대주 전진당을 ‘왕따’ 시키고, 황당한 결론을 내렸다는 비판도 나왔다. 총선 표심을 엎어버리고 정치권이 기득권을 위해 국민들의 미래를 애써 외면했다는 것이다. 유권자들은 정치권의 이합집산과 권력 떡고물 나눠먹기에 철저한 외부관전자에 머물러야 했다. 그 사이 방콕의 밤하늘은 분노와 공허함의 쓰라린 물기를 가득 담은 공기로 채워진 듯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나의 총리가 아니다( #NotMyPM)라는 해시태그가 분출되고 있다. 제1당 전진당을 배제한 채, 11개 정당의 연정 구성·총리 선출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의지가 표출됐다. 연정 참여세력은 협약에 따라 장관직 8개, 차관직 9개를 나눠가질 것으로 전망된다.
태국 언론도 냉소적인 반응을 쏟아냈다. 2006년 쿠데타로 축출돼 2008년부터 도피 생활을 이어오던 탁신 전 총리가 막내딸 패통탄과 소속 정당을 같이하는 세타 총리 선출 당일에 귀국하고, 이튿날 치료를 이유로 병원으로 이송되는 상황에 황당하다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 징역 8년형을 선고받은 정치인이 귀국 이튿날 고혈압, 불면증을 호소하고 병원으로 이송되면서 왕실의 사면이 임박했다는 냉소가 더해졌다. 앞서 그는 신임 총리 선출이 지연되자 스스로 약속한 귀국 일정을 몇 차례 번복하기도 했었다.
세타 총리의 기회주의 행태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세타 총리는 프아타이당과 친군부세력의 연정 가능성이 제기됐을 때 이를 부인했다. 결과적으로 약속을 어긴 셈이 됐다. 총리로 선출된 뒤에는 프아타이당이 약속한 ‘더 나은, 보다 평등한 태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연정이 필수적이라며 기존 입장을 번복했다.
세타 총리는 대형 부동산개발업체 산시리 회장 출신으로, 5월 총선을 앞두고 프아타이당에 입당했다. 사실상 정치 신인이다. 보수세력이 전진당 피타 대표의 총리 피선을 반대하는 정국 흐름 속에서 그는 상·하원 합동 투표에서 482표의 찬성표를 획득했다. 제1당 전진당이 주도한 반대와 기권은 각각 165표, 81표였다.
결과적으로 전진당의 총리 배출 실패와 탁신계 정당·친군부 세력의 연합은 변화를 갈망했던 유권자를 패배자로 만들었다. 총선 표심이 기득권 세력의 연합으로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단기적인 상황이고, 장기적으로는 프아타이당 등 집권세력이 패배자의 자리에 내몰릴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프아타이당은 1998년 창당돼 2000년대 초반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정책을 바탕으로 집권당으로 활동했던 타이락타이당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프아타이당은 2006년과 2014년 두 차례 쿠데타를 통해 탁신과 그 추종세력을 몰아낸 친군부와 손을 잡았다는 비판으로 향후 운신 폭이 좁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 태국 전문가는 26일 “제2당이 제1당을 배제하고, 11개 정당의 연정이 이뤄졌는데 그 연정엔 극도의 라이벌이었던 탁신 세력과 군부세력이 있다”며 “불쾌한 순간의 선택은 가까운 장래에 연정을 치유불가능한 처지로 몰리게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치분석가인 티티난 퐁수디락은 “태국의 정치는 포퓰리즘을 용납하는 과거에서 벗어나 구조적·제도적 개혁을 갈망하는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며 “프아타이당은 앞으로 포퓰리즘과 탁신 딜레마에 갇힐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이런 예상과 궤를 같이하는 게 전진당이 궁극적 승리자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전진당은 지난 총선에서 하원 500석 가운데 151석을 차지하고, 득표율 36%를 기록했다. 수도 방콕에서는 할당 33개 의석 가운데 1석을 제외한 32석을 차지하며 사실상 싹쓸이하는 기염을 토했다. 전진당이 원했다면 프아타이당이 주도하는 연정에도 참여할 수 있었지만, 군부세력으로 대변되는 ‘과거와의 연정 거부’ 혹은 ‘구체제 복귀 반대’를 명분으로 챙겼다.
◆ “비판만 해서는 곤란, 어쩔 수 없는 과정에서 역할”
피타 대표가 후일 총리직에 오른다면 이런 설명도 타당하게 이해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프아타이당의 역할을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과 한국의 경험에서 찾아볼 수도 있겠다. 한국 정치사에서 찾자면 노태우정부를 긍정적 관점에서 해석할 경우 군부통치와 민간통치를 이어줬던 디딤돌로 평가해 볼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면 김영삼정부가 3당합당으로 영남 야당세력을 궤멸 수준으로 붕괴시켰지만 사상 처음으로 한국 정치사에서 정권교체를 가져온 계기를 마련했다고도 할 수 있다.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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