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남궁민 “심양 가면 잦아들까?.. 이 죽일 놈의 연정!” [김재동의 나무와 숲]
[OSEN=김재동 객원기자] “아직 날 연모하지 않는다는 것 알아요. 낭자의 마음이 여전히 연준 도령 것이란 것도 잘 압니다. 허나 날 연모하진 않아도 날 잊지는 마시오. 오늘 나와 함께 한 이 순간을 절대로 잊으면 아니되오.”
슬픈 눈이다. 입매는 미소 비슷한 걸 그리고 있지만 그 눈을 들여다보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파랗게 팬 보리밭, 그 창 끝 같이 벼려진 잎 하나하나의 예리한 서정이 여린 속살을 헤집는 기분이다.
25일 방영된 MBC 금토드라마 ‘연인’의 장현(남궁민 분)이 짧은 입맞춤 끝에 길채(안은진 분)에게 당부했다.
심양.. 먼 곳이다. 돌아올 날?.. 기약없다. 그 멀고도 긴 이별을 앞두고 장현이 남긴 당부는 하릴없어 애잔하다.
내시부 상호 표언겸(양현민 분)이 찾아들었을 때, 그리고 그 입에서 심양에 같이 가자는 청이 흘러나왔을 때 장현은 터무니없어 웃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연준(이학주 분)에게 애면글면하는 길채를 마냥 지켜보는 것도 고역이다.
길채에게 강화도 피난을 권했던 것은 잘못이었다. 육지것들 청군 주제에 바닷길을 넘을 줄은 몰랐다. 마마에 걸린 몸을 이끌고 강화도로 건너갔다. 길채를 지켜야 했다. 죽어도 좋다는 심정였다. 길채 외에 목숨을 걸만큼 좋은 이유를 따로 찾을 수 없었다.
17대 1로 싸웠다. 마지막 한 놈을 어쩌지 못하고 비탈을 굴렀다. 막타는 엄한 군관 구원무(지승현 분)에게 넘어갔다. 그 순간 길채가 당도했다. 장현을 본 것 같은 기분에 돌아온 길이었다. 장현은 보이지 않고 죽어자빠진 청군의 시체와 마지막 놈을 베어 넘긴 구원무. 길채는 두리번거리며 멀어져갔고 그 모습을 보며 장현은 정신을 잃었다.
한양에서 만난 길채의 첫 마디는 “살아계셨습니다.”였다. 반가움과 안도가 담긴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주 신수가 훤하십니다.”는 비아냥이 이어졌다. 이 철딱서니는 강화도로 가랬다고 원망하고, 죽을뻔 했다고 푸념하고, 안찾아왔다고 타박한다.
강화도로 가란 것은 잘못했고, 그래서 찾아갔었고, 죽을 뻔한 걸 17대 1로 싸워서 구해줬노라 설명하기는 참 구차하다. 구잠(박강섭 분)이 왜 얘기 안하느냐고 물어올 때 장현은 한 마디만 한다. “쪽팔려서.”
사기꾼 연준이 길채와 은애(이다인 분)를 동행해 찾아왔다. 연준 보는 길채 눈에 꿀이 뚝뚝 떨어지는 꼴이 밉상이다. 치사하지만 제 한 몸도 건사 못한 연준의 실체를 까발리겠다고 재회할 당시를 우스개 삼았다.
“옷은 다 찢어지고 다쳐서 절룩이면서 임금님을 구하겠다니..그리고 음식 구경 한번 못해본 사람처럼 주먹밥을 우걱우걱.. 입 주변에 밥풀은 묻혀가며..” 역효과만 났다. 길채가 정리했다. 그런 간난고초를 무릅쓰고 충성을 다한 진정한 선비라나 뭐래나.
이 미운 놈 하는 꼴도 가관이다. 은애랑 혼인할 거라면서 길채의 미련은 붙잡아두려는 행태라니. 죽은 순약(박종욱 분)까지 들먹인다. “순약이 죽기 전 제게 이상한 것을 물었습니다. (자네, 길채낭자 좋아하지?) 헌데 난 아니라고 답하지 못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당연히 안달 난 길채가 “무엇을 답하지 않으셨단 말인가요?” 물어올 때 “아닙니다. 취해서 헛소리가 나왔습니다.” 치고 빠지는 솜씨 보소. 결국 길채 입에서 “사람 우습게 알지 말아요. 나도 진심일 수 있어요. 한 번이라도 날 여인으로 좋아했었던 적 있었나요?”라는 연심을 확인해 두곤 또 빠져나간다. “앞으로 낭자와 나 사이에 이런 대화를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비련의 여주인공에 빙의해 훌쩍이는 길채의 꼬라지는 정말 보기 싫고 길채를 그 꼴로 만든 연준도 두고 볼 수 없다.
마침내 연준을 막아선 장현. “자네는 도대체 뭐 하는 사내인가? 난 자네 같은 자들을 아주 잘 알아. 마음대로 하기에는 잡생각이 너무 많고, 머리 굴리는 대로 살긴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하지. 해서 결정은 불쌍한 여인들에게 맡겨버리고 치맛폭 뒤에 숨어 애타는 여인들의 눈빛만을 즐길 뿐야. 딴에는 나랏일을 합네 큰 일을 합네 하고 돌아다니지만 기실 여인네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제 주변 하나 깔끔하게 간수할 줄 모르거든... 은애낭자의 서방감이 아니면 그 허연 모가지를 두 손에 잡고 분질러버리고 싶어!”
이 허접한 놈과, 그런 허접한 놈의 뻔한 수작에 허우적대는 길채의 모습. 그리고 그런 철딱서니 길채로부터 도무지 떠날 기척 없는 본인의 연정까지가 정말 지겹다는 현타. 곁에 두고 지옥을 겪을 바에야 떨어져 있자 싶어 결정한 심양행이다.
왜 마음을 바꿨는 지를 묻는 표언겸의 질문에 “죽을 지도 모르는 길이라 갑니다. 죽을까 무서우면 딴 생각은 안하겠지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장현이다.
장현은 길채에게 말했다. “난 아주 오래기다릴 수 있어요. 항상 하는 말이지만 낭자는 좀 철이 들어야 하니까.” 또 말했다. “죽기 전까지는 (길채가 준) 이 댕기를 절대 놓지 않을 작정이야.” 길채의 손을 제 가슴에 가져다 대고서는 말했다. “느껴지시오? 나도 도무지 모르겠어서. 왜 낭자만 보면 이놈의 심장이 이리 뛰노는지.”
역사상 소현세자의 귀환까지는 8년 걸렸지만 장현의 현실에선 기약이 없는 상황이다. 한 가지. 장현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걸려도 자신은 길채를 잊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안다. 다만 다시 돌아왔을 때 길채가 스스로의 혼돈을 정리해 두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장현도 안타깝지만 제 마음도 모르는 길채 역시 안타까울 따름이다. ‘품 안에 든 정이 서푼이라면 보내고 그리워해야 할 정은 만냥’이라는데 길채가 철들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그리움이 켜켜이 쌓여야 할까?
두 주인공의 애절한 사정과는 상관없이 ‘섬’에 이어 무용담의 전범 ‘17대 1’이나 영화 ‘친구’의 ‘쪽팔려서’를 차용한 대사는 뜬금없기 보다는 재치있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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