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그룹과 동거 재개했지만 위상 회복까지는 ‘가시밭길’
‘정경유착’ 비판 피하려면 회원사가 감독자 역할 해야
(시사저널=엄민우 시사저널e. 기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를 탈퇴했던 4대 그룹이 6년여 만에 재가입하면서 재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전경련은 8월22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로의 명칭 변경 등의 안건을 의결했다. 55년 만의 명칭 변경은 산업통상자원부가 정관 개정을 승인한 이후부터 이뤄진다.
명칭 변경이나 류진 풍산그룹 회장의 신임 회장 취임보다 관심을 모은 것은 산하 연구기관이었던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 흡수 통합의 안건을 의결한 것이었다. 한경연이 전경련으로 흡수 통합되며 4대 그룹이 전경련으로 합류하게 됐기 때문이다. 4대 그룹은 전경련을 탈퇴했지만 한경연의 회원으로 남아있었는데, 이 조직을 통합 흡수하면서 자연스럽게 전경련으로 돌아온 모양새가 됐다. 물론 4대 그룹은 전경련 합류가 스스로의 결정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 4대 그룹 관계자는 "한경연 회원이면 전경련 회원이 자동으로 되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다. 엄연히 그룹 차원에서 논의하고 결정한 것"이라고 전했다.
4대 그룹 "전경련 재가입은 자의적 결정"
4대 그룹이 '자의'로 전경련에 가입하면서 영향력도 커졌다. 4대 그룹 합류 여부는 그동안 전경련의 위상 회복에 결정적 변수로 여겨졌다. 매출 합산 대한민국 국내총생산(GDP)의 약 절반을 차지하는 4대 그룹이 빠진 전경련이 대기업들을 대표하는 단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4대 그룹이 빠졌을 당시 전경련은 해체론까지 나온 바 있다. 이들이 다시 합류한 만큼 '재계 맏형'이라는 과거 위상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시장에선 4대 그룹에도 긍정적 변화를 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한 증권사 임원은 "그동안 재계는 구심점이 없다는 느낌이 컸는데, 이번 재가입을 계기로 다른 국면을 맞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경련과 4대 그룹의 재결합에 대해 마냥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4대 그룹 안팎에선 기대만큼 우려도 여전히 공존한다. 애초에 결별 이유 자체가 '정경유착으로 인한 법적 리스크'에 대한 부담이었는데, 다시 재가입함으로써 이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무엇보다 전경련의 합법적인 대외활동조차 로비 및 정경유착 행위로 보고 이를 바탕으로 또 한 번 공세의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한 4대 그룹 관계자는 "사실 재가입 전에도 조직 내부에선 일부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면서 "정경유착이라는 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데 (4대 그룹의 전경련 재가입을) 공격하려는 쪽에서는 합법적 활동도 정경유착으로 엮으려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전했다.
그만큼 과거 국정농단 사태 때의 트라우마가 컸다는 얘기다. 실제로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졌던 6년여 전 주요 기업은 줄줄이 전경련을 탈퇴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태원 SK 회장이 최순실 관련 국정농단 청문회에서 전경련 탈퇴 의사를 밝혔을 정도다. 전경련이 국회로부터 정경유착의 고리라는 지적을 받았던 만큼, 검찰 수사망에 있던 4대 그룹으로선 전경련 탈퇴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결국 전경련이 4대 그룹 합류를 실감하고 과거와 같은 수준의 위상을 찾기 위해선 법적으로는 물론, 여론으로부터도 공격받지 않을 만큼 촘촘한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게 재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전경련도 이를 의식해 향후 불거질 수 있는 논란 및 리스크에 대비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전경련은 정경유착을 방지할 방안으로 윤리위원회를 설치한다. 위원장을 포함해 5명으로 구성될 예정인데, 9월 중순이면 인선 발표가 가능할 것이란 게 전경련 관계자의 전언이다. 이와 더불어 '윤리헌장'도 채택했다. 현재로서는 다소 거시적인 선언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향후 정경유착 논란 방지를 위한 구체화된 방안들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전경련 관계자는 "4대 그룹의 우려 사항들을 잘 알고 있다"며 "그동안엔 혁신안의 방향만 제시됐지만 이제 신임 회장도 선임한 만큼 구체화·시스템화된 혁신 방안들이 나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4대 그룹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룹과 달리 삼성증권 탈퇴 배경 주목
재계에서는 야당 및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만큼, 전경련과 4대 그룹은 당분간 '조용한 동거'를 이어갈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다. 4대 그룹은 과거와 달리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과 관련해 더욱 냉정한 평가를 받고 있어 여론에 더 신경 쓸 수밖에 없다.
다만 국정농단 사태라는 과거 때문에 전경련의 활동 자체가 쪼그라들면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즉, 기업이 정부의 요구를 들어주고 반대급부를 받는 식의 '정경유착' 행위는 철저히 배제하되, 경영활동에 관한 기업들의 입장 전달은 더욱 적극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치권 로비 문제는 배제하더라도 규제나 대외무역 등 기업들의 경영을 어렵게 하는 문제를 이슈화하고, 이를 정부나 정치권에 전달하는 전경련 고유의 역할은 계속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한 대기업 인사도 "전경련은 현실적으로 개별 기업들이 하나하나 이야기하기 어려운 기업 경영상 어려운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알려주는 역할을 해야 하고, 그에 대한 기대로 전경련에 가입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경련이 다시 한번 정경유착 논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선 시민단체 등 외부가 아닌, 직접 가입해 회비를 내는 각 회원사들의 적극적 감시와 감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업 거버넌스 전문가 조명현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1년마다 회비를 내고 있는 만큼 회원사들이 이사회를 통해 전경련이 제대로 돈을 쓰고 활동하고 있는지 감독하고, 만약 여기서 벗어난다면 삼성증권처럼 이사회에서 탈퇴 결정을 내리는 방식을 취할 수 있다"면서 "이번에 전경련이 싱크탱크로 나아가겠다고 방향을 설정한 것은 바람직하다고 본다. 싱크탱크 역할을 하며 대한상공회의소 등 다른 단체들과 차별화를 이룰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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