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를 있게 한 가난뱅이 4형제...최대 라이벌이 그 ’에디슨‘이라고? [추동훈의 흥부전]

추동훈 기자(chu.donghun@mk.co.kr) 2023. 8. 26.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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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20][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15] 워너 형제

영화 <바비>의 글로벌 흥행 돌풍이 뜨겁습니다. 국내서는 100만 관객을 채우지 못하며 시들해지고 있지만 북미에서만 5억6000만 달러, 글로벌 12억8000만 달러(8월 20일 기준) 한화 1조7114억원의 수익을 올리며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제작비가 1억4500만 달러니까 제작비의 10배 가까운 수익을 올리고 있는 셈인데요. 올해 개봉 영화중 수익 2위의 성적을 거두고 있습니다. 미국 기준 수익은 역대 15위에 올라 있는데다 아직도 현재진행형인만큼 10위내 진입에 대한 기대감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영화 바비 포스터
특히 올해 스파이더맨, 가디언스오브 갤럭시, 인어공주 등 팬덤을 보유한 인기 캐릭터를 앞세운 블록버스터 대작들이 즐비한 가운데 바비의 선전은 반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그 배경에는 MZ세대의 대활약이 자리합니다. MZ들의 일상도구인 SNS를 통한 마케팅이 주효했다는 분석인데요. 재기발랄하고 통통 튀는 영화의 분위기에 걸맞게 MZ세대 맞춤형 전략이 성공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바벤하이머 합성포스터
또 이들은 미국에서 같은 날 개봉했던 <오펜하이머>와 함께 묶여 밈(Meme)처럼 유행을 시켰는데요. 완전히 상반된 분위기의 두 영화를 한데 묶어 ‘바벤하이머’(Barbi+Oppenheimer)라고 부르며 두 영화를 함께 관람하는 놀이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밝고 가벼운 바비와 어둡고 진중한 오펜하이머의 대조적인 느낌이 흥미로운데다 같은 날 개봉하며 서로 시너지를 낸 셈이죠. 한국에선 오펜하이머가 1달가량 늦게 개봉하는 바람에 이런 바벤하이머 붐이 일어나진 못했는데요. 만약 같은 날 개봉을 했다면 좀 다른 결과를 낳았을까요.

<바비>는 바비인형을 만드는 장난감 회사 마텔이 콘텐츠 제작사업을 위해 만든 마텔 필름스의 첫 제작영화입니다. 첫 영화부터 대박이 났다고 봐야하는데, 이 영화를 함께 만들고 배급한 회사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워너브라더스입니다. 바비는 현재 워너브라더스의 영화중 북미 수익 1위에 올랐습니다. 종전 기록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다크나이트>의 5억3600만 달러였는데, 이를 바비가 깨버린 것입니다. 이로 인해 바비는 100년 역사의 워너브라더스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게 됩니다. 재미있는 건 바비 흥행에 큰 기여를 한 영화 오펜하이머의 감독 역시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든 영화의 기록을 깨는데 본인이 직접 기여한 셈이죠.

워너브로더스 로고
조금 과장해 워너브라더스가 없었다면 바비가 없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오늘은 바비의 성공에 일조한 워너브라더스의 창업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워너브라더스는 말 그대로 워너가의 4형제가 만든 영화 스튜디오입니다. 현재는 여러 인수합병 과정을 거쳐 ’워너브라더스·디스커버리‘라는 다소 긴 회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워너브라더스는 1990년 타임지를 발간하는 타임과 합병해 타임워너란 회사가 됐다가 미국 통신사 AT&T에 인수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AT&T로부터 분사한 뒤 디스커버리와 합병해 새로운 미디어 기업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워너는 현재 인기 케이블 채널 HBO, CNN 등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워너 4형제, 앨버트 워너, 잭 워너, 해리 워너, 샘 워너 (왼쪽부터)
워너브라더스를 창업한 4형제는 나이순으로 해리 워너(188년-1958년), 알버트 워너(1884년-1967년), 샘 워너(1887년-1927년), 잭 워너(1892년-1978년)입니다. 폴란드계 유대인 집안의 혈통을 가진 이들 중 해리, 알버트, 샘은 폴란드에서 태어났습니다. 막내 잭 워너만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워너가는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형제의 아버지 벤자민 워너는 정육점, 구두 수선점 등에서 일하며 근근이 생활을 꾸려오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4형제를 포함해 12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유년기를 지나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한 자녀는 7명 뿐이었습니다.

이들은 어려웠던 폴란드 생활을 청산하고 꿈과 희망이 가득한 북미행을 택합니다. 캐나다를 거쳐 잭 워너가 2살이 되던 해 미국 오하이오주 영스타운으로 이주합니다. 집이 너무나도 가난했던 탓에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며 돈을 벌 궁리가 가득했던 용감한 4형제는 머리를 맞댄 끝에 돈을 벌 수 있단 이야기를 듣고 영화판에 기웃거리기 시작합니다.

셋째인 샘 워너는 동네에서 어울리던 사람들과 함께 사업 파트너십을 맺고 작은 공연과 전시를 할 수 있는 ’올드 그랜드 오페라 하우스‘를 인수했습니다. 하지만 사업 경험이 없던 그의 계획은 예상대로 진행되지 못 해 결국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샘은 동네의 놀이공원인 아이도라 공원에서 영화 영사기사로 일할 기회를 얻었고 영화 산업에 대한 성장 가능성을 엿본 그는 과감하게 1000달러를 주고 활동사진 영사기를 샀습니다.

샘 워너
1903년, 샘의 주도 아래 4형제와 누나인 로즈는 펜실베니아주 뉴캐슬 지역의 비어있는 상점을 구했습니다. 이 곳이 바로 이들 형제가 처음 문을 연 극장이 됩니다. 워너 형제들은 영사기를 가져왔고 지역 장의사한테 빌린 의자를 설치해 영화 홍보에 나섰습니다. 당시 인기를 모은 무성 영화 ’The Great Train Robbery‘를 틀며 지역에서 나름 입소문이 나기 시작합니다. 막내인 잭은 영화 필름을 교체해야 하는 틈에는 직접 노래도 부르며 관객들에 재미를 선사하는 등 온 가족은 그들의 극장의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1906년 뉴캐슬에 있는 극장 하나를 더 인수했고 조금씩 성과가 도출되기 시작했습니다. 극장 경영으로 돈을 번 이들은 1910년 직접 영화를 제작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워너스 극장
여기서 의외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영화업계의 독점자라고 불렸던 인물인데 바로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입니다. 에디슨은 ‘에디슨 트러스트’라는 회사를 차려 영화촬영에 쓰이는 각종 기술에 대한 특허를 주장하며 영화 배급사에 높은 수수료를 부과하고 경쟁사들에 특허소송을 남발했습니다. 워너 형제들 역시 영화관을 운영하며 수익을 얻고 있었는데 에디슨과의 갈등은 수익을 나쁘게 하는 큰 걸림돌이 됐습니다. 당시 이러한 에디슨 트러스트의 영화 기술 분야의 독점 문제가 커지면서 이에 반발하는 배급사들도 속속 힘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바이오그래프라는 회사인데, 워너 브라더스는 1922년 이 회사를 인수하기도 합니다.

다행히 워너 형제를 비롯한 여러 영화관련업계의 노력 덕분에 에디슨이 독점하려한 영화 특허권 문제는 해소되기 시작합니다. 이는 워너 형제들에게는 본격적인 사업 확장의 기회가 됩니다. 1918년 4명의 워너형제는 ‘워너 브라더스 버뱅크 스튜디오’를 설립합니다.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버뱅크에 스튜디오를 만든 이유는 당시가 바로 헐리우드가 태동하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본격화됐고 영화산업을 축으로한 대중문화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독일에서 나의 4년이라는 작품을 만들어 대중의 관심을 받았고 6개 가량의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워너 형제들이 만든 극장
이후 1923년 사명을 ‘워너 브라더스 픽처스’로 이름을 바꾸어 지금의 워너 브라더스의 형태를 갖추고 영화 제작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세웁니다. 워너브라더스가 처음 계약한 스타는 다름아닌 바로 강아지 ‘린 틴 틴(Rin Tin Tin)’이었습니다. 군견 출신인 린 틴 틴은 무성영화 ‘Where the North Begins’에 출연해 첫 흥행작을 만들어냈고 매주 1000달러를 주고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후발주자로 영화제작에 뛰어든 워너브라더스의 재정상황이 넉넉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오히려 경쟁사들의 견제로 인해 사업이 실패할 수도 있단 두려움이 커졌습니다. 4형제중 셋째, 샘 워너가 다시 한번 기지를 발휘합니다. 영화기술 자체에 대한 전문성이 깊고 이해도가 높았던 샘은 무성영화로만 상영됐던 당시 극장가에서 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초창기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
당시 영화는 소리가 없는 무성영화였고 장면 장면 사이에 글자를 띄우는 게 전부였습니다. 오케스트라는 극장 한켠에 자리잡고 영화에서 필요한 순간 직접 연주를 하며 음악을 깔아줬습니다. 샘은 워너브라더스가 업계를 뒤흔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무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유성 영화 개발은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이미 무성영화를 중심으로 잘 짜여신 시스템으로 흥행작이 쏟아졌고 대중들 역시 이 정도면 충분하단 생각을 했기 때문인데요. 1926년 워너브라더스는 음악이 영화 속에서 동기화되어 나오는 돈 주앙을 개발했고 이듬해인 1927년 세계 최초로 영화배우의 대사가 음성으로 흘러나오는 유성 영화 ‘재즈 싱어’를 선보입니다.

영화 재즈싱어
당시 워너브라더스의 재정난은 계속 악화하여가던 중이라 당시 재즈 싱어의 시사회 당시 기자들과 경쟁사들은 아무런 기대조차 하지 않고 관람했다 큰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하지만 유성 영화 개발을 주도한 샘 워너는 안타깝게도 재즈 싱어 시사회 전날 뇌출혈로 사망하며 운명을 달리합니다.

재즈싱어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무성영화의 두배 가격인 당시 50센트의 표값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 영화의 인기는 워너브라더스를 메이저 스튜디오로 신분을 상승시키는 결정적인 일이 됐습니다. 이후 워너브라더스는 뮤지컬 영화와 갱스터 무비 등에 집중 투자하며 성공을 거듭했습니다. 1928년 최초의 유성 장편영화 ‘Lights of New York’을 1928년 상영했고 최초의 장편 컬러 영화 ‘On with the Show‘도 1929년 선보이며 혁신적인 기술들을 스크린으로 옮겨왔습니다.

라이츠 오브 뉴욕 포스터
샘이 죽은 후 워너브라더스는 막내 잭의 주도하에 사업을 확장해갔습니다. 제작 부사장으로 재직한 잭은 제작을 주도하며 감독, 각본가, 배우 등을 직접 고르는 등 영화 선택의 감각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후 워너브라더스는 세계2차대전을 전후해 성장을 거듭했으며 반공주의 영화, 반파시즘 영화를 제작하는 등 정부와 협력하며 그 존재감을 꾸준히 키워갔습니다.

워너 브라더스는 ‘말티즈 팔콘’(1941), ‘카사블랑카’(1942),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 ‘이유 없는 반항’ (1955)등 당시 헐리우드를 대표하는 명작들을 줄줄이 성공시켰습니다.

이처럼 사업은 번창해나갔지만 형제간 분쟁은 오히려 심화했습니다. 막냇동생 잭은 독단적인 결정으로 형들과 계속 갈등를 빚었습니다. 1950년대에는 그 갈등이 극에 달하며 사실상 남남이 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회사 지분을 매각하는데 있어 잭이 형들을 속인 것입니다. 형들의 지분을 외부에 팔겠다는 기존 계획과 달리 해당 지분들이 사실 잭의 손아귀로 들어간 것입니다. 워너브라더스의 회장이던 잭은 그렇게 형제들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됩니다.

워너브라더스 급수대
회사의 성공은 계속 이어졌지만 이들 형제들의 말로는 다소 쓸쓸했습니다. 회사를 장악한 잭은 정력적으로 활동해오던 이전과 달리 이제 영화제작에 지쳤다며 1966년 자신의 회사를 세븐 아츠 제작사에 3200만달러의 금액으로 매각합니다. 70대의 노인이 된 잭은 스튜디오에서 물러난 뒤 개인적으로 영화산업에 투자를 했으나 이제는 변화하는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한 채 1978년 숨을 거둡니다.

이제 더이상 워너브라더스에는 더이상 워너 형제들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유산들은 지금 우리가 보고, 즐기는 컨텐츠의 근간이 됐습니다. 올해는 워너브라더스가 설립된 1923년으로부터 정확히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영화 바비가 워너브라더스의 100년을 기념하듯 역대 최고 흥행 수익을 올린 가운데 과연 다음 100년 동안은 또 어떤 새로운 영화가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을까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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