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를 있게 한 가난뱅이 4형제...최대 라이벌이 그 ’에디슨‘이라고? [추동훈의 흥부전]
영화 <바비>의 글로벌 흥행 돌풍이 뜨겁습니다. 국내서는 100만 관객을 채우지 못하며 시들해지고 있지만 북미에서만 5억6000만 달러, 글로벌 12억8000만 달러(8월 20일 기준) 한화 1조7114억원의 수익을 올리며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제작비가 1억4500만 달러니까 제작비의 10배 가까운 수익을 올리고 있는 셈인데요. 올해 개봉 영화중 수익 2위의 성적을 거두고 있습니다. 미국 기준 수익은 역대 15위에 올라 있는데다 아직도 현재진행형인만큼 10위내 진입에 대한 기대감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비>는 바비인형을 만드는 장난감 회사 마텔이 콘텐츠 제작사업을 위해 만든 마텔 필름스의 첫 제작영화입니다. 첫 영화부터 대박이 났다고 봐야하는데, 이 영화를 함께 만들고 배급한 회사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워너브라더스입니다. 바비는 현재 워너브라더스의 영화중 북미 수익 1위에 올랐습니다. 종전 기록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다크나이트>의 5억3600만 달러였는데, 이를 바비가 깨버린 것입니다. 이로 인해 바비는 100년 역사의 워너브라더스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게 됩니다. 재미있는 건 바비 흥행에 큰 기여를 한 영화 오펜하이머의 감독 역시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든 영화의 기록을 깨는데 본인이 직접 기여한 셈이죠.
이들은 어려웠던 폴란드 생활을 청산하고 꿈과 희망이 가득한 북미행을 택합니다. 캐나다를 거쳐 잭 워너가 2살이 되던 해 미국 오하이오주 영스타운으로 이주합니다. 집이 너무나도 가난했던 탓에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며 돈을 벌 궁리가 가득했던 용감한 4형제는 머리를 맞댄 끝에 돈을 벌 수 있단 이야기를 듣고 영화판에 기웃거리기 시작합니다.
셋째인 샘 워너는 동네에서 어울리던 사람들과 함께 사업 파트너십을 맺고 작은 공연과 전시를 할 수 있는 ’올드 그랜드 오페라 하우스‘를 인수했습니다. 하지만 사업 경험이 없던 그의 계획은 예상대로 진행되지 못 해 결국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샘은 동네의 놀이공원인 아이도라 공원에서 영화 영사기사로 일할 기회를 얻었고 영화 산업에 대한 성장 가능성을 엿본 그는 과감하게 1000달러를 주고 활동사진 영사기를 샀습니다.
다행히 워너 형제를 비롯한 여러 영화관련업계의 노력 덕분에 에디슨이 독점하려한 영화 특허권 문제는 해소되기 시작합니다. 이는 워너 형제들에게는 본격적인 사업 확장의 기회가 됩니다. 1918년 4명의 워너형제는 ‘워너 브라더스 버뱅크 스튜디오’를 설립합니다.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버뱅크에 스튜디오를 만든 이유는 당시가 바로 헐리우드가 태동하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본격화됐고 영화산업을 축으로한 대중문화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독일에서 나의 4년이라는 작품을 만들어 대중의 관심을 받았고 6개 가량의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후발주자로 영화제작에 뛰어든 워너브라더스의 재정상황이 넉넉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오히려 경쟁사들의 견제로 인해 사업이 실패할 수도 있단 두려움이 커졌습니다. 4형제중 셋째, 샘 워너가 다시 한번 기지를 발휘합니다. 영화기술 자체에 대한 전문성이 깊고 이해도가 높았던 샘은 무성영화로만 상영됐던 당시 극장가에서 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당시 유성 영화 개발은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이미 무성영화를 중심으로 잘 짜여신 시스템으로 흥행작이 쏟아졌고 대중들 역시 이 정도면 충분하단 생각을 했기 때문인데요. 1926년 워너브라더스는 음악이 영화 속에서 동기화되어 나오는 돈 주앙을 개발했고 이듬해인 1927년 세계 최초로 영화배우의 대사가 음성으로 흘러나오는 유성 영화 ‘재즈 싱어’를 선보입니다.
재즈싱어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무성영화의 두배 가격인 당시 50센트의 표값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 영화의 인기는 워너브라더스를 메이저 스튜디오로 신분을 상승시키는 결정적인 일이 됐습니다. 이후 워너브라더스는 뮤지컬 영화와 갱스터 무비 등에 집중 투자하며 성공을 거듭했습니다. 1928년 최초의 유성 장편영화 ‘Lights of New York’을 1928년 상영했고 최초의 장편 컬러 영화 ‘On with the Show‘도 1929년 선보이며 혁신적인 기술들을 스크린으로 옮겨왔습니다.
워너 브라더스는 ‘말티즈 팔콘’(1941), ‘카사블랑카’(1942),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 ‘이유 없는 반항’ (1955)등 당시 헐리우드를 대표하는 명작들을 줄줄이 성공시켰습니다.
이처럼 사업은 번창해나갔지만 형제간 분쟁은 오히려 심화했습니다. 막냇동생 잭은 독단적인 결정으로 형들과 계속 갈등를 빚었습니다. 1950년대에는 그 갈등이 극에 달하며 사실상 남남이 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회사 지분을 매각하는데 있어 잭이 형들을 속인 것입니다. 형들의 지분을 외부에 팔겠다는 기존 계획과 달리 해당 지분들이 사실 잭의 손아귀로 들어간 것입니다. 워너브라더스의 회장이던 잭은 그렇게 형제들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됩니다.
이제 더이상 워너브라더스에는 더이상 워너 형제들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유산들은 지금 우리가 보고, 즐기는 컨텐츠의 근간이 됐습니다. 올해는 워너브라더스가 설립된 1923년으로부터 정확히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영화 바비가 워너브라더스의 100년을 기념하듯 역대 최고 흥행 수익을 올린 가운데 과연 다음 100년 동안은 또 어떤 새로운 영화가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을까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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