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그샷과 기독교 단체 깃발 [청계천 옆 사진관]

변영욱기자 2023. 8. 26.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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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보기 전에 지난 주 우리들에게 전해졌던 두 장의 머그샷 사진 이야기부터 하고자 합니다.

경찰이나 검찰이 범인의 얼굴을 찍어 공개한다는 의미 이전에 '배경이 없이 얼굴과 가슴까지 찍는 사진'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용어입니다.

조지아주 풀턴카운티 보안관실이 사진에 도장처럼 합성해 내보낸 겁니다.

트럼프의 머그샷이 본인 또는 기자들이 찍은 사진과 달리 '사법의 영역'으로 보여지는 이유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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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사진 No. 32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사진을 보기 전에 지난 주 우리들에게 전해졌던 두 장의 머그샷 사진 이야기부터 하고자 합니다. ‘mug shot’이라는 용어는 사진기자들에게는 친숙한 표현입니다. 경찰이나 검찰이 범인의 얼굴을 찍어 공개한다는 의미 이전에 ‘배경이 없이 얼굴과 가슴까지 찍는 사진’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용어입니다. 피사체 또는 취재원의 직업이나 배경을 알 수 있는 ‘environmental portrait’과 다른 개념의 사진입니다.

우선 신림동 등산로 살인 피의자의 상반신을 경찰이 공개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신문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머그샷과 차이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진 등산로 살인 피의자의 얼굴이라는 설명이 없었다면 그냥 개인의 ‘셀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사진이었습니다. 흔히 미국의 사법기관이 공개해왔던 머그샷의 배경으로 있던 줄자가 없어서였을까요?

어제 25일 또 하나의 머그샷이 공개됐습니다. 2020년 미국 대선 당시 자신이 패했던 조지아주에서의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는 시도를 한 혐의로 기소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현지시간 24일 애틀랜타 풀턴카운티 구치소에서 찍은 머그샷이죠. 미국 전현직 대통령 최초로 찍은 범인 식별용 사진이라 뉴스 가치가 큰 사진입니다. 그런데 사진 왼쪽 위에 엠블럼이 하나 찍혀 있습니다. 조지아주 풀턴카운티 보안관실이 사진에 도장처럼 합성해 내보낸 겁니다. 트럼프의 머그샷이 본인 또는 기자들이 찍은 사진과 달리 ‘사법의 영역’으로 보여지는 이유일 겁니다.

▶서설이 좀 길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리는 사진은 1923년 8월 22일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동정을 구하러 나가는 첫길 (기사 참조)/ 동아일보 1923년 8월 22일
정면을 바라보는 어른들과 어린이 그리고 뒷줄의 여성들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단체 사진이라고 하기에는 긴장감이 들고 뭔가를 호소하는 느낌입니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깃발을 들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십자가 위에 ‘수해 구제’라는 한자가 써 있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는걸까요? 옆의 기사를 읽어보겠습니다.
[동정을 구하여 - 시내의 가가호호를 방문하는 수해구제단은 작일부터 활동]

(서선지방의) 가련한 수해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시내 인사동 ‘중앙 엡윗 청년회’에서는 목사 김창준씨 등 여러 유지가 ‘구루마’를 친히 끌고 시내의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눈물을 잇는 이의 동정을 구한다함은 본보에 이미 보도한바 이어니와 이에 대하여 그 구제단에서는 재작십구일부터 시내 각호를 방문하기로 하였으나 당국으로부터 기부금 허가가 나오지 아니하기 때문에 방문하지 못하고 작 이십일일 정오에야 그 허가가 나왔음으로 그날 오후 2시부터 비로소 구루마를 끌고 나섰는데 한 대에 다섯 사람씩 나누어 류양호 심명섭 양씨가 그 대장이 되어가지고 먼저 종로통으로부터 동대문을 들러 황금정을 지나 남대문통으로 향할 터이며 금일에는 서대문통 의주통 남대문통 등지로 다닐터이라는데 이미 재작일에 모모 유지로부터 의복과 양식과 현금 등 다수한 기부금이 들어왔다하며 그 구제단에서는 기급적시내의 가가호호를 방문할 터이나 미처 찾아가지 못하는 곳에서는 ‘동아부인상회’나 중앙엡윗 청년회‘도 통지를 하여주면 청년회원이 구루마를 끌고 방문할 터이라더라.

▶100년 전 수마가 한반도 곳곳을 할퀴고 가자, 서울의 기독교 청년 단체가 구호활동에 나섰던 모양입니다. ‘엡윗 청년회’의 목사를 비롯해 교인들이 리어카를 끌며 서울 시내 상점과 가정집을 돌며 구호물품을 모집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입니다. 기부금을 걷겠다는 신고를 받은 일제 당국이 허가를 미루다 뒤늦게 허가를 해줬고 비로소 이날 오후부터 5인 1조로 종로-동대문-을지로-남대문-서대문 등을 돌기 시작했습니다. 옷과 식량, 현금 등을 모아 수재민들에게 전달하는 활동이었습니다.

▶엡윗(엡웟)청년회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한국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개신교 청년단체. 1897년 제 13회 미국 감리회 한국선교연회의 결정으로 창립한 청년단체이다. 창립이후 한국 청년 운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 인천 내리교회 청년회를 나인데 청년회를 시작으로, 1897년 9월 5일 상동교회 청년회, 평양 남선현교회 청년회, 정동교회 청년회가 각각 조직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이트)는 설명입니다.

일제 강점기 많은 종교 단체들 중에서 특히 감리교는 현실 정치 참여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기 위한 특사라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3인의 밀사를 보냈는데 그때 밀사를 보내는 구체적 계획을 실행한 것이 감리교 상동교회였었습니다. 엡윗 청년회도 이런 풍토 속에서 창립되고 활동을 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우리 민족에게 깃발의 전통이 있었던가요? 전쟁을 하는 경우 아군을 표시하는 깃발이 있었을테지만 수해라는 재난을 극복하기 위한 단체가 만들어지고 그 단체가 깃발을 들고 도시의 거리를 걸어 다니는 모습은 시민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국권을 빼앗겨 태극기를 들 수 없었던 시민들에게 수해복구 십자가는 종교의 상징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려움을 겪는 시민들 마음에 위안을 주지 않았을까요?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일제에게는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위협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동정을 구하러 나가는 첫길 (기사 참조)/ 동아일보 1923년 8월 22일

▶단체사진처럼 평범해 보일 수 있는 사진이 저의 시선을 끈 것은 아마 깃발 때문이었을 겁니다. 깃발, 엠블럼, CI 이런 상징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자연스러운 표현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족보는 있을지언정 가문을 상징하는 엠블럼은 우리 문화에는 어색하지 않나요? 권력기관이나 권력이 허가한 기관 이외의 단체가 자신들의 깃발을 만들어 세를 확인하고 과시했던 역사를 별로 찾지 못하겠습니다. 사법 처리 대상에 대해 찍은 머그샷이 일반 사진과 형식상 차이가 없었던 것이 이런 이유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게 또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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