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화장지 없는 화장실은 어떻게 바뀌었나
1967년 미국의 세계 1위 제지회사 킴벌리-클라크 사의 임원이 주한 미국대사관을 방문, 한국 진출을 타진했다. 대사관 직원은 한국의 경제사정과 생활문화 등을 알려주면서 부정적 의견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그래도 미래를 보고 투자한다면 유한양행이 그나마 파트너가 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알려줬다.
당시 우리나라에선 화장실에서도 화장지가 없었다. 도시에선 '용무'를 마치고 신문지나 달력, 전화번호부 종이를 구겨서 사용했고 시골에서는 이런 종이도 부족했다. 고급호텔 식당 테이블에도 티슈가 아니라 화장실용 두루마리 화장지를 놓고 사용했다. 여성들은 무명으로 만든 생리대를 빨아서 사용하였다.
킴벌리-클라크의 임원은 유한양행 경영진을 만나 회사의 계획에 대해 상세하게 소개하고 유한양행의 투자 참여를 제안했다. 유한양행에선 유일한 회장과 임원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투자를 결정했다. 유한양행에 제지부를 만들고 안양공장(현 경기 군포시)에 제품 생산 공장을 건립했다. 지분은 킴벌리-클라크:유한양행 6:4로 하고, 적당한 시점에 최대 52:48까지 변경할 수 있도록 합의했다. 유일한 박사는 1970년 유한킴벌리의 창립을 바라보고, 이듬해 3월 76세로 영면했다.
유한킴벌리가 유한양행 제지부로 출범했던 그때엔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였다. 화장지가 사치품 격이어서 화장지로 매출을 올리는 것은 모험이었다.
첫 유한킴벌리 사장은 1977년까지 유한양행 조권순 사장이 겸임했고, 제지부에 이종대를 채용해 부장 책임을 맡겼다. 유한킴벌리 이사는 킴벌리-클라크 4명, 유한양행 3명으로 구성했다. 유한양행 회장의 조카 유승호가 1952년에 도미해 현지 고교를 거쳐 산호세주립대를 졸업하고 귀국했는데 영어가 능통해서 회사 설립 과정에서 킴벌리-클라크 측과의 소통이 원활했다.
유한킴벌리의 출범은 우리나라 위생 문화를 몇 단계 도약시키는 계기가 됐다. 유한킴벌리에서 1970년에 크리넥스, 이듬해에 여성생리대 코텍스를, 그리고 1974년에는 화장실용 두루마리 뽀삐를 생산 판매했으며 얼마 뒤 팬티형 기저귀 하기스를 출시하였다. 그러나 국민의 생활습관은 곧바로 바뀌지 않아 회사는 재정적으로 매년 적자가 날 수 밖에 없었다.
1977년 정부 목표인 국민소득 1000달러, 수출 100억달러가 성공적으로 달성됐다. 그해 1969년에 유한양행을 퇴직해 새한미디어 임원으로 일하던 유승호가 유한킴벌리 사장으로 왔다. 이 무렵 지속적으로 적자이던 유한킴벌리 매출이 증가하여 조금씩 경영이 정상화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엔 이종대가 유한킴벌리 사장이 돼 고향인 경북 김천에 공장을 추가로 설립했다. 국민소득이 1980년대에 지속적으로 증가하였기에 화장지와 생리대 등의 수요가 늘어났다. 1984년 회사는 우리나라 ESG 경영의 리더답게 환경 캠페인 "우리 강산 푸르게"를 시작했다.
환경과 관련, 빠뜨릴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유한킴벌리에서 제품을 생산하면서 인쇄 염료를 사용하므로 폐수가 오염될 위험이 있었다. 유한킴벌리 공장에서는 폐수를 버리는 중간에 어항을 만들어 물고기가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게 하였다. 예방의학 전공인 필자는 이를 보건학 영역과 예방의학의 한 영역인 환경보건분야에서 널리 알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해 1970년대 관련 학회들에 알렸고, 그 후 의대와 대학원에서 강의할 때에도 틈틈이 소개하였다.
폐수처리 시설은 기업이 먼저 시작했고, 이어 1976년 서울시가 청계천에 하수처리장을 설치했다. 또 1980년대 서울시는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을 앞두고 4곳에 폐수처리장을 설치했다. 폐수 처리시설이 생기자 한강에 물고기가 다시 살기 시작해 서초구 반포 강가에서 낚시를 하는 모습이 보였고, 버스를 타고 중랑천을 지날 때 어린이들이 냇가에 들어가서 물고기를 잡는 것을 볼 수 있게 됐다.
1980년대 중반부터 필자는 유한킴벌리 관계자들에게 이것저것 제안했다. 병원은 수술방에서 필요한 수술복, 장갑, 모자 등을 세탁하여 사용하였는데, 미국 병원에서는 1회용을 사용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비용도 별 차이 없고, 깨끗하여 바람직한 1회용 수술용품 제조를 유한킴벌리에 제안하였고, 병원 관계자들에도 알렸기에 1980년대 말에는 병원 수술방에서 1회용 사용이 눈에 띄기 시작하였다.
1995년에는 이종대의 15년 경영을 문국현이 이어받아 사장이 됐다. 문국현이 기획부서를 담당하던 1980년대 후반에 유한양행 이사회에 와서 유한킴벌리 운영에 대하여 보고를 하곤해서 유한양행 이사였던 필자는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요실금팬티 제조를 제안하였다. 여성들이 50대부터는 자지러지게 웃을 때, 소변을 지리는 경우가 흔하고, 남성들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서 바지를 적시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였다.
유한킴벌리는 필자의 제안을 전적으로 받아들였고, 홍보담당자를 보내 광고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했다. 필자는 성인용 안심위생팬티 디펜드 광고 문안을 만드는데 조언했고, 포장지에는 필자의 사진이 실렸다. 광고료는 필자가 소개했던 공익기관에 전액 기부토록 하였다.
1997년 IMF 경제위기 때엔 유한양행에서 유한킴벌리 지분 10%를 킴벌리-클라크에 양도하였기에 지분이 7:3으로 됐다. 필자는 이를 반대하였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유한킴벌리는 1994년에 제조공장을 대전에 추가로 건설했고, 2011년에는 창립 시 건설한 안양공장을 충주로 이전했다.
문국현은 12년을 사장으로 근무하고 2007년에 퇴임한 뒤 정계에 진출했으며 2010년 최규복 사장이 취임했다. 그런데 다음해에 엉뚱한 퇴임 제안이 있어서 설왕설래하였다가 결국 조용해졌다. 회사 운영 상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얄궂은 제안이기에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는 10년을 사장으로 재임하면서 회사를 잘 이끌었다. 킴벌리-클라크와 유한양행 투자비가 7:3 이었지만 유한킴벌리 임원은 그대로 각각 4명과 3명을 유지했다. 그런데 사장 퇴임 사건이 마무리되자 킴벌리-클라크 제안으로 임원을 5명:2명으로 하였다. 유한킴벌리 이사가 7명인데 지분이 7할이니까 그리 한 것이다.
우리나라 위생환경을 크게 바꾸며 '유일한 정신'을 펼친 유한킴벌리에서 유한양행의 영역이 줄어드는 걸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참 가슴 시린 일이었다.
유승흠 교수 (yoush@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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