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품, 진열대 아닌 생활 속에서 작품이 된다 [ESC]
“완상 아닌 쓰임 있어야 제 역할”
직접 만져봐야 아름다움 느끼고
일상을 특별하게 채울 수 있어
“도자기 작가가 만든 그릇이나 공예품은 어디에서 살 수 있나요?” 요즘 들어 자주 듣는 질문이다. 그렇다. 공예품은 조금은 애를 써야 만날 수 있다. 공산품이 아닌 공예품을 만들고 판매하는 이들은 비용을 들여 광고나 마케팅을 하기 어려운 소상공인이기에 알음알음 찾아 나서야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공예품을 접하기 쉽지 않지만 한 번 물꼬를 트고 나면 물줄기가 시원스레 이어져 공예품에 대한 시야도 넓어지고 안목도 비옥해진다.
무엇이든 온라인에서 구입할 수 있는 시대지만 공예품만큼은 직접 보고 만져봐야 제맛과 멋을 느낄 수 있다. 가게마다 주인이 가진 특별한 취향과 안목을 엿보고 배우고 탐내며 나의 식견을 키울 수 있어 공예 가게는 소중하다. 파리와 도쿄 등 외국 도시를 여행할 때 예쁜 소품 가게나 편집숍을 찾아다니듯 한국 공예를 느끼는 재미를 서울에서도 충분히 누릴 수 있다.
“옻이 피어나는 새로운 감동”
올해 8월 초에 문을 연 서울 용산구 ‘월(WOL) 한남’에서는 수줍은 환대 속에서 기품이 깃든 식탁을 채워줄 취향을 만날 수 있다. ‘월 한남’의 조성림 대표는 직접 사용해보고 감탄한 공예 살림 도구를 선보이고 있다. 조 대표는 마케팅 회사를 운영하며 종로구 삼청동의 한옥 공예 갤러리 ‘월 삼청’에서 공예품을 전시할 정도로 공예를 아끼고, 집으로 초대한 손님들과 손수 만든 요리를 자주 즐긴다.
이기조 작가의 백자 그릇과 접시, 김동희 작가의 조각보를 닮은 유리컵, 박미경 작가의 금속 와인 바스켓, 민덕영 작가의 옻칠한 금속 접시 등 그의 식탁을 아름답게 채운 공예품이 ‘월 한남’을 풍성하게 장식한다.
“결혼 후 살림을 하면서 차츰 식탁 위에 공예품이 자주 올라간다는 걸 알았어요. 저절로, 자주 손이 가는 그릇들은 작가가 만든 것들이었죠. 누가 만들고, 어떤 고민과 과정을 거쳐 완성됐는지 알 수 있어 마음이 더 닿는 것 같아요. 같은 물건이라도 똑같은 게 없이 조금씩 달라서 지루하지 않은 점도 공예품만의 매력이고요. 가장 애용하는 민덕영 작가의 접시는 금속에 옻칠로 색을 입혀 튼튼하기도 하지만 쓸수록 옻칠의 색이 깊이 있게 변해가는 걸 보는 즐거움이 큽니다. 옻이 피어난다고 하는데 매일 쓰는 공예품은 매번 새로운 감동을 선사해요.”(조성림 대표)
한남동 제일기획 근처 골목의 한 건물 3층에 비밀스럽게 자리 잡은 이곳은 조용한 원테이블 레스토랑 같기도 하다. 한 사람을 위해 정성스럽게 준비한 요리처럼 주인의 잘 익은 취향을 천천히 음미하며 즐길 수 있는 다정하고 맛깔난 공예 가게다.
한옥마을로 유명한 종로구 북촌 초입의 좁은 골목엔 ‘미고 크라프트’가 보석처럼 숨겨져 있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번잡한 동네지만 미고 크라프트가 있는 골목만큼은 한적하고 평온하다. 2층 양옥집에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한옥 고택의 고아한 살림처럼 소박하고 정겨운 풍경이 푸근하다. 옛 부엌에 있었던 찬장과 유기, 소반, 백자 제기 등 골동품과 현대 공예 작가들의 공예품이 어우러진 이곳에서는 아름다운 살림살이를 예찬하는 조유겸 대표의 취향과 살림 솜씨를 배울 수 있다.
“설거지할 때 고운 그릇을 닦는 게 기분이 한결 좋잖아요. 공예품은 감상하는 게 아니라 쓰임이 있어야 제 역할을 하는 거라 생각해서 ‘완상’보다는 실제로 사용하는 물건이어야 해요. 게다가 이렇게 아름다우니 마음이 가고 손이 자주 닿지요. 특히 전남 담양과 경남 하동에서 만든 대나무 바구니를 좋아해서 집 안 곳곳에서 수납 용도로 사용해요. 자연이 오롯이 담겨 있어 보기에도 편안하고 대를 물려 쓸 수 있는 물건이죠. 빵을 무명 행주에 싸서 보관하거나 버섯, 귤껍질 등 건조할 때도 대나무 바구니는 참 유용합니다.”(조유겸 대표)
서석근, 서신정, 최지한 작가의 대나무 공예품을 비롯해 전남 부안에서 빚은 빛 고운 청자, 해인요의 담백한 백자, 양유완 작가의 영롱한 유리 그릇 등 조유겸 대표의 안목으로 채운 찬장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싶다는 사심이 번진다.
☞한겨레S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세요. 클릭하시면 에스레터 신청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한겨레신문을 정기구독해주세요. 클릭하시면 정기구독 신청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가슴 졸이며 간직해야 하나요?
한국 공예 작가들과 독일 뮌헨에 살고 있는 기획자가 만난 큐레이팅 전시 ‘소니아스 테이블스케이프(Sonia’s Tablescape)’에서는 이국적인 취향이 마음을 간지럽힌다. 서울과 뮌헨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아트디렉터 소니아(김소현)가 모은 여섯 작가의 도자기, 유리, 그림, 조각과 바느질 작품들이 유럽 동화책 속 사랑스러운 장면처럼 펼쳐진다. 마냥 동화 속 물건처럼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당장 우리 집에 가져가도 제 역할을 해낼 듯 자연스럽다.
“정지원 작가와 만든 도자기 달걀컵과 요구르트 볼이 특히 이번 전시를 잘 설명해줍니다. 삶은 달걀과 요구르트를 아침으로 주로 먹는 독일에서의 일상을 바탕으로 만들었지만 한국 자연물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유약 역시 저와 작가님이 머무는 두 도시에서 유래했는데 뮌헨의 흐린 하늘색과 한국에서 찾은 벽돌색을 유약으로 옮겼습니다.” 소니아의 설명이다.
가슴을 졸이며 사용하고 간직해야 하는 아슬아슬한 미감의 작품보다는 매일 주저 없이 손이 가는 공이 깃든 공예 살림을 좋아하는 취향 덕분에 소니아의 테이블에 모인 물건들은 일상의 맥락 안에서 즐겁고 독창적인 서사가 그려진다. 뮌헨과 서울의 정서가 담긴 탁자 풍경은 한남동에 위치한 공예 편집숍 ‘핸들 위드 케어’에서 오는 9월10일까지 즐길 수 있다.
부러운 취향을 가진 세 명 모두 매일 사용하는 공예 살림살이를 강조했다. 특별한 날을 위한 게 아니라 하루하루를 특별하고 아름답게 채워주는 자신을 위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미감이 희미해지는 시기가 있다. 버거운 일들로 휘청거리고 생기를 잃어갈 때면 약방처럼 공예 가게에 간다. 고운 살림 도구와 지혜로운 살림 솜씨를 탐내고 나면 마음에 윤기가 돌고 따라 하고 싶은 의욕이 샘솟는다. 공예를 욕망하는 가장 큰 장점이다.
박효성 리빙 칼럼니스트
잡지를 만들다가 공예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우리 공예가 가깝게 쓰이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가꿔주길 바라고 욕망한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찬성도 지지도 아니다? [논썰]
- ‘완전하고 불가역적’ 3국 동맹…미국이 청구서 날리면?
- “‘노란버스’ 없어 수업할 판”…교육부 뜬금 방침에 가을소풍 대혼란
- 하루 14분씩, 일주일 세 번…고혈압엔 스쿼트, 특히 ‘벽 스쿼트’
- 힘든 시대 위로했던 여성국극…세대 넘어 부르는 ‘부활의 노래’
- 정부, 후쿠시마 ‘오염수’를 ‘처리수’로 바꾸나
- 40년 된 구옥을 목공방으로…버리고 버려도 세월이 쏟아졌다 [ESC]
- 파월 “물가 여전히 높다…필요하면 금리 더 올릴 것”
- [단독] 홍범도 철거하고 ‘만주군 출신’ 백선엽 흉상 검토…육사의 ‘역사쿠데타’
- 장관은 숨고 대변인은 화장실 도주…김현숙 기행에 여가위 파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