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꿈, 내가 사겠어요”…‘삼국의 여인’ 말하자 삼국유사 빛났다

한겨레 2023. 8. 26.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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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신지은의 옛날 문화재를 보러 갔다][한겨레S] 신지은의 옛날 문화재를 보러 갔다
삼국의 여인들, 새로운 세계를 열다
선덕왕·문희 등 역사적 인물들
1인칭 서술, 미디어아트 구현
익숙한 이야기 다시 상상하게
조선시대 제작한 판본도 전시
‘삼국의 여인들, 새로운 세계를 열다’ 전시 2부에서 “내가 그 꿈을 사겠어요”라는 문희(김유신의 동생)의 발언이 한글로 뜨고 ‘삼국유사’의 한문 부분이 밝게 빛나고 있는 모습. 신지은 제공

박물관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문화재 중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건 고서(古書)다. 고려 사경처럼 색지에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글씨를 새긴 것도 아니다. 요즘 책들처럼 표지에 그림이 들어간 것도 아니다. 한자도 읽을 줄 모른다면 마음의 거리를 좀처럼 좁히기 힘들다. 그러나 그 뜻을 해독할 수 있다면 무궁무진한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는 미련에 자꾸 더 들여다보게 되는 평양냉면 같은 문화재다.

국립한국문학관이 서울 은평구와 협력해 은평한옥역사박물관에서 연 삼국유사 특별전이 궁금증을 일으키는 이유도 그래서다. ‘삼국의 여인들, 새로운 세계를 열다’(10월29일까지)는 책 속에 나타난 역사나 생활상이 아니라 ‘삼국유사’ 자체를 다루는 전시다. 전시품 90점 중 절반은 고전, 절반은 근현대 자료들로 채웠다. 스마트폰만 있다면 책 한권의 내용을 뚝딱 알아볼 수 있는 시대에, 이야기는 어떻게 전시가 될까. 국립한국문학관의 전시는 문학이 지닌 근원적인 힘과 가능성으로 질문에 화답한다.

해석된 한글을 성우 목소리로

이 전시는 한때 분명 존재했지만 남겨지지 않은 것들을 살핀다. ‘삼국유사’라는 제목에 들어간 ‘유사’(遺事)는 정사(正史)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세상에 남아 있는 글과 이야기를 모아 기록한 것이다. 유학자의 시각으로 쓴 ‘삼국사기’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이야기와 정치적 비주류였던 불교, 여성에 관한 이야기는 제외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까지 더해져야 우리 고대사를 온전히 볼 수 있다고 생각한 일연의 손에서 ‘삼국유사’는 결승전보다 재미있는 패자부활전으로 탄생했다.

1~3부에선 웅녀와 선덕왕, 허황옥, 처용의 아내 등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다채로운 여성 인물들을 소개한다. 알기 쉽게 풀어 적은 이야기를 통해 각자 강인함, 예지력, 결단력, 아름다움 등 인물들의 다양한 특징을 관람객에게 전한다.

‘삼국유사’ 안에서 여성의 이야기는 남성보다 비중이 적지만, 전시에선 여성들이 자기 생각을 직접 표현한 부분에 주목했다. 2부의 미디어 아트는 선덕왕과 허황옥, 문희의 말을 직접인용으로 기록한 부분을 담았다. ‘삼국유사’ 내용으로 채운 화면에서 1인칭 여성 화자의 한문 텍스트가 도드라지면 여성 성우의 목소리와 한글 해석을 곁들여 보여주는 방식이다. 마치 관람객이 고서 속 내용을 한줄 한줄 손끝으로 짚어가며 읽어 내려가듯 화면을 연출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김유신의 동생 문희의 말이다. 문희가 언니의 꿈을 산 덕에 김춘추와 혼인하고 왕비의 자리에 오른다는 옛날이야기를 모를 한국인은 거의 없다. 그러나 같은 내용을 ‘나’(我)로 다시 시작하는 순간 이 이야기는 완전히 새롭게 다가온다. ‘삼국유사’는 꿈 얘기를 들은 문희의 반응을 이렇게 전한다. “내가 그 꿈을 사겠어요.”(我買此夢) 뭘로 꿈을 살 거냐는 언니의 질문에 문희는 다시 답한다. “비단 치마를 주면 어때요?” 장난스러운 눈빛과 앳된 웃음소리가 오가지만 왠지 모를 긴장감이 슬그머니 차오르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이렇게 이야기 속 인물들의 목소리를 캐내는 시도를 통해, 이 전시는 익숙한 이야기를 관람객들이 다시금 상상하게 하는 새로운 힘을 만들어낸다. 고전이니까 알아야 하고 읽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문학 그 자체로서 관람객의 마음속으로 성큼 발을 들여놓게 한다. 현대미술이었다면 전복과 해체라고 부를지도 모를 적극적인 시도를 문화재 전시에서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신선한 즐거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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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인 1512년에 간행된 ‘삼국유사’ 정덕본. 신지은 제공

조선시대에 찍어낸 ‘삼국유사’

4부에서 실물로 전시된 ‘삼국유사’는 1512년 경주에서 다시 펴낸 정덕본이다. 명작으로 꼽히는 만화책도 재출간되면 조금씩 크기나 사양·편집이 달라진다. 에디션, 판본(板本)의 진화다. 1512년 정덕본은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삼국유사’ 판본으로 평가된다.

이 정덕본의 재미있는 특징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목판을 섞어 만들었다는 점이다. 고려 때 만든 목판을 다시 쓰되 망가진 것은 새로 판을 제작해 보충했다. 목판으로 책을 찍으면, 오래 써서 나무 활자가 닳아버린 판은 종이에 찍힌 글자도 윤곽이 부드럽다. 반면 새로 만들어 찍어낸 쪽은 글자가 예리하고 선명하다.

고려시대 목판도 있긴 했지만 정덕본 인쇄에 쓰인 건 대부분 조선시대에 새로 만든 판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삼국유사’ 수요가 꾸준히 이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고전으로서의 생명력을 느끼고 보면, 그 책이 그 책 같던 전시실 안의 풍경이 사뭇 새롭게 다가온다. 이 오래된 책들이 모두 세상에 나온 뒤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필요에 힘입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알쏭달쏭하던 고서를 바라보는 눈길에도 비로소 진솔한 경외가 어린다.

이 고전의 생명력은 전시의 주제이자 국립한국문학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핵심어이기도 하다. 전시 4부와 5부는 이 고대의 이야기가 근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어떻게 읽히고 소비됐는지 보여준다. 누군가는 연구 자료로, 누군가는 문학 창작의 원천으로 그 이야기들을 주목하고 세상에 다시 소개했다. 이런 힘은 ‘삼국유사’ 속 이야기가 복잡하게 가공되지 않은 원형적인 이야기라는 데서 나온다. 변신, 도전, 사랑, 예언, 희생 등 어느 시대든 사람들이 꿈꾸고 상상하는 이야깃거리가 웅녀와 문희, 수로 부인, 처용의 아내, 선덕왕, 호랑이 처녀 등의 이야기들에 담겨 있다.

다른 꿈을 꾸었던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오늘날 우리의 꿈을 돌아보기도 한다. 꿈과 상상은 늘 사람들이 뛰어넘고 싶은 현실의 제약에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아닌 이야기로 남겨진 존재들을 만나는 순간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세상 뒤에 남겨놓고 있는지 말이다.

문화재 칼럼니스트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재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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