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과제 함께 했을 뿐…“컴퓨터 같은” 그의 ‘실연 아닌 실연’
착각과 연애감정
팀 과제 과정 경청해준 여학생
자신에게 호감 보였다고 착각
IQ·수리능력 뛰어난 영재이지만
관계맺기 서툴고 맥락 이해 못해
태민(가명)씨는 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입니다. 혼자 전기회로를 만들고 조립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태민씨의 방에는 자신이 만든 다양한 기판들이 있습니다. 기판을 조립할 때는 아무 생각이 안 들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하지만 태민씨는 친구들을 만나거나 어울리는 것은 잘하지 못합니다. 학교에 가도 수업만 듣고 돌아옵니다. 같은 과 동기도 태민씨의 얼굴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태민씨는 특히 친구를 만날 때 눈을 잘 맞추지 못합니다. 눈을 맞추면 왠지 부끄럽고 불편한 생각이 들어 자꾸 시선이 아래쪽을 향하게 됩니다.
혼자 사랑에 빠지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태민씨에게 변화가 생겼습니다. 태민씨가 듣는 수업의 강의실에서 다른 단과대 학생인 선영(가명)씨를 우연히 마주친 뒤부터였습니다. 태민씨는 선영씨와 팀 과제를 함께하게 되었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선영씨를 보고 선영씨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단둘이 학교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태민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전기회로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선영씨에게 호감이 생겼습니다. 태민씨는 선영씨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 자신이 만든 회로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선영씨는 그런 이야기가 지루했지만, 과제를 함께 해야 했기에 끝까지 잘 들어주었습니다. 그러자 태민씨는 선영씨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확신하게 됐습니다. 선영씨가 듣는 수업은 한번도 빠지지 않고 들었고, 같은 수업을 듣는 친구와도 이야기를 나누게 됐습니다. 태민씨 부모님은 아들이 예전과 다르게 표정도 좋아지고 혼자 방에 틀어박혀 전기회로를 만드는 시간도 줄어들자 기뻐했습니다. 태민씨는 부모님에게 스마트폰으로 선영씨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자랑했습니다.
태민씨는 선영씨의 에스엔에스(SNS) 아이디를 알게 되어 팔로했습니다. 그런데 선영씨의 에스엔에스엔 어떤 남자와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들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선영씨와 같은 과 남학생이었습니다. 선영씨는 학교에서 유명한 캠퍼스 커플이었습니다. 태민씨는 크게 낙담했습니다. 온종일 에스엔에스에 들어가 선영씨와 선영씨의 남자친구가 무얼 하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선영씨의 남자친구를 비난하는 내용을 댓글로 계속 올렸습니다. 결국 선영씨는 태민씨를 ‘차단’했습니다.
태민씨는 학교에서 선영씨를 마주쳤고, 왜 나를 버리고 다른 남자친구를 만나게 되었는지, 에스엔에스는 왜 차단했는지 따졌습니다. 선영씨는 황당해하며 단 한번도 태민씨를 남자친구로 생각한 적이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같이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함께 해야 해서 만난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선영씨는 태민씨에게 앞으로 다시는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태민씨에겐 결국 심한 우울감과 무기력감이 몰려왔습니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선영씨가 없는 삶이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태민씨는 여전히 선영씨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었는데 남자친구 때문에 자신을 배신한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태민씨는 친구들에게 부탁해 선영씨의 에스엔에스를 보려고 했지만 친구들의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태민씨는 실연으로 인한 우울감과 자기 비난으로 인근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해 상담을 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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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 감정 이해하고 공감하는 연습
정신건강의학과 검사상 태민씨는 영재고를 졸업할 정도로 지능지수(IQ)는 최상위 수준이었습니다. 특히 수리적인 계산 능력과 어휘력에서는 특출난 능력이 있었습니다. 반면 문장의 맥락을 해석하고 사람과 관계를 맺는 능력은 매우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이에 반응하는 능력이 잘되지 않았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내용에 공감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상황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융통성이 없는 ‘구체적 사고’(Concrete thinking)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응급실에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물으면 “택시 타고 왔습니다”라고 답하는 식입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태민씨를 “컴퓨터 같다”고 했습니다.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수학 기계 같다고 느꼈습니다.
태민씨의 아버지도 태민씨와 비슷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대학교수로 정년퇴직을 했는데 평생 분자 구조를 연구했습니다. 강의를 알아듣는 학생이 드물 정도로 태민씨 아버님은 무척 어려운 내용을 연구하셨습니다. 태민씨 어머니는 평생 집에서 ‘움직이는 컴퓨터’ 두대를 관리하는 듯한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다만, 태민씨 여동생은 어머니를 닮아 이야기가 통하고 대인관계가 좋은 편이었습니다.
태민씨는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통해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어울리며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는 연습을 해보았습니다. 태민씨는 다양한 친구를 만나고 친해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면서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생각을 듣고 공감하는 연습을 해야 했습니다. 태민씨는 치료를 통해 친구와 멀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이 자신을 떠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면서 새로 만나는 것을 편하게 시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태민씨는 앞으로 사회성을 향상시켜 자신의 수리적 능력뿐 아니라 여러 사람과 소통하고 감정을 교류하는 능력을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치료를 통해 조금씩 태민씨는 담당 의사와 눈을 맞추고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굴을 보지 않고 목소리만으로 감정을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눈과 입의 움직임의 미묘한 변화에 그 사람의 감정이 들어 있습니다. 태민씨가 다른 사람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하고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는 능력이 좋아진다면 머지않아 자신과 제대로 소통할 수 있는 여자친구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책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상담소’를 썼습니다. 글에 나오는 사례는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으며,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경우를 통합해서 만들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전문의와의 상담과 진료가 필요하며, 쉽게 자가 진단을 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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