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하늘과 하얀 땅, 이카로스가 바라본 풍경[김창길의 사진공책]
피터 브뤼겔의 그림 ‘아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1558)을 본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날개의 밀랍을 녹여 버린 태양 아래 땀 흘리며/ 앞바다에선 사소하게 일이 하나 있었으니/ 아무도 몰랐던 어떤 풍덩 이것은 익사하는 이카로스였다.”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밭을 가는 농부와 양을 치는 목동, 그리고 바닷가 낚시꾼에게 날개 달린 인간의 추락은 안중에 없다. 화가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시인의 노래처럼 신화가 아니라 평민들의 삶이다. 브뤼겔이 살았던 유럽 플랑드르 지역에는 “사람이 죽어도 쟁기질은 멈출 수 없다”는 속담이 전해진다. 먹고사는 일이 녹록지 않았던 시절의 풍경을 그린 것일 터. 중세의 가을이 지난 15세기 무렵부터 플랑드르 화가들은 종교화의 속박에서 벗어나며 인간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카로스에게 날개를 달아준 다이달로스의 경고처럼, 아주 높지도 낮지도 않은 위치에서 바라본 풍속화다.
사진미술관 ‘뮤지엄한미’가 올해 주목한 젊은 사진가 김승구의 포트폴리오는 이카로스의 비상을 보는 듯하다. 미로 같은 세계를 조망하려는 김승구는 다이달로스의 날개를 달았지만 오만방자한 이카로스와는 달리 선배들이 개척한 항로와 항법을 지키며 비행한다. 디지털 시대에 구시대 유물처럼 보이는 필름 대형 카메라와 삼각대를 화물칸에 싣고 다닌다는 점에서 그렇다. 젊은 작가의 혈기는 또 다른 항로를 개척하기 위한 연료가 된다. 그의 목적지는 어느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다. 그래서 김승구의 비행은 고단하다. 대기권 밖 수많은 인공위성이 고해상 카메라로 지구 구석구석을 촬영하고, 구름 아래에서는 까마귀만 한 드론이 갈지자로 비행하며 이미지를 채집하는 시대를 김승구는 온몸으로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사람이 직접 찍어야 할 장면들이 인간 세상에 널려 있다.
김승구의 최근 항로는 경남 하동의 한 야산이다. 인간이 만든 화력발전소와 국가산업단지, 그리고 자연이 연결된 상태를 조망할 수 있는 지점에 관측소를 차렸다. 대기 상태를 기록하기 위한 김승구의 관측소다. 그의 관측일지에는 다음과 같은 목표가 적혀 있었다. “이제까지의 모든 풍경 사진에서 ‘배경’으로 치부했던 ‘대기’와 그 속의 ‘보이지 않는 물질들’, 그 ‘희미한 존재’들을, 그들에 의한 환경의 ‘변화’를, 우리의 ‘현실’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관측 방법은 다음과 같다. 한 지점을 반복해 오랫동안 지켜보기, 하루를 시간대별로 나누어 관측하기, 촬영 시점의 대기질 상태 AQI(Air Quality Index)를 기록하기.
사진 연작 <하동 관측소>에서 포착된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들”은 무엇이었을까? 하동화력발전소와 여수·광양의 국가산업단지, 그리고 한려해상은 관측 대상이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관찰의 기준점이자 사물의 윤곽일 뿐, 김승구가 필름에 현상해내려 했던 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물과 관측소 사이를 메우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았던 미지의 것들이다. 인간 망막이 아닌 필름의 은(銀)가루가 걸러낼 수 있는 어떤 것들 말이다. 관측 결과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필름에 맺힌 이미지 속에서 ‘하얀 땅’이 ‘검은 하늘’과 맞닿아 있고, ‘검은 연기’가 ‘검은 구름’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았다.” 관측일지의 방점은 잘못 찍혀 있는 것 같다. ‘검은 연기’ 등에 표기된 작은따옴표가 ‘맞닿아 있고’와 ‘이어지는 것’에 표기되어야 작가가 이전부터 도달하고자 했던 목표를 명료하게 기록할 수 있을 테니까. 김승구는 “인간과 환경이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가시적인 형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Better Days(좋은 시절)> <Bam Islet(밤섬)> <Riverside(강변)> <Jingyeong Sansu(진경산수)> 등 이전 포트폴리오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중심으로 환경과 인간의 관계를 탐색했다.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 교수가 ‘콘크리트 유토피아’라 했고, 래퍼 제이지(Jay Z)가 ‘콘크리트 정글’이라 노래했던 메트로폴리탄의 풍경들. <진경산수>에는 금강산 등 명산의 복제물로 꾸며진 아파트의 단면들이 펼쳐지고, 콘크리트로 축성된 <강변>에는 물난리를 구경거리로 삼는 도시인들의 기이한 광경이 목격된다. 한강의 무인도 <밤섬>은 정글 모습인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었다는 섬의 역사를 서울 시민들은 알고 있을까? 여의도 제방을 쌓는 축석을 확보하기 위해 밤섬은 폭파됐다. 55년 전 펼쳐진 환경 파괴 작전이다. <좋은 시절>에는 강수욕을 즐기던 한강변 모래사장이 사라진 자리에 ‘공구리 친’ 야외 수영장 풍경이 등장한다. <진경산수>처럼 도심 속에 억지로 끼워 넣은 듯한 유원지와 공원, 그리고 지방 축제의 풍경은 <좋은 시절>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인간과 환경의 상호작용에 대한 시선은 동일하지만 시점 변화가 있다. <진경산수>에서 김승구는 도시 산책자처럼 두 발로 도시를 걷다 마주친 장면들을 채집했다. 사람의 눈높이 시점이다. <밤섬>과 <강변>을 산책하던 김승구는 때에 따라 높은 곳에 오른다. 한강을 떠도는 갈매기가 비행하는 정도 높이에서. 새의 시점은 <좋은 시절>에서 일관되게 유지되며 콘크리트 정글을 조망한다. 배경으로 자주 목격되는 아파트는 박해천 교수가 <콘크리트 유토피아>(자음과 모음)에 썼듯이 “대오를 갖춰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도도한 몸맵시”를 자랑한다. 아파트의 전체적 맵시는 산책자가 감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새의 시점에서나 감상될 수 있는 풍경인데, 아파트의 원형을 창조한 르코르뷔지에는 “중력의 족쇄로부터 자유로워져 건축적 상상의 날개를 펼치며” 건축물을 도시 전체 차원에서 설계했다.
<좋은 시절>에 등장하는 휴식과 축제 장면은 매스미디어에도 단골로 나오는 소재들이다. 미디어에는 대개 다음과 같은 캡션이 달린다. ‘한강공원 수영장을 찾은 시민들이 물놀이를 즐기며 더위를 식히고 있다. / ○○○ 기자.’ 중력의 족쇄로부터 자유로운 김승구의 사진에는 좀 더 많은 이야기가 스며들어 있다. 작가의 한마디는 “어떤 상황에도 적응하고 함께 즐기며 ‘공존’을 위해 노력하는 한국인의 모습”이다. 수영장 주위에 빼곡히 들어찬 파라솔과 물소 머리 모양 상표가 새겨진 똑같은 그늘막 텐트, 한강을 제방처럼 둘러싼 아파트 물결, 한강의 기적을 기념하는 오벨리스크처럼 강물 한가운데에 우뚝 선 콘크리트 교각들…. 여기에 와글와글 모여 있는 개미 같은 사람들은 작가의 생각처럼 “어떤 상황에도 적응하고 함께 즐기며” 있는 것일까? 김승구의 사진을 보는 나는 철학자 한병철이 <리추얼의 종말>(김영사)에 적은 문장들을 다시 읽어본다. “휴식도 생산에 장악되어 휴가로, 회복을 위한 중단으로 격하된다 … 휴가는 공허한 시간, 공허에 대한 공포다 … 그래서 많은 이들이 다름 아니라 휴가 중에 병에 걸린다.”
김승구가 바라보는 세상은 관객들에게 다양한 질문들을 던질 뿐, 정답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새처럼 하늘에서 본 인간 세상의 풍경이 그만큼 다층적이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영국 일러스트레이터 마틴 핸드포드의 그림책 <윌리를 찾아라>를 펼쳐 보듯 이야기의 주인공인 윌리를 찾아 사진 속을 탐색한다. 숨은 윌리 찾기를 하는 관객들은 탐색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마주치기도 한다. 타인은 지옥일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발표한 김승구의 <하동 관측소>에서 윌리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빨간 줄무늬 티셔츠를 입던 윌리가 해리포터처럼 투명 망토를 걸쳤기 때문이다. 빛이 투과되는 투명 망토는 사람 눈을 속인다. 눈빛은 사물에 반사되어 다시 내게로 되돌아와야 존재를 지각할 수 있다. 김승구가 고군분투했던 것은 바로 빛에 대한 문제였다. 빛이 없다면 사람은 누구나 눈뜬장님이다. 빛은 입자일까? 아니면 파동일까?
유난히 어두운 밤이었다. 짙은 해무가 깔리고 달빛조차 없는 칠흑 같은 밤. 김승구는 관측일지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멍하니 어둠을 바라본다”라고 적는다. 그런데 우리는 어둠을 볼 수 있는 것일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를 왜 우리는 ‘어둠을 바라본다’라고 적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것 너머에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직감 때문은 아닐까? 김승구의 직감은 현상된 필름을 관찰하면서 타당성을 획득한다. 음화(negative)된 필름에 현상된 세계는 인간 망막에 맺힌 이미지와 반대의 명암을 보여주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필름 속 하늘과 연기 그리고 구름은 검정이고 땅은 하얀색이다. 어둡다는 것은 결국 바라보는 주체인 인간의 착각이 아닐는지.
완전한 어둠은 제로에 가깝다. 빛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아니라면 말이다. 2023년 2월6일 오전 5시35분, 태양이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기에는 아직도 이른 시간, 남녘의 하늘 밑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땅덩이에 꽂은 빨대처럼 기립한 다섯 개의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와 하동발전소의 전력을 공급받아 24시간 가동되는 산업단지의 불빛들이 용암처럼 한려해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래도 남녘 하늘 대부분은 검다. 대기질 지수 AQI는 113. 노약자에게는 해로울 정도의 상태. 김승구는 인간의 불빛이 떠받치고 있는 암흑의 하늘을 두 가지 버전으로 인화했다. 인간의 망막에서처럼 맺힌 이미지와 이와는 반대로 필름에 남겨진 은가루의 흔적이다.
이카로스의 날개는 아직 녹아내리지 않았다. <하동 관측소>를 떠난 김승구는 여전히 새의 시점에서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조망하고 있다. 앞서 말했지만, 아직 찍어내야 할 장면들은 세상에 널려 있다. 얇은 모니터에서 명멸하는 이미지들을 채집하는 것은 사진가만의 몫이 아닐 것이다. 사람의 뇌가 아니라 심장을 두드리는 사진들은 매끄러운 액정의 상태가 아니라 먼지와 습기에 얼룩진 창문과 거울로 보는 이미지들이다.
<하동 관측소>는 서울 종로구 ‘뮤지엄한미’ 삼청별관에서 볼 수 있다. 오는 9월 24일까지.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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