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는 왜 하얼빈역에서 저격됐나…철도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왜 만주의 하얼빈역에서 저격했을까?
답이 뻔한 질문이다. 그날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역에 도착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이니까.
그렇다면 그날 왜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역에 왔던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조금 복잡하다. 당시 만주와 한반도에서 벌어지던 열강들의 세력 다툼까지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하얼빈은 청나라 영토 안의 도시였지만 러시아 소유의 동청철도가 지나가는 중심지로 러시아가 경찰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이 중재한 포츠머스강화조약을 발판으로 만주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여전히 만주에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던 러시아와 충돌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남동부 도시인 치타에서 시작하여, 하이라얼, 치치하얼, 하얼빈, 목단강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총연장 1760km의 동청철도 노선을 소유하고 관리하고 있었다.
러일전쟁 승리 후 일본은 만주에서 철도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일본은 포츠머스조약으로 장춘-뤼순간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1906년 700km 남만철도 노선을 관리·운영했다.
케잌을 자른 칼처럼 러시아의 동청철도는 만주를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지나가고, 일본의 남만철도는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지나갔다. 이 두 개의 철도가 만나는 지점이 바로 하얼빈역이었다..
변수가 하나 더 등장했다. 미국 역시 만주지역에 군침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포츠머스회담이 진행되는 와중에 미국의 철도왕 에드워드 헨리 해리먼이 남만철도 사업을 미·일 합작 사업으로 할 것을 일본에 제안하고 가쓰라 다로 수상과 예비각서까지 작성했다. 그렇다. 한반도의 일본 식민지배를 인정한 그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바로 그 가쓰라다. 해리먼의 제안은 일본 고무라 외상의 반대로 무산되지만 1909년 ‘가쓰라-태프트밀약’의 윌리엄 태프트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서 또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태프트 정부는 만주철도 중립화를 주장하며 러시아와 일본 양국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만주에서 러시아 재무대신인 코코프체프를 만나 이 지역에서 세력권을 분할하는 문제를 협의하기로 했다. 철도 문제가 핵심 의제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과 러시아 협력의 산물인 장춘-하얼빈간 남부지선을 따라 러시아철도국이 보내준 특별열차를 타고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이토는 그것이 그의 마지막 기차 여행이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5일 전인 10월 21일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역까지 우편열차를 타고 778km를 달려왔다. 안중근은 그것이 그의 마지막 기차 여행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 제국주의가 남의 땅 위에 건설한 두 개의 철도가 만나는 하얼빈역은 침략과 수탈에 대한 정당한 응징을 하기에 맞춤한 장소였다.
1800년은 산업혁명의 연대기에서 의미가 큰 해다. 제임스 와트가 발명해서 산업혁명을 촉발시킨 증기기관의 특허권이 만료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영국의 수많은 엔지니어들이 특허가 만료된 증기기관 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려는 도전에 나섰다. 그 중에 조지 스티븐슨도 있었다.
당시 잉글랜드 북동부 타인사이드 탄광지대에서 광산 엔지니어로 일하던 스티븐슨은 증기기관을 이용해 철로 위를 달리는 열차를 개발했다. 마침 1825년 스톡턴-달링턴간 석탄 운송용 철도가 완공됐고 스티븐슨이 개발한 증기 기관차를 여기서 시험 운전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철도 시대는 1830년 리버풀-맨체스터 철도가 완공되면서 개막했다. 리버풀-맨체스터 노선을 완공한 철도회사는 기관차 공급업체를 선정하기 위해 ‘레인힐 기관차 경주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이런 공개적인 대회가 열렸다는 것만 봐도 영국이 얼마나 혁신의 열기로 가득했는지 알 수 있다.
참가팀에게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주어졌다. ▷4~6개의 바퀴와 운전 가능한 보일러 압력 장치가 달린 기관차 ▷궤간은 56.5인치(143.5cm) ▷엔진 하나당 비용은 550파운드 이하 ▷기관차 1톤당 3톤의 화물을 끌 수 있어야 ▷70마일(110km)을 평균 시속 10마일(16km/h)로 주행.
이 기준을 통과한 5개팀이 본선에 올랐지만 막상 실제 경기가 시작되니 대부분의 출전 기관차들이 문제를 드러냈다. ‘퍼시비어런스’라는 기관차는 시속이 10km를 넘지 못했고 ‘노블티’는 보일러에 누수가 발생했고, ‘상 파레일’은 실린더가 깨졌다. 결과적으로 시험 구간을 완주한 기관차는 스티븐슨 부자가 만든 ‘로켓’이 유일했다. 로켓은 평균 시속 약 22km로 완주했는데 마지막 바퀴에서는 출력을 최대한으로 높여 시속 48km의 속도로 질주했다. 우승을 차지한 스티븐슨은 상금 500파운드를 받았고 기관차 네 대를 공급하는 계약을 성사시켰다.
1830년 리버풀-맨체스터 철도는 개통과 함께 바로 성공의 속도를 높였다. 1831년, 운영 1년만에 50만명의 승객이 이 철도를 이용했고 투자자들은 배당금까지 두둑하게 챙겼다. 영국에는 철도 건설 열풍이 불었다. 리버풀-맨체스터 철도가 개통한 지 10년이 채 되기도 전에 런던-버밍엄 노선과 브리스틀-사우샘프턴 노선이 완공됐고 1850년경에는 영국의 철도 총 길이가 1만1000km를 넘었다.
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철도 건설을 통한 통일 독일의 가능성을 더욱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베를린을 중심으로 뮌헨, 쾰른 등 독일의 국경도시를 향해 방사형으로 뻗어가는 6개 노선을 구축한다는 구상이었다.
리스트는 이 구상을 직접 실현에 나섰다. 작센 정부를 설득해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을 잊는 독일 최초의 간선 철도를 놓은 것이다. 당시 작센은 20년간 200개가 넘는 공장이 들어서는 등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상황이라 석탄과 상품을 이송할 철도를 도입할 필요성이 컸다. 리스트는 자본금 21만 파운드를 직접 만들어서 철도 공사에 돌입하도록 했다. 리스트는 이 철도가 통일 독일의 간선 노선을 넘어 유럽 철도망의 일부가 되기를 꿈꿨다. 안타깝게도 리스트는 통일 독일은 물론이고 철노 노선 완공도 보지 못하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라이프치히-드레스덴 철도 개통으로 독일 전역이 철도 열풍에 휩싸였다. 이 노선이 독일 지방국가 사이의 경제적 상호 의존성을 높였을 뿐 아니라 철도가 산업 자체를 활성화시킨다는 점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철도를 통한 독일 지방 국가 사이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관세를 줄이고 통관 절차를 간소화 하라는 압력이 높아졌다. 철도가 가져온 경제적 발전과 통합의 필요성이 통일의 결정적인 촉매가 된 것이다. 독일의 철도회사들은 1846년 ‘독일 철도 경영자 협회’를 설립해 관세를 통일함으로써 통일 독일의 초석을 놓았다.
비스마르크는 통일을 위한 전쟁에 철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867년 독일 연방 통일의 주도권을 놓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일어났다. 프로이센의 병사 수는 오스트리아 군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비스마르크는 이런 수적 열세를 철도를 활용한 속도전으로 극복했다. 철도로 빠르게 병력을 이동시켜 7주만에 전쟁을 끝냈다.
비스마르크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와의 전쟁에서도 철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프로이센군은 기차를 이용해서 50만 이상의 병력과 15만여 마리의 말을 국경 지역으로 이동시킨 뒤 거기서 기습 작전을 벌였다. 프랑스의 군대 역시 막강했지만 철도를 이용한 기습 전략에는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 비스마르크는 1871년 프랑스의 상징이자 자존심인 베르사이유 궁전을 점령한 뒤 이곳에서 독일 제국의 통일을 선포했다.
철도 개발을 민간이 주도했던 영국과 달리 유럽 대륙 국가들의 철도는 대부분 정부 주도로 진행됐다. 덕분에 중복 투자를 피할 수 있었고 개발의 속도도 빨랐다. 1830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벨기에는 철도망을 통해 하나의 나라로 일체감을 높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라인강 등 유럽 북부의 주요 수로로 가는 길이 끊어져 독일 서부와의 교역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벨기에 초대 왕 레오폴드 1세는 철도를 통해 대안을 마련하고자 했다. 1836년에 브뤼셀에서 안트베르펜까지 연결하는 철로가 완성돼 벨기에의 주요 교역 루트가 됐다.
유럽 다른 나라들과 달리 프랑스의 철도 개발은 더뎠다. 주변 국가들이 속속 국가 철도망을 완성해 갔지만 1860년대까지 프랑스는 소규모 노선만 드문드문 개통할 뿐이었다. 파리의 지식인들은 철도가 평온과 고요를 깨트릴지 아니면 진보와 발전을 가져올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작가 에드몽 공쿠르는 열차를 타 본 뒤 “열차를 타보면 너무 심하게 흔들려서 그 누구도 생각에 집중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물론 프랑스 지식인 특유의 이런 반대 분위기의 영향보다는 나폴레옹 집권 시절에 확보한 넓게 뻗은 도로망과 내륙 운하가 철도 투자의 매력을 떨어뜨렸다는 점이 더 크게 작용했다.
역사학자 대니얼 부어스턴은 “유럽 철도는 주로 기존 공동체 사회의 하인이고, 미국 철도는 많은 공동체 사회를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본격적인 철도 시대는 ‘볼티모어·오하이오 철도회사’가 1830년 5월 볼티모어에서 메릴랜드주까지 13마일(21㎞)의 철도를 개통하면서 시작됐다. 10년 후 미국 철도의 길이는 5322㎞로 늘어났고 민영기업들이 앞다퉈 철도 건설에 뛰어들면서 1860년대에는 총 연장 4만9000㎞로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를 보유한 나라가 됐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연방 통합의 수단으로 철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남북전쟁 중이던 1862년 대륙횡단철도 건설을 지시했다.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서는 유니온퍼시픽레일로드 회사가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서쪽에서 동쪽으로는 센트럴퍼시픽레일로드가 철길을 놓기 시작했다.
1869년 5월 10일 서부와 동부에서 시작된 센트럴퍼시픽철도와 유니언퍼시픽철도가 유타주 프라먼토리에서 만나면서 미국 대륙횡단철도가 드디어 완성되었다. 두 선로를 잇는 마지막 황금못인 골든 스파이크를 박는 망치질은 유니온퍼시픽의 토머스 듀란트 부사장과 센트럴퍼시픽의 린런드 스탠포드 대표가 했다. 마지막 망치 소리와 함께 대륙횡단 철도 완공 소식이 전신을 탔다.
미국의 여행 역사가인 시모어 던바는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이렇게 기록했다.
“미래의 사람들이 미국이 마침내 하나의 국가가 된 날을 찾으려 한다면, 어떤 선거운동이나 전투의 승패가 결정된 날이 아니라 동부와 서부에서 온 기관차 두 대가 프라먼토리에서 만난 바로 그날을 선택할 것이다.”
대륙횡단철도는 미국 산업의 지형도 바꿔 놓았다. 태평양철도법에 따라 횡단철도에 쓰이는 철강은 미국산만 쓸 수 있게 됐는데, 이에 힘입어 철강 산업이 대약진했다. 이 덕에 피츠버그에서 작은 제철소를 운영하던 앤드류 카네기는 철강왕이 됐다. J.P 모건은 카네기로부터 철강회사를 사들이고 다른 철강 기업들을 합병, US철강회사로 키우는 등 금융자본이 산업을 장악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대륙횡단철도 건설로 대부호가 된 센트럴퍼시픽레일로드의 릴런드 스탠포드 사장은 자신의 아들을 장티프스로 잃는 비극을 겪는다. 슬픔을 이겨내고 아들을 기리기 위해 대학을 설립하는데 그 대학이 바로 스탠포드대학이다. 대륙횡단철도 덕분에 탄생한 대학을 나온 젊은이들은 구글, 야후, 휴렛팩커드를 창업하며 스탠포드대 주변 실리콘밸리를 미국 혁신의 심장으로 만들었다. 오늘날의 실리콘밸리도 철도가 있어서 가능했던 셈이다.
뛰어난 전략과 용맹한 군인, 병사의 수적 우위가 전쟁의 승패를 갈랐던 이전의 전쟁과 남북전쟁은 양상이 조금 달랐다. 남북전쟁의 승패는 군인들의 용맹성이 아니라, 두 지역이 갖고 있는 전쟁 수행 능력에 의해 판가름 났다.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철도였다.
남북전쟁 당시 산업화된 지역인 북부의 철도망은 미국 전체 철도망의 70%로 총연장 3만2186km였다. 반면 농업지역인 남부에 깔린 철도 길이는 1만 4484km에 불과했다, 더구나 철도의 중요성을 간파했던 북부군은 전쟁이 시작된 후 남부의 철도망을 노려, 노선을 파괴하거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북부군은 철도 회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도를 전시 지원체제로 정비했다. 서로 다른 철도 회사의 노선들을 연결해서 후방에서 전선으로 곧바로 연결될 수 있도록 했다. 군대의 운송에 철도 사용의 절대적 우선권이 부여돼 일반 여객이나 화물 열차는 병력과 군수품을 실은 열차가 먼저 지나갈 때까지 대피선에서 기다려야 했다. 북부군은 남부군을 압도하는 철도 인프라로 병사들과 물품을 대량으로 신속하게 동원할 수 있어서 초반의 열세를 극복하고 전쟁을 승리로 전환할 수 있었다.
철도가 보다 더 본격적으로 전쟁에 활용된 것은 1차 세계대전 때부터다. 독일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서쪽의 프랑스, 동쪽의 러시아와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런 상황을 피하려고 노력해왔다. 전쟁광인 나치의 히틀러마저도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후에야 전쟁을 선포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프랑스와 러시아에 거의 동시에 선전포고를 했다.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철도였다.
철도의 기동력에 의지해 독일의 전략을 수립한 사람이 알프레드 폰 슐리펜 장군이었다. 슐리펜 계획에 따르면 독일은 철도의 기동력을 이용해서 프랑스를 먼저 공격해 단기전으로 승리한 다음 병력을 독일의 우수한 철도망을 이용하여 동부 전선으로 이동시켜 러시아와의 전쟁을 벌인다면 역시 승리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을 바로 이 슐리펜 계획에 따라 시작했다.
그런데 슐리펜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 프랑스와 러시아 등 다른 주변국가들도 이미 철도망을 갖추고 있고 이를 전쟁에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경우 ‘17호 계획’이라는 동원 계획을 바탕으로 기차를 이용해 전선에 병력 100만명과 말 40만 필을 성공적으로 운송했다. 러시아 니콜라스 황제 역시 독일군의 공격에 대비해 엇비슷한 동원 계획을 세웠다.
역사학자 A. J. P. 테일러는 독일이 벌인 1차 세계대전을 ‘기차 시간표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유럽 정치가들이 기차 시간표의 힘을 거스를 수 없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테일러에 따르면 전쟁은 기차 시간표에 따라 막이 올랐고, 기차 시간표에 따라 진행됐다.
슐리펜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독일이 기차를 활용하는데 실패만 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성공한 작전이 있었다. 바로 레닌 수송 작전이었다.
적국인 러시아에 혼돈과 혼란을 일으키고 싶었던 독일 황제는 1917년 4월 스위스에 망명해 있던 러시아의 혁명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이 탄 열차가 스위스에서 독일을 지나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 레닌은 스톡홀롬, 헬싱키를 거쳐 당시 제정러시아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잠입할 수 있었다. 레닌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마자 선동적인 연설로 볼세비키 혁명의 불을 지폈다.
철도가 전쟁의 중요한 수단이 되면서 전쟁이 총력전의 양상이 되었다. 그 이전까지 전쟁은 주로 양국의 군대가 대치한 전선에서만 벌어지는 일에 가까웠는데 철도를 통한 수송과 동원이 가능해지면서 국가의 모든 자원이 동원되는 전면전이 됐다.
철도로 시작된 1차 세계대전은 그 마침표도 철도에서 찍었다.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페르디망 포슈 원수와 그 참모들은 전쟁 내내 철로 위의 기차 객차 3량을 참모본부로 활용했다. 사무실 공간이 부족해 1량을 더 추가하려고 식당차를 개조했는데 1918년 11월 11일 이 곳에서 연합국은 독일의 항복 서명을 받았다.
도시들을 잇는 철도가 생기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런던에서 아침 7시에 기차가 출발할 경우 이 기차가 지나가는 도시마다 출발 시간이 달라지게 되고 도착 시간이 언제인지를 확인하는 것도 복잡해졌다. 1847년 영국 철도운임정산소는 그리니치 천문대의 표준시를 ‘철도시간’으로 정했다. 그것이 오늘날 전세계가 함께 사용하는 표준시간이 됐다.
영국보다 땅덩어리가 수십배 큰 미국에는 ‘표준시’의 부재가 더 큰 문제를 야기했다. 1869년 개통된 미국 대륙횡단철도에서 도시마다 출발지 시간과 중간 도착지 시간, 최종 목적지 시간을 모두 다르게 인식했다. 1870년대 펜실베니아 철도회사는 필라델피아 시간을 기준으로 열차를 운행했고 뉴욕센트럴 철도회사는 그랜드 센트럴역의 밴더빌트 시간을 기준으로 열차를 운행했다. 두 회사는 근접해 있었지만, 시간 기준이 통일되지 않아 혼란을 초래했고, 이같은 문제는 철도망이 확장될수록 더욱 심각해졌다.
미국철도연합은 1883년 4월 세인트루이스에서 시간총회를 열고 50여명의 간선철도 경영자들은 각자 회사들이 사용하는 50여개의 시간 표준을 4개로 줄였다. 이렇게 미국의 시간대가 결정됐다.
청일전쟁 후 일본이 중국에서 이권을 독점하려고 하자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이를 저지하기 위한 소위 ‘삼국간섭’에 나섰다. 이들 나라는 그 대가로 중국에 철도부설권을 요구했고 영국, 미국도 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의 연장선인 동청철도와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만주에서 배타적 세력권을 확대해 나갔다. 프랑스는 1895년에 베트남 하이퐁에서 윈난(雲南) 쿤밍(昆明)에 이르는 855km의 철도부설권을 얻었고 독일도 칭다오에서 산둥성을 연결하는 393km의 교제철로(膠濟鐵路)를 부설했다. 영국은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연결하는 구광철로(九廣鐵路)에 이어 독일 자본과 합작해 텐진(天津)에서 포구(浦口)까지 진포철로(津浦鐵路)를 놓았다. 미국도 광저우(廣州) 지역의 광삼철로(廣三铁路) 부설권을 획득했다. 일본은 푸젠성(福建省)과 광둥성(廣東省) 해안의 철도부설권을 얻은데 이어 러일전쟁 후 러시아가 건설한 남만주철도의 남쪽 구간을 빼앗았다. 1911년 기준으로 중국의 철도길이는 9000km에 이르렀고 이중 41%를 외국인이 차지했다.
중국에 철도 열풍이 불면서 청나라 조정은 지방 정부에게 철도 건설을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 지방정부들이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지방정부 자체적으로 철도회사를 세워 주식을 발행하고 여기에 세금을 추가로 투자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쓰촨성의 경우 청두(成都)~우한(武漢)간 1238km의 철도를 건설하면서 120만량의 자금을 조달했는데, 이중 주식 발행분이 20.5%, 세입 77.5%이고, 지방 정부의 투자분은 2%에 불과했다.
수익성에 대한 검증없이 지방정부들이 철도 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1910년경 지방정부 소유의 철도회사들이 파산 위기에 몰렸다. 방치하면 연쇄적인 도산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청 조정은 외국자본을 끌어들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4개국 자본이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자금 지원에 나섰다. 이를 계기로 청 조정은 쓰촨성 소유의 월한 철도와 천한철도(川漢鐵道, 청두~한커우) 국유화를 선언했다.
이 조치가 한족들의 반청감정에 불길을 당겼다. 월한, 천한 철도는 지방정부가 현지 토착자본가들의 출자금과 세수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한족의 민족자본 성격이 있었다. 청 조정의 국유화 조치가 ‘민족자본 vs 외국자본’ ‘한족 vs 만주족’의 대결 구도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가장 먼저 쓰촨성에서 철도 보호운동, 이른바 보로운동(保路運動)이 시작됐다. 여기에 청 조정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청 조정의 실세 위안스카이는 쓰촨성에 밀사를 보내 시위를 격려했고, 쓰촨성 총독서리 왕런원도 주민들의 반대운동을 지지했다. 쑨원이 이끄는 동맹회도 가담했다.
1911년 8월 24일 쓰촨성 청두에는 1만여명의 민중이 집회를 열었다. 청 조정이 우한에 주둔하던 군대에게 이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병사들이 이를 거부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우한 주둔군의 60% 이상이 이미 혁명파로 넘어간 상태였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서 10월 12일 ‘우창봉기’를 일으켰고 두달 사이에 전국 14개 성(省)이 청 제국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이것이 바로 신해혁명(辛亥革命)이었다.
철도는 그 폭에 따라 협궤와 표준궤, 광궤로 나뉜다. 협궤는 보통 1067mm, 표준궤는 1435mm, 광궤는 1524mm와 1668mm다.
철도가 처음 시작된 영국을 비롯해 유럽 국가 대부분과 미국, 한국, 중국 등은 표준궤를 채택하고 있다. 러시아, 카자흐스탄, 몽골, 인도 등 과거 소련의 영향이 컸던 국가들은 광궤를 사용한다. 일본, 이탈리아, 스코틀랜드 등은 표준궤보다 좁은 협궤를 사용했다.
표준궤의 폭은 마차 두 바퀴의 폭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영국이 처음 철도를 깔면서 마차의 폭을 그대로 적용했다는 것이다. 마차 바퀴간 폭에서 시작된 표준궤의 넓이는 우주로 향하는 우주선의 폭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주선을 발사기지로 옮길 때 철도를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사례는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된다.
그렇다면 러시아와 스페인은 왜 영국의 표준궤를 따르지 않았을까? 프랑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침략 때문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프랑스로부터 침략을 당한 기억이 생생한 러시아가 열차를 통한 침략을 막기 위해서 프랑스와 다른 궤간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프랑스보다 10년 늦게 철도를 개통한 스페인 역시 프랑스를 의식해서 폭이 더 넓은 1688㎜의 광궤를 선택했다. 역시 나폴레옹 트라우마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일본의 선택이었다. 일본은 1872년 본국에 철도를 부설할 때 협궤를 선택했다. 그런데 한반도 병탄을 노리고 있던 일본이 1899년 경인철도를 부설할 때는 표준궤를 선택했다. 일본이 이처럼 본국에서와 달리 한반도에 표준궤를 선택한 것은 만주를 넘어 중국 본토까지 침략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1894년 9월 주한 일본군사령관 야마가타 아리모토가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낸 글에서 그 의도가 잘 드러난다. 야마가타는 “부산-의주 사이의 철도는 동아대륙으로 통하는 대도(大道)로서 장래 중국을 횡단하여 인도에 도달하는 철도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반도 철도가 대륙 침략을 위한 것임을 명확하게 규정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 도착한 것도 역시 철도를 통해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안중근 의사의 행동은 조선인의 복수를 너머 더 큰 비극을 막으려고 했던 의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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