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중국]조선 사대부는 왜 하필 명나라를 숭배했나?
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4회>
조선의 숭명 사상, 대체 왜?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조선 왕실과 사대부 집단은 명(明, 1368-1644)을 흠모하고, 존경하고, 숭배했다. 열강에 휩싸여 조선이 망국의 길로 치달을 때까지 조선 왕실과 사대부 집단의 숭명(崇明) 의식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고종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세워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했음에도 퇴위하는 1907년까지 대보단(大報壇)에서 명 황제들에 대한 제사를 이어갔다. 대한제국이 명의 적통을 이은 정통의 중화 제국이란 주장이었을까?
반면 조선 왕실과 사대부 집단은 만주족에 대해서는 경멸감과 적개심을 표출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조선 왕실과 사대부 집단의 심적 보호기제가 작동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만주족에 대한 조선 사대부의 혐오와 경멸에는 오랑캐를 깔보는 한족 특유의 종족적 우월의식이 투사되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중국 전통의 화이관(華夷觀)에 따르면, 동이족(東夷族)이나 만주족(滿洲族)이나 “중국” 밖에 존재하는 변방의 “이적(夷狄)”이란 점에선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 왕실과 사대부 집단은 한족의 관점에서 중화를 외치면서 변방의 오랑캐를 낮춰보는 정신적 굴절을 보였다. 중화 문명의 중심에서 보면, 동이족이나 만주족이나 초록 동색인데, 만주족은 동이족에 치욕을 안겨주었고, 수모당한 동이족은 스스로 중화를 자처하며 만주족을 오랑캐라 경멸하는 기묘한 심리전이 펼쳐졌다.
‘중화’를 외치며 ‘만주족’을 경멸한 ‘동이족’
고려(高麗) 왕조를 무너뜨린 후 명 태조(太祖, 재위 1368-1398)의 책봉(冊封)을 받아 새 왕조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은 조선은 가장 모범적인 조공국으로서 중화의 질서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대표적인 번국(藩國), 곧 제후국(諸侯國)이었다. 조선 유생들은 그러한 명과 조선의 관계를 먼 옛날 주공(周公)이 다스렸던 주(周)나라와 공자(公子)의 고향 노(魯)나라의 관계에 비유하고는 했다.
조선 특유의 소중화 의식에 담겨 있는 이러한 세계관은 일단 중화를 종족이나 지역이 아니라 오직 문화만으로 규정하는 이념적 보편성을 표방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 문제는 그런 식의 비유가 한반도 밖에선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아무리 조선이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와 맹자의 고장)이라 주장하고 중화의 복식을 따르며 중국 땅에서 활개 치고 다녀도 중국 정통 엘리트의 눈에 비친 조선인들은 한낱 동이족(東夷族) 오랑캐일 뿐이었다. 물론 방대한 중국의 사료를 샅샅이 구석구석 뒤지면 여기저기 조선을 칭찬하는 구절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그렇게 힘들여서 발굴된 지엽말단의 자료만으로 과거를 서술한다면 역사 왜곡을 면할 수 없다. 지지율 1% 이하의 대선 후보가 지지자의 얘기만 듣고서 당선을 확신하는 오류와 같다.
중화 질서에 자발적으로 복속한 동이족과 달리 만주족은 이미 북송(北宋, 960-1127)을 무너뜨리고 중원을 지배했던 금(金)나라 여진족의 후예였다. 과거 조상의 포부를 되새기며 중원 정복을 꿈꾸던 만주족은 명말(明末) 혼란으로 뜻밖의 기회가 주어지자 산해관(山海關)을 통과하여 북경을 점령한 후 명나라를 통째로 점령했다. 이에 머물지 않고 만주족은 전통적 중원의 영토를 만주, 몽골, 신장, 티베트 지역과 통합하는 놀라운 업적을 이어갔다. 그들은 제국의 통치자로서 18세기의 태평성세를 여는 저력을 발휘했다.
중원에 쳐들어가 천하를 제패한 만주족을 비웃고 깔보는 한반도 동이족의 심리는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소중화’를 외치던 조선 사대부들은 종족적으로 한족이 아니고 지역적으로 중원에 있지 않아도 조선이 유가 정통의 문화를 실현했다는 자부심을 드러냈다. 반면 청나라를 얕보고 깔볼 때는 그들이 오랑캐 정권이라는 종족주의적 편견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결국 한족에겐 차별받는 동이족이 한족 특유의 종족적 우월의식에 빠져서 변방의 이적을 야만족으로 여기는 기묘한 자기모순이었다.
그러한 이중성은 과연 어떤 심리의 발로인가? 성리학적 근본주의인가? 문약한 변방 지식인의 허장성세인가? 스스로 중화라 부르짖어도 나라 밖에선 그 어떤 나라도 조선을 중화의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유태인 문제에 관한 글에서 “한 인간의 정체성은 내가 아니라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로 결정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조선 사대부의 중화 의식은 변방 지식인의 자의식에 불과했다.
청 제국의 건설이 한창 진행 중이던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조선의 사대부들은 중화 근본주의에 기울어서 조선 특유의 전통문화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예컨대 처녀·총각의 긴 머리 땋기, 성혼한 남자의 상투 틀기, 모계 친척과 외척에 대한 존중 등 조선의 유습을 모두 ‘오랑캐풍’이라며 배격하는 풍조도 나타났다. 예컨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부모의 신주에 현고(顯考)나 현비(顯妣)라 표기하는 풍습도 몽골 원에서 비롯된 오랑캐의 유습이라 비판했으며, 머리 모양도 상투를 버리고 명나라의 화제(華制, 중화 제도)를 따르려 했다.
명나라가 망한 이후 조선 사대부는 더더욱 스스로 중화 문명의 적통을 계승했다고 자부하며 만주족에 대한 경멸감을 표출했다. 물론 조선 왕실이나 사대부나 정치적·군사적으로 압도적 우위에 있는 청 제국의 지배자 만주족 앞에서 그런 감정을 드러낼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모두 한반도 내에서 자기들끼리 대화할 때나 서신을 주고받을 때만 뒤에서 흉보듯 수군거리는 뒷얘기에 불과했다. 공식적으로 조선은 명에 이어 청을 섬기는 제후국의 소임을 충실히 수행한 변방의 모범국으로 남아 있었다.
물론 18세기 중후반 이후 청 제국의 현실을 직접 보고 난 조선 사인들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조선의 세계관을 비판하는 문장을 더러 남기기도 했다. 학자들은 그 점을 집중 조명하여 조선의 사상사가 복잡하고 다채롭다고 주장하지만, 그 시대의 사상적 대세는 이미 숭명반청에 경도돼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조선의 왕실 문서에서는 후기까지도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명나라 조선, ‘유(有)’는 나라 이름 앞에 붙는 허사)이란 국호가 공식적으로 쓰였다. 명나라 황실을 이를 때는 천조(天朝)나 황조(皇朝)라는 극존칭을 붙였고, 명나라의 사신을 천사(天使)라 칭했다. 청조가 들어선 후 명나라 부흥을 외치며 저항하던 남명(南明)이 멸망하여 현실적으로 명조의 부흥이 불가능해지자 조선 왕실과 사대부들은 더더욱 명나라를 드높이고 떠받드는 경향을 보였다.
조선의 숭명 의식에 무슨 보편성이 있는가?
1990년대 이후 한국의 학자들은 일제 식민사관을 청산한다는 목적을 내걸고 “조선 중화주의”라는 용어를 고안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 시대의 숭명 의식과 모화사상은 단순한 시대착오나 사대주의가 아니라 문화적 보편주의와 도덕적 자긍심의 표현이었다. 1998년에는 “조선 중화주의”가 조선을 문화 중심국으로 만든 이론적 근거였으며, “상호 쟁투하는 제국주의를 극복하고 상호 평화 공존하는 새로운 세계질서 형성에 유효한 논리적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칭송한 저명한 국사학자도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조선 중화주의가 “민족정체성 회복”과 “남북통일의 기초가 될 것”이라는 주장까지 했다.
심각한 문제는 그 학자들이 주장하는 조선 중화주의의 구체적 내용이 빈약하다는 점이다. 그들의 논문들을 아무리 뜯어봐도 조선 중화주의의 구체적 콘텐츠가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공산주의라 하면, 만민평등, 계급투쟁, 역사적 변증법,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등의 주장이 있고, 자유민주주의라 하면 자유, 인권, 법치, 권력분립, 국민주권론, 선거 민주주의 등의 구체적인 콘텐츠가 있다. 그렇다면 조선 중화주의는 과연 어떤 주장, 어떤 내용, 어떤 의제를 담고 있는가?
한반도에 왔다는 전설의 인물 상(尙)나라 기자(箕子)에게 직접 유학을 전해 받았기에 조선이 중화의 적통이라는 주장인가? 오랑캐에 정복당한 중국은 만주식으로 변발하고 전통 의상을 입지 않아 더는 중화가 아니라는 말인가? 아니라면, 인의예지(仁義禮智) 등 유교의 가치가 조선에서만 실현됐다는 주장인가? 맹자가 말하는 왕도 정치가 오직 조선에서 구현되었다는 소리인가? 조선에서만 “위로는 군왕부터 아래로는 서민 자제까지 모두가 수신을 근본으로 삼는” 주자학적 이상사회가 실현됐다는 발상인가?
조선 후기가 동아시아 “문화 중심국”이며 “도덕 국가”였다는 일부 학자의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인구의 30~40%를 노비 삼은 나라를 어떻게 도덕 국가라 평가할 수가 있는가? 청나라를 다녀온 박지원(朴趾源,1737-1805), 박제가(朴齊家, 1750-1805) 등 조선 후기 유생들이 조선은 중국에 비해 빈한하고 궁핍하고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나라라고 증언했다. 그러한 조선을 당대 동아시아의 문화 중심국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대체 조선 중화주의의 목적, 가치, 지향, 의제가 무엇인가? 조선 중화주의의 가치는 과연 무엇인가? 그 속에 범인류적 보편성이 있는가?
명의 현실엔 눈감고 명을 이상화한 지적 태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조선 중화주의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숭명 의식이다. 명나라는 바로 얼마 전 조선이 직접 섬겼던 나라였다. 이미 망해버린 바로 그 명나라를 이상화, 실체화, 절대화했다는 점에서 조선 왕실과 사대부 집단의 충성심은 실로 특기할 만하다. 지금도 세계 곳곳의 공산 근본주의자들이 구소련 스탈린의 초상화를 사회주의 혁명의 신전에 배향하고 숭배한다면, 우리는 과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한 학자는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끌어와선 조선 사대부에게 명나라는 역사적 실체가 아니라 “픽션(fiction)”이었다는 변론을 펼친다. 모름지기 픽션의 생명은 개연성이다. 개연성을 상실한 이야기는 픽션이 아니라 지루하고도 뻔한 거짓말이 되고 만다. 개연성을 얻기 위해 작가는 인간의 현실을 깊이 탐구하여 정교하게 작품의 플롯을 짠다.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는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인 픽션이 예술로 승화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조선 사대부가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만들어낸 명나라가 과연 픽션이었나? 다시 말해, 그들이 이상화한 명나라의 형상에 일말의 개연성이라도 있었는가?
만약 명나라가 정의롭고 성스러운 국가였다면 숭명의 보편성이 성립될 수 있다. 문제는 현실의 명나라는 전혀 이상국이 아니었으며, 조선 사대부가 생각하듯 중화의 정통이 구현된 주자학적 질서의 사회는 더더욱 아니었다는 점이다. 단지 몇 가지 역사적 사실만 들어보면, 숭명 사상과 직결된 조선 중화주의는 해체될 수밖에 없다.
첫째, 명 태조 홍무제(洪武帝, 재위 1368-1398)는 조선 유생들이 칭송하듯 지극한 성군(聖君)이 아니라 권력 유지를 위해 수만 명을 도륙한 일면 포악하고 잔인한 군주였다는 사실이다. 둘째, 임진왜란 때 군사를 보낸 명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 재위 1572-1620)는 조선 유생들이 극구 찬양하듯 현명한 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환관에 휘둘리고 여색에 탐닉했으며, 심지어는 조회(朝會)도 거부한 채 국정(國政)을 내팽개친 혼군(昏君)으로 악명이 높았다.
셋째, 조선 유생이 생각하듯 명나라는 주자학적 이상사회가 전혀 아니었다. 명 중엽 이후에는 양명학(陽明學)이 퍼져나가 이미 주자학의 권위는 심각하게 흔들렸다. 명 말기에는 <금병매(金甁梅)>, <수탑야사(繡榻野史)> 등 에로틱 소설이 널리 읽히고 외설스러운 춘화(春畫) 인쇄물이 범람했다. 명나라가 그렇게 탐욕적이고, 현란하고, 음탕하고, 통속적인 사회였음을 알았다면, “천리(天理) 보존 인욕(人欲) 제거”를 부르짖는 조선의 도학자(道學者)들이 과연 명나라를 그토록 흠모하고 숭배할 수 있었겠는가?
넷째, 16세기 이후 명은 멕시코, 페루, 일본 등지에서 생산된 전 세계의 은(銀)을 거의 다 흡수했을 만큼 상업이 발전하고 무역이 성행하던 그 당시 세계화의 허브였다. 조선 유생들이 생각하듯 전통적인 사농공상의 위계질서가 공고했던 사회가 아니었으며, 주자학의 고장은 더더욱 아니었다. 명청 교체기의 사회경제적 격변과 국제정세의 정황을 제대로 알았다면, 조선 사대부들은 결코 명나라를 숭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명나라의 역사적 현실이 그러함에도 대보단과 만동묘에서 해마다 명 황제를 모시는 제사를 올렸다. 17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거의 300년에 걸쳐 조선 왕실과 사대부 집단의 숭명(崇明) 의식은 더욱 강고해지기만 했다. 진정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명나라의 실제 역사를 깊이 탐구하지 않은 채 명나라를 관념적으로 이상화했던 까닭이다. 누구나 유용한 학문을 이루려면 경험 세계를 깊이 탐구하여 일반적 원리와 보편적 법칙을 찾아가는 귀납적 연구를 거쳐야만 한다. 자연현상과 인간 현실에 관한 구체적, 경험적, 실증적 탐구는 없이 ‘리(理)’나 ‘기(氣)’ 같은 거대 관념만으로 우주의 섭리와 인간의 본성을 논해봐야 공리공담(空理空談)을 벗어날 수 없다.
동서양 구분 없이 중세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관념에 빠져서 현실을 외면하는 사변 철학(speculative philosophy)의 늪에 빠져 있었다. 칸트를 원용하자면, 내용 없는 형식의 공허함이며, 유교(儒敎)의 표현을 빌자면, 격물(格物)도 없이 궁리(窮理)로 넘어가는 ‘엽등의 폐단’(躐等之弊)이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지 않고 멋대로 건너뛰는 잘못이라는 이야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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