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 한다" 짜증내던 '30대 금쪽이'…나이든 후 결말이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쓰레기같은 그림" 욕 먹으며
세상과 불화하던 제임스 앙소르
그의 뜨거웠던 젊은 시절
“자네 그림은 역겨운 쓰레기야.”
밤이 깊도록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젊은 화가. 그의 귀에는 아까 낮에 전시회장에서 들었던 비평가와 관객들의 비웃음 소리가 아직도 생생히 들려오는 듯합니다. 화가는 생각합니다. ‘바보 같은 놈들! 나는 천재다. 그것도 젊은 나이에 이렇게 탁월한 그림을 그려낸 최고의 천재라고. 너희들은 그저 내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이야.’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지금 화가의 상황은 그저 우울할 뿐입니다. 그가 작품을 전시할 때마다 비평가들은 폭언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고, 관객들은 “이건 그림도 아니다”라고 욕을 합니다. 자신보다 실력이 못하다고 생각했던 동년배 라이벌은 천재라 불리며 잘나가는데 말이지요. 무엇보다도 가장 문제는 주머니가 텅 비었다는 사실입니다. 같이 사는 어머니는 매일같이 잔소리합니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관광객들한테 팔 수 있는 돈 되는 그림이나 그려!” 문을 쾅 닫는 화가. “아! 내가 알아서 한다고!” 세상은 도대체 왜 나를 몰라주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남자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맺힙니다.
그의 이름은 제임스 앙소르(1860~1943). 앙소르의 젊은 시절은 그야말로 ‘찌질한 청춘’이었습니다. 꿈은 크고 돈과 명예를 갈망하지만 그 무엇도 가지지 못한, 마음속에 자아도취와 자기혐오, 좌절과 치기가 소용돌이치는 답 없는 젊음. 하지만 열정 하나만큼은 그만큼 뜨거웠던, 화가의 그 시절 이야기를 지금부터 풀어 보겠습니다.
‘가면의 도시’에서 태어난 아이
화가가 태어난 곳은 벨기에의 조용한 항구도시 오스텐드. 인구 1만6000명에 불과한 심심한 동네였지만, 여름이 되면 도시는 해수욕을 즐기려는 벨기에 왕실 사람들과 바다 건너편에서 놀러 온 영국 상류층들로 붐비는 관광 명소로 탈바꿈했습니다. 특히 매년 열리는 가면 축제는 벨기에 전체의 명물로 꼽히며 관광객을 끌어모았습니다. 앙소르의 집은 이들에게 여러 기념품과 잡동사니를 파는 일을 했습니다. 조개껍데기부터 축제 때 쓰고 다닐 가면과 의상까지, 집 곳곳에 넘쳐나는 신기한 물건은 어린 앙소르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영국 출신의 신사였습니다. 오스텐드에 놀러 왔다가 이곳 처녀와 결혼해 정착한 사람이었지요. 아버지는 키가 크고 당당한 외모의 소유자였고 음악과 학문에 두루 능한 교양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경제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볼 때 일도 하지 않고 낮부터 술이나 마시며 노닥거리는 아버지는 인생의 실패자이자 우스꽝스러운 술주정뱅이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인 앙소르만큼은 아버지의 마음이 따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아준 건 아버지뿐이었거든요. 아버지는 앙소르가 동네에 있는 화가에게 그림을 배울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앙소르는 점차 재능을 꽃피우며 자신만만한 청년 화가로 자라났습니다. 17세의 나이로 브뤼셀 왕립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공부하게 됐을 때도 그는 자신의 톡톡 튀는 개성을 여과 없이 드러냈습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석고상을 그림으로 그리라는 과제를 받았는데, 얼굴을 분홍색으로 칠하고 머리카락은 적갈색으로 칠한 거지요. 선생님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무식한 놈’이라고 했지만 앙소르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앙소르는 자신을 천재로 여겼습니다. 루벤스 이후 최고의 벨기에 화가라는 자부심이 있었지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다른 누구와도 달랐습니다.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지만 이미 앙소르는 당시 유행하던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에 휩쓸리지 않고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당연히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어야지.’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1883년 스물세 살이었던 앙소르는 자신처럼 젊은 화가 20명과 함께 ‘20인회’를 결성하며 벨기에 미술계의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덕분에 벨기에는 서유럽에서 가장 급진적인 화가들이 모인 곳이 됐습니다. 모네, 쇠라, 르누아르, 세잔 등 인상주의 화가들이 20인회와 함께 전시를 열었고, 빈센트 반 고흐가 생전 유일하게 작품을 판 곳도 20인회와 함께 연 공동 전시에서였습니다. 앙소르가 자신을 상징하는 주제인 가면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입니다. ‘앞으로 내 앞길은 탄탄대로다.’ 앙소르는 생각했습니다.
좌절한 젊음, 가면 뒤로 숨어들다
남들과 다른 길을 걷는다는 건 특별하지만 외로운 일입니다. 앙소르의 길도 그랬습니다. 독특한 화가들이 모인 20인회 중에서도 앙소르의 그림은 유독 튀었습니다.
앙소르는 자신이 젊은 벨기에 예술가들의 지도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료들이 실제로 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앙소르가 좀 이상하고 자기중심적인 인물이라고 여긴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작품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지나치게 특이하다’는 이유로 작품 전시를 거절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앙소르의 작업을 시간 낭비로 여겼고요. 평론가들은 그를 무시하고 조롱했고, 시민들은 앙소르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좌절한 앙소르는 점차 방구석 폐인처럼 변해갔습니다. 다락방 작업실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렸지요. 툭하면 화를 냈고, “나가서 돈이나 벌어 오라”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으면 확 짜증을 내며 자기 집 피아노를 쾅 쳐서 화풀이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 비난을 받으면 갑자기 공격적으로 변해서 며칠이 지난 후에야 진정되기도 했지요.
유일하게 그의 편을 들어주던 아버지마저 1888년 세상을 떠나면서 그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게 됐습니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동료라고 생각했던 20인회마저 앙소르의 탈퇴 여부를 놓고 찬반 투표를 벌였습니다. 일부 화가들이 ‘앙소르의 그림은 너무 이상해서 다른 멤버들의 명예를 실추시킨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내쫓기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남았습니다.
세상과 앙소르의 불화는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마음속 라이벌로 생각했던 동년배 화가 쇠라의 점묘법 그림이 열광적인 인기를 끄는 것도 앙소르를 괴롭게 만드는 요인이었습니다. 그는 쇠라를 “차가운 계산만 있을 뿐 상상력이 부족한 예술이다. 활기도 없고 학술적이다”고 평가했습니다.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지요. ‘내 그림보다 저 그림이 좋다고? 미친 거 아니야? 저 인기를 내가 누려야 하는데….’
앙소르에게 대중은 이해가 불가능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4층에 있는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지칠 때마다 창밖 거리를 내려다보곤 했습니다. 당시 벨기에에서는 집회와 시위가 잦았기 때문에, 앙소르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거나 몰려다니는 풍경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이들에게서 앙소르는 공포와 거부감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충동도 느꼈습니다. 이런 감정은 가면을 쓰고 모여있는 사람을 그린 특이한 작품들로 나타났습니다. 그림 속 군중에게 조롱당하거나 공격당하는 인물은 물론 앙소르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작업실에 작품까지 떨이로 넘깁니다”
앙소르는 여러 기행을 벌였습니다. 이 그림 ‘가면에 둘러싸인 노부인’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원래 이 그림은 아름다운 여성의 초상화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림을 주문한 모델이 ‘마음에 안 든다’며 작품 수령을 거부하자 앙소르는 앙심을 품고 그림에 낙서하듯 덧칠했습니다. 아름답게 빛나던 눈은 멍하게 만들고, 바보같이 보이도록 점을 찍고, 짧은 턱수염까지 그려 넣었지요. 주변 배경은 불길한 가면과 머리들로 채웠습니다. 훗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이 작품은 앙소르 그 자체다.”
그는 평론가들을 두려워하고 미워했습니다. 여러 평론가 중에 앙소르를 특히 심하게 공격하던 두 명이 있었는데, 앙소르는 작품을 통해 이들을 역으로 공격하곤 했습니다. 1891년 작품인 ‘훈제 청어를 두고 싸우는 해골들’이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프랑스어로 발음했을 때 훈제 청어는 ‘아랑 소르’. 이는 ‘아르 앙소르’(앙소르의 미술)과 발음이 비슷합니다. 해골 같은 비평가들에 의해 갈가리 찢기는 자신의 처지를 표현한 거지요.
앙소르가 서른세 살이던 1893년, ‘20인회’가 해체를 결정합니다. 마지막으로 몸 둘 곳마저 사라지자 좌절한 앙소르는 자신의 작업실과 모든 작품을 다 합쳐 8000프랑에 내놨습니다. 요즘 돈으로 수천만 원인데, 부동산까지 합친 가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헐값이었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자 가격을 낮추기까지 했지요. 그래도 여전히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젠 더 물러날 곳도 없는 상황. 앙소르는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그렸습니다. 캔버스·나무·종이·마분지 등 여러 곳에 유화물감·수채물감·초크·색연필 등 다양한 재료를 섞어 그리며 작품마다 독창적이고 새로운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그를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았습니다.
기사의 맨 처음 부분, 면류관을 쓴 예수의 고통과 슬픔을 모티브로 한 작품 ‘비통한 남자’는 화가의 절망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두껍고 불규칙하게 칠한 얼굴은 주름으로 깊이 팬 듯 고통과 분노를 실감 나게 전달합니다. 앙소르는 친구에게 편지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술은 고뇌의 산물입니다. 사실 내 인생은 항상 고통과 환멸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별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살아야지 어쩌겠어요.
그때를 돌아보며
그렇게 답 없는 청춘을 보내고 30대 후반이 된 앙소르. 그에게 성공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자신은 전과 달라진 것도 없는데, 갑자기 앙소르의 작품성을 알아보는 평론가와 관객이 늘어나기 시작한 겁니다. 작품도 잘 팔리기 시작해서 덕분에 앙소르는 마흔이 넘어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어머니에게 효도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점차 그는 부자가 됐고, 세계 각지에서 대규모 전시를 열게 됐고,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 됐고, 급기야는 벨기에 왕에게 귀족 작위를 받고 기념비까지 세워진 데다 프랑스에서 최고 훈장까지 받았습니다. 젊은 시절 처절하게 무시당했던 그가 ‘국민 화가’로 등극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세상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창작의 불꽃은 급격히 시들기 시작했습니다. 작품의 원동력이었던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사라지자 열정이 식고 날카로웠던 센스가 무뎌진 거지요. 지금도 앙소르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것들은 1880~1895년, 한창 어려웠던 20대부터 30대 중반까지의 작품입니다. 이 시기 이후 앙소르의 작품 대부분은 초기 작품의 재탕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화가가 나이가 들며 작품세계를 본격적으로 꽃피우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그래도 별로 상관은 없었습니다. 앙소르는 남은 삶을 별 탈 없이, 악기를 연주하고 글을 쓰는 등 하고 싶은 것들을 적당히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두 하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때때로 자신을 보러 오는 손님과 관광객들을 맞이했습니다. 이렇게 자조하면서요. “20대 땐 나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이제는 나에게 무슨 환상을 품은 것처럼 존경을 보내는구먼.” 세상을 떠날 때 앙소르의 나이는 83세였습니다.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고, 전 벨기에 국민이 조의를 표했습니다. 오늘날 그는 독창적이고 환상적인 색채의 그림으로 파울 클레를 비롯한 후배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폭풍 같은 젊은 시절을 보낸 뒤 남은 긴 삶을 보내며 앙소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래 그림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화가는 독기가 빠진 인자한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려는 건 아닌 듯합니다. 팔레트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이거든요. 대신 화가는 붓으로 젊은 시절 그린 기괴한 가면들을 그리운 듯 가리키고 있습니다. 앙소르는 그림을 그리며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정말 힘든 시간이었다.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 덕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때의 열정이 조금은 그립구먼.’
오늘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걸 보니 여름도 이제 지나가고 있네요. 유난히 덥고 힘든 여름이었지만 곧 가을이 오면 그것도 모두 추억이 되겠지요.
살다 보면 그저 좋은 날이 오기를 바라며 견디는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듯, 앞날이 보이지 않던 앙소르가 하루하루를 그저 죽지 못해 살았듯이요. 독자분들 중에서도 그런 시간의 한가운데 있는 분이 계실 겁니다. 힘든 시기가 지나가고 훗날 지금을 돌아보며, ‘나는 그때 내 인생의 여름을 지나고 있었구나’ 하고 추억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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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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