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대령 보면 드는 기시감…‘제2의 윤석열’ 놓고 말 없는 대통령
윗선 개입 규명 지시 없는 이유는
[주간경향] “지금 이 사건은 중대범죄인 게 맞다. 수사팀 검사들은 (국정원 직원들의) 트위터 글을 보고 상당히 분노했다. 어떻게 민주주의 국가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그런데 (서울중앙지검장에게) 보고드렸을 때, 검찰의 원래 모습이라면 ‘아 이런 게 또 발견됐느냐. 정말 잘 됐다, 수사하자’ 이런다. 하지만 ‘일단 좀 있어봐라’ 하는 것은….”
“(서울중앙지검장은) ‘야당 도와줄 일 있느냐. 정치적으로 얼마나 이용하겠느냐. 정 체포하겠다면 내가 사표 내거든 하라’고 말했다.”
“(강제수사를 하지 말라는) 부당한 지시를 하시기 때문에 그것은 대법원 판례에 의하더라도 따르면 안 되게 되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수원지방검찰청 여주지청장이던 2013년 10월 국회의 검찰 국정감사에 나와 했던 ‘폭탄 발언’들이다. 그해 4월부터 약 6개월간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댓글 여론조작 사건 수사를 이끌었던 윤 대통령은 검찰 수뇌부의 반대에도 국정원 직원들의 집을 압수수색하고 체포했다. 수사를 멈추라는 조영곤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이다. 이후 그는 수사팀에서 배제됐고 1개월 정직 징계를 받았으며, 대구고검 등으로 좌천됐다.
10년 전의 이 사건은 최근 벌어진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의 ‘항명 논란’과 똑 닮았다. 지난 7월 19일 폭우 구조 활동 중 숨진 채모 상병 사건을 수사한 박 대령은 경찰에 수사 결과를 이첩했다가 집단항명수괴 혐의로 보직해임을 당했다. 이종섭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하고 결재까지 받았던 그는 유재은 법무관리관과 해병대 사령관의 ‘사단장 혐의 삭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장관 결재본’ 그대로 이첩했다.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 등 모두 8명에게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두 사건의 주체와 배경을 박정훈 대령→윤석열 당시 수사팀장, 검찰→군, 국정원 댓글 수사→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로 바꿔봤다. ‘윗선 개입에 저항한 수사 책임자에 대한 보복성 처벌’이라는 핵심 얼개가 같다. “2023년의 박정훈은 2013년의 윤석열이다”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 2013년의 윤석열 vs 2023년의 윤석열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 결과의 이첩을 둘러싼 이번 사건은 ‘과거의 윤석열’과 ‘현재의 윤석열’에 대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10년이 흐르는 동안 그의 위치가 180도 바뀌었기 때문이다.
박 대령 측과 국방부 등의 설명을 종합하면,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 결과의 경찰 이첩 과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지난 7월 31일이다. 이날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은 박 대령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대대장 이하의) 직접적인 과실이 있는 사람으로 (혐의를) 한정해야 한다”, “(사건인계서에서) 혐의자와 혐의 내용을 다 빼라” 등의 요구를 했다. 전날(30일)까지만 해도 장관에게 수사 결과 결재를 받고 ‘수고했다’는 말까지 들었던 박 대령 입장에선 당황스러운 전개였다.
‘장관 결재’와 ‘수정 요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야권은 국가안보실이 언론브리핑 자료를 입수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장관 보고가 이뤄졌던 30일 오후 대통령 국가안보실 행정관은 박 대령에게 수사 결과의 ‘장관 결재본’을 요구했다. 박 대령은 ‘수사 중 사안’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어 해병대 정책실장이 같은 요구를 했으나 박 대령은 재차 거절했다. 나중에는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으로부터 “언론브리핑 자료라도 (대통령 국가안보실에) 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박 대령은 마지못해 언론브리핑 자료는 전달했다. 그리고 이튿날 유재은 법무관리관이 구체적인 수정을 요구하는 전화를 해왔다. 이어 낮 12시에 예정돼 있던 수사 결과 언론브리핑도 취소됐다. 박 대령에 따르면, 8월 1일엔 해병대 사령관이 국방부 차관으로부터 온 ‘혐의 내용 빼라’는 문자메시지를 읽어줬다.
박 대령이 폭로한 외압 주체에 윤 대통령이 직접적으로 포함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대통령실의 그림자는 어른거린다. 대통령 국가안보실은 지금까지 공식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국가안보실 관계자는 “국방부 차원에서 수사 결과를 면밀히 재검토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들이지, 국가안보실에 보고돼 수정되는 그런 상황은 없었다”면서 “국방부에서 충분히 설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국방부 입장은 이종섭 장관이 7월 30일 결재를 했다가, 이튿날 자신의 의지로 법무관리관에게 법리 검토를 하게 한 후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 장관은 지난 8월 21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 출석해 국가안보실 연루 의혹에 대해선 “대통령실에서 어떤 지침도 받은 게 없다”고 답했고, 다음날 번복할 거면서 결재를 한 이유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어서 결재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국방부는 아울러 유재은 법무관리관의 발언은 지시나 요구가 아닌 ‘이런 방법도 가능하다’는 설명이었고, 국방부 차관의 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 왜 한마디 말이 없나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명언’으로 유명했던 2013년 ‘검사 윤석열’의 수사외압 폭로. 10년의 세월이 흘러 윤석열 정권에서 당시와 유사한 외압 폭로가 나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과거 윤석열’을 지운 게 아니라면, 윗선 개입 의혹을 명명백백히 밝힐 수 있도록 발 벗고 나서야 하지 않을까.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8월 22일 페이스북 글을 통해 이렇게 꼬집었다. “대통령의 참모들이 (외압) 의혹을 받게 된 이상 당연히 대통령이 나서서 성역 없는 엄정한 수사를 다시 지시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대통령은 단 한마디도 말씀이 없습니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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