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 노래에 무차별 범죄 씨앗이? 세상은 ‘헬터 스켈터’
너무 당연해서 빼먹었던 걸까? 음악 칼럼을 10년 가까이 쓰면서 비틀스 이야기를 한번도 안 했다니. 비틀스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활동을 접은 밴드지만, 나는 20대 초반에 부모 세대의 아이돌 비틀스에 뒤늦게 빠졌다. 1집부터 마지막 앨범까지 다 모으고 전공 공부하듯 비틀스의 역사와 영향을 파헤쳤다. 좋아하는 노래들은 가사를 달달 외우고 독창적으로 재해석해보기도 했다. 비틀스를 주제로 칼럼을 쓰자면 당장 19개 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단 오늘은 이 노래 이야기만 해보겠다. 화이트 앨범에 수록된 ‘헬터 스켈터’.
일상생활에서 거의 안 쓰는 표현인데, 나선형 미끄럼틀이라는 뜻도 있지만 주로 혼란스럽고 정신없는 상황을 뜻한다. 무려 1968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대중음악사에서 묵직한 의미를 지닌다. 이 노래가 헤비메탈이라는 장르의 씨앗이 되었다고 평가하는 평론가들이 많다. 내 생각으로는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레드 제플린과 블랙 사바스의 영향이 더해지면서 헤비메탈이라는 장르가 잉태된 듯하다. 비틀스는 작정하고 이 노래를 내놨는데, 멤버 폴 매카트니가 “세상에서 가장 시끄럽고 지저분한 음악을 만들려고 했다”고 직접 작곡 의도를 밝혔다. 노랫말을 보자.
‘넌 내가 널 사랑해주길 바라지 않니?/ 난 빠르게 무너지고 있지만 너보단 훨씬 나아/ 어서 대답해봐/ 넌 내 연인이 될 순 있어도 무희가 될 순 없을 거야.’
무슨 말인지 아리송하여, 미군 부대에서 군 생활을 할 때 룸메이트 미군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친구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오히려 나에게 되물었다. 넌 노랫말을 다 이해하면서 노래를 듣냐고. 나는 그렇진 않지만 비틀스의 노래는 예외라고 대답해주었다.
제목처럼 노랫말과 연주 모두 혼란 그 자체인 노래 ‘헬터 스켈터’는 역사상 최악의 범죄자 중 하나인 찰스 맨슨에게 억울하게 이용당한다. 어릴 때부터 절도, 강도, 강간 등 끊임없는 범죄로 17년이나 옥살이를 한 그는 떠돌이 청년들을 꾀어 10대 후반 여자아이들 위주로 맨슨 패밀리라는 괴이한 범죄집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헬터 스켈터’ 안에 종말의 날을 예언하는 암호가 숨어 있다고 추종자들을 세뇌했다. 그 결과 앳된 얼굴의 젊은이들이 무차별 칼부림을 비롯한 숱한 범죄를 저질러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일련의 범죄를 보면서 이 노래가 떠올랐다. 처음 보는 또래 여성을 무참하게 살인한 정유정, 신림역에서 또래 남성들에게 흉기를 휘두른 조선, 서현역 흉기 난동 사건을 일으킨 최원종과 공원에서 성폭력 살인을 저지른 최윤종. 서로를 전혀 알지 못했던 이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몇 달 사이에 잇따라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 맨슨 패밀리의 청년들이 그랬듯 이들 역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였고 외톨이였다. 정신 병력이 있거나 감형을 위해 정신병을 들먹인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 뒤로도 또 다른 칼부림을 예고하는 글이 인터넷에 수십, 수백 개 이어졌다. 실제로 흉기 난동을 부리다가 검거되는 아찔한 일도 있었다. 충격받은 우리 사회는 혼란스럽고 정신없는 ‘헬터 스켈터’ 상태다. 정부에서는 경찰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길거리에 장갑차가 등장하고 대치동 학원가를 무장 경찰이 순찰하는 풍경을 보게 될 줄이야.
그런데 경찰력으로 이런 현상을 잠재울 수 있을까? 앞서 언급한 범인들은 모두 20대 청년들이다. 직업도, 사회적 교류도 없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경찰이 밝힌 그들의 진술을 보면, 매일 누추한 방에 스스로 틀어박혀 지옥에 갇혀버렸다고 좌절하고 분노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상황에 놓인 청년들이 전부 칼을 들고 휘두르지는 않지만, 폭발할 가능성이 큰 건 사실이다. 최근 일련의 흉기 난동 범죄는 치안의 문제가 아니라 청년 문제일지도 모른다. 범죄자 본인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아무리 비난해봤자, 그 비난이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해도 범죄 예방에는 도움이 될 리 없다.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지옥에 갇힌 울분을 칼부림으로 해소하는 청년들은 언제 또 나올지 모른다.
사이비 교주들은 성경으로도 악마의 교리를 만들어낸다. 찰스 맨슨 때문에 악한 기운이 깃든 것처럼 오해받기도 했지만, 노래는 죄가 없다. 55년 전에 만들었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멋진 비틀스의 노래를 볼륨 높여 들어보자.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고 느껴지는 요즘 듣기에 이만한 노래가 없다. 제곧휴, 제목이 곧 후렴인 ‘헬터 스켈터’를 따라 부르면서.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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