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촬영 규탄’ 리트윗은 어떻게 계약 종료로 이어졌나 [테크 너머]
어떤 콘텐츠든 세계관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세계적 스타 BTS도, 슈퍼히어로가 날아다니는 마블 코믹스도 저마다의 세계관을 갖고 있다. 세계관은 이 세계가 어떻게 생겨났고 어떤 역사를 지니고 있는지, 이 세계가 당면한 과제는 무엇인지를 담고 있다. 그렇게 세계관이 구성되고 나면, 캐릭터에게도 비로소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목표가 생겨난다. 이러한 세계관은 게임에서 더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게이머들은 게임을 플레이하며 게임의 세계관을 차근차근 이해할 수 있고, 게임 회사에서도 미리 구축해 놓은 세계관을 통해 일관성을 지닌 신규 콘텐츠(이벤트, 시나리오, 아이템 등)를 꾸준히 업데이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에서 세계관은 유저와 게임 회사가 상호작용하는 특수하고 일관된 맥락을 구성한다.
2016년에 설립된 게임 회사 ‘프로젝트문’은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 독특한 세계관으로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프로젝트문이 출시한 게임 〈로보토미 코퍼레이션〉과 〈림버스 컴퍼니〉 등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 세계관의 핵심 주체는 바로 '회사'다. 이 세계 안에서 회사들은 저마다 ‘날개’라 불리며 자신의 둥지를 안전하게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회사가 관여하지 않는 ‘뒷골목’은 눈 깜짝할 사이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전쟁터다. 둥지에 있어도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회사들은 둥지 안의 직원과 거주민을 보호한다. 게임을 시작하면 유저들도 회사의 관리자로서 취임한다. 그리고 소속 직원을 지휘하고 성장시키며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그러나 프로젝트문의 세계관과 달리 현실 속의 프로젝트문은 직원을 보호하지 않았다. 지난 7월26일, 프로젝트문은 소속 작화가와 계약을 종료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해당 직원이 일을 못하거나 근태가 나빠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계약 종료의 배경에는 개인 SNS가 있었다. 〈림버스 컴퍼니〉 내 여성 캐릭터가 (비키니가 아닌) 전신 수영복을 착용한 것에 대해 일부 유저들이 작화가의 사상 검증이 필요하다고 나섰고, 급기야 자기들이 직접 작화가의 개인 SNS를 수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개인 SNS에서 이미 삭제된 포스팅을 복원하는 사이트까지 이용해 기어코 몇 가지 트윗을 찾아냈다. 불법 촬영 범죄 규탄 시위와 페미니즘에 관한 게시물이었다. 이는 작화가가 프로젝트문 입사 전에 게시되었을 뿐 아니라 이미 삭제된 상태였고, 그중 작화가 본인이 직접 쓴 트윗은 하나도 없었다. 작화가가 과거에 공유했거나 멘션으로 태그된 것이었다.
‘삭제된 SNS 기록’으로 민원 낸 일부 유저
유저들이 작화가의 SNS를 뒤지기 전부터 이미 〈림버스 컴퍼니〉에 대한 불만은 어느 정도 누적된 상태였다. 실상 수영복 자체에 분노한 유저는 소수였다. 다른 이들은 도리어 여성 캐릭터에게 비키니가 아니라 전신 수영복을 입힌 것이 세계관에 더 적합하다는 입장을 고수하던 중이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림버스 컴퍼니〉의 확률형 아이템과 전체적인 캐릭터 밸런스에 있었다. 프로젝트문은 이전까지는 게임 자체를 판매하는 형태로 게임을 출시했는데, 후속작인 〈림버스 컴퍼니〉에서는 부분 유료 결제와 확률형 아이템 등이 도입되었다. 확률형 아이템이란, 필요한 아이템을 바로 구매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아이템을 랜덤하게 획득하는 방식이다. 이 때문에 유저들에게는 원하는 걸 얻으려면 유료 결제를 더 많이 해야 하는 금전적 부담이 지워졌다. 이에 더해 7월 업데이트 이후 기존 캐릭터의 균형이 깨지면서 게임 진행을 위해 추가 아이템을 구매해야 하는 상황이 겹치며 유저들의 불만이 폭증했다. 특히 프로젝트문의 게임 세계관에 매력을 느껴 입문한 기존 패키지 게임 유저들에게는 금전적 부담이 더 가중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복합적으로 쌓여 있던 불만은 어느 순간 작화가 한 사람을 향한 비난으로 급격히 전환됐다. 회사가 귀 기울여야 하는 민원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못한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여러 민원 가운데 하나로 유저들이 여성 작화가의 삭제된 SNS 기록을 파헤쳐 내밀었을 때, 회사는 그 어처구니 없는 민원에 대응하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민원을 수용했고, 작화가에게 계약 종료를 통보했다. 이 사건은 급격히 퍼져나가 8월3일 경기청년유니온 주최로 프로젝트문의 행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열리기도 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프로젝트문은 자신들이 작화가에게 어떠한 사상 검증도 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그 말은 사실이다. 사상 검증은 유저들이 했다. 민원을 낸 유저들은 작화가의 SNS를 뒤지며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 찾아내고, 더불어 그의 ‘사상’이 게임 내 일러스트 작업에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문제 소지가 있다며 유저들에게 지적된 작업물들은 “세계관을 표현하기 위해 같이 만든” 것으로 회사 차원에서는 아무 문제 없다고 발표됐다. 초반에 수영복 등 유저들이 문제 삼았던 일러스트도 해당 작화가의 작업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들이 주장한 ‘사상’은 작업물과 연관성이 없었고, 그 ‘사상’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고작 몇 가지 포스팅이 수년 전 공유되었다가 지금 이미 삭제된 것이었지만, 휴지통에 버려진 포스팅까지 그러모아 징계의 근거로 제출된 것이다.
게임업계에서 여성 노동자를 향한 ‘사상 검증 사건’은 반복되었다. 프로젝트문은 이 같은 사상 검증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유저들의 사상 검증을 용인하고 그 결과를 수용한 책임이 있다. 프로젝트문의 디렉터는 개인의 SNS가 회사와 연관되지 않게 해달라고 사전에 당부했다고 입장문에 밝혔다. 그러나 회사와 개인 SNS의 연관성이 생긴 건 작화가의 잘못이 아니다. 아무런 연관이 없었던 일에 ‘연관’을 만들어낸 건 작화가가 아니라, ‘사상 검증’을 하기로 작정한 일부 유저들이었다. 이번 선례를 만든 유저들에게도 이 사건은 곧 자신들의 족쇄가 될 것이다. 앞으로 그들이 취업할 회사의 고객들이 그들이 작성한 커뮤니티의 게시물을 열람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삭제한 게시물마저 '계약 종료' 사유로 올릴 수 있다면. 어떤 ‘사상’을 검증해야 하는지는 전적으로 고객의 관할이며, 그의 ‘기분’에 달려 있게 된다.
〈림버스 컴퍼니〉의 참혹한 세계관은 프로젝트문과 그 유저들의 모습을 빼닮았다. ‘둥지’ 안에는 민원을 제기하는 유저들만 있을 뿐, 유저와 회사가 합심하여 죄 없는 직원을 둥지 바깥으로 밀어내고 나 몰라라 하는 모습이. 이들이 안팎으로 쌓아올린 세계는 ‘디스토피아’ 그 자체다. 역설적으로 이 게임의 ‘세계관’을 유저들과 회사가 완성시킨 셈이다.
조경숙 (테크-페미 활동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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