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이제 K밥이다…한식의 ‘넥스트 레벨’
미국의 대형 식료품 체인 트레이더조스에서 인기몰이 중인 신제품이 있다. 바로 ‘김밥(KIMBAP)’이다. ‘한국 두부와 채소, 김으로 만든 라이스롤’이라는 설명이 붙은 김밥은 한 줄(9개) 3.99달러라는 합리적인 가격, 두부·당근·우엉 등으로 만든 채식, 냉동식품임에도 맛있다는 호평이 소셜미디어 등에 쏟아지며 품절 사례를 이어가고 있다. 폭발적 인기로 판매 물량이 동나 일부 매장에서는 11월까지 구하기 힘들다는 얘기도 돈다. 해당 마트 냉동식품 코너에는 김밥 외에도 잡채(JAPCHAE), 떡국떡(Sliced Korean Rice Cakes), 떡볶이(Tteok Bok Ki), 파전(Pa jeon·Scallion Pancakes), 불고기가 들어간 김치볶음밥 등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0엔빵, 김치 케사디야, 김치 프라이(감자튀김에 볶음김치와 사워크림을 더한 요리), 불고기 치즈 스테이크 샌드위치, 고추장 파스타, 카사바 맛탕….’ 한식이 글로벌 식문화와 어우러져 현지화되며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감 좋은 미국 셰프들은 일찌감치 고추장(Gochujang)을 차세대 트렌드 소스로 점찍었고 일본 젊은이들은 한국의 맛에 사로잡혀 엄청난 대기 줄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한식 세계화 홍보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알려지지 않았던 떡볶이도 ‘BTS 최애 간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공동체 음식’ 한식, 일본을 저격했다
한국 음식 칼럼니스트 핫타 야스시는 1995년 한국 유학을 계기로 한식의 매력에 푹 빠져 한식 관련 집필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한국 가면 이거 먹자(韓國行ったらこれ食べよう)> <한국 엄마의 맛과 레시피(韓國かあさんの味とレシピ)> 등 다수의 한식 관련 서적을 출간했다.
핫타는 “한식은 쌀을 주식으로 하고 된장, 간장 같은 발효 조미료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일본 식문화와 비슷한 부분이 많아 낯설지 않다. 반면 육수, 고추 향신료, 섞어 먹는 복합적인 맛을 추구하는 등 다른 지점이 있어 신선한 발견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한식의 인기 요인을 두고는 전골, 불고기처럼 여럿이 둘러앉아 먹는 음식은 일본에는 없는 문화라는 점을 지목한다. 그는 “음식을 통해 긴밀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과 한방 재료, 향신료를 사용해 건강하면서도 에너지 넘친다는 점이 일본인의 마음을 저격한 이유”라고 말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한식은 재일교포들의 요리를 통한 현지화 역사가 그 어느 나라보다 깊다. 김치는 일본식 육수와 단맛을 추가하고 소송채 등 일본 채소를 활용해 기무치로 재탄생했다.
“함흥냉면은 일본 밀가루로 만든 모리오카(盛岡) 냉면이 됐고요. 참기름 기반의 드레싱은 ‘초레기사라다(チョレギサラダ)’라고 하는데 ‘절이’의 경상도 사투리인 ‘재래기’가 일본에 정착되면서 초레기가 됐어요. 초레기라는 이름으로 시판용 드레싱이 나오고 있죠.”
몇년간 치즈 닭갈비가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인기를 끌었다. 매운 양념으로 버무린 닭갈비를 치즈 퐁듀에 찍어 먹는 닭갈비의 변형 음식이다. 요즘에는 모든 고기구이(소고기, 닭고기, 양고기)를 통칭하는 ‘교푸사루(ギョプサル)’가 인기다. 한국 고기구이의 대명사 ‘삼겹살’에서 유래한 용어다. 우롱차와 위스키를 섞어 마시는 우롱하이를 즐기던 이들이 요즘은 한국식 옥수수차와 위스키의 조합인 콘챠하이(コ-ン茶ハイ)를 마신다.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식 빵이 있다. 10엔 동전 모양을 그대로 재현한 10엔빵은 ‘2023년 봄 고교생 최신 트렌드 랭킹’ 음식 분야에서 1위를 차지했다. 즉석에서 구운 빵 안에 모차렐라 치즈가 들어 있는 것이 딱 경주 명물 ‘십원빵’을 연상시킨다.
“10엔빵은 경주의 십원빵을 일본용으로 재해석한 상품이죠. 젊은이들이 줄을 서고 있다면 어김없이 10엔빵집이에요. 지난해 말부터 유행이더니 대히트를 치고 있습니다. 도쿄 신오쿠보에는 100엔빵, 500엔빵까지 다양한 종류가 나와 있더라고요.”
일본에서는 10엔빵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지만 정작 원조 ‘경주 십원빵’은 한국은행이 디자인 저작권 제동을 걸어 기존 디자인을 변경하는 등 대안을 찾고 있다. 같은 듯 다른 두 나라의 차이로 인해 이색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핫타는 일본 젊은이들의 음식문화가 한국의 최신 트렌드를 점점 따라가는 추세라고 덧붙인다.
한식, K콘텐츠를 타고 힙해졌다
“Did you know that ‘ssam’ means ‘wrapped’ in Korean?”(쌈이 한국어로 포장을 의미한다는 것 알고 계셨나요?)
미국 시카고의 웨스트루프 지역 레스토랑 프록시(Proxi)의 공식 사이트에서는 신메뉴 상추쌈을 이렇게 소개한다. 프록시는 미쉐린 스타를 받은 셰프 앤드루스 자매가 운영하는 퓨전 파인 다이닝으로 그동안 태국이나 베트남 퓨전요리를 내다가 최근 돼지고기와 쌀밥, 김치, 쌈장을 곁들인 상추쌈을 메뉴에 추가했다. 한국 바비큐와 함께 한국 상추쌈(korean lettuce wraps)으로 알려진 쌈은 건강식으로 입소문을 탔다. 기본 쌈 외에도 엔다이브 위에 토핑을 얹는 샐러드처럼 먹거나, 멕시코 타코처럼 각종 부재료를 쌈채소에 올려 즐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며 ‘김치마리(Kimchmari)’라는 닉네임으로 한식 블로그를 운영 중인 이진주씨는 “아시아 퓨전 레스토랑에서 요즘 불고기부터 고추장, 김치를 베이스로 한 한식을 메뉴에 추가하는 것이 트렌드”라고 전한다. 그는 고추장도 ‘핫하다’고 강조했다.
“미국 구글에 ‘Gochujang Pasta’(고추장 파스타)를 쳐보세요. 다양한 레시피가 나올 거예요. 글로벌 음식의 나라 미국은 항상 새로운 맛을 찾고 있지요. 2014년경부터 미국 셰프들이 고추장을 주목하기 시작했어요. 그때까지 최고 인기 소스는 베트남인이 만든 스리라차 소스였죠. 셰프들은 그다음 트렌드는 ‘고추장’일 거라고 점찍었어요.”
스리라차의 신맛이 없고 발효에서 오는 깊은 매운맛이 더해진 고추장은 다양한 요리에 쓰이며 유행을 타고 있다. 이씨는 “동네 미국 마트에서도 고추장을 쉽게 살 수 있을 정도”라고 말한다.
또 최근에는 불고기 라이스 볼(Bulgogi Rice Bowl)이라 불리며 비빔밥도 웰니스 식품으로 유행이라고 한다. 여러 채소를 토핑으로 얹고 고추장 소스로 비벼 먹는 메뉴를 파는 음식점도 많이 늘었다.
“지역마다 인기 있는 한식의 편차가 있어요. 제가 사는 캘리포니아는 멕시칸 음식이 워낙 인기가 있기 때문에 한식과 멕시칸 퓨전이 많은 편이에요. 김치 케사디야, 불고기 브리토가 인기예요. 어떤 지역에서는 한국식 핫도그가 엄청나게 인기라고 하더라고요.”
또 다른 한식 블로거인 ‘비욘드 더 김치(Beyond the kimchi)’의 김혜경씨는 미국의 어느 몰이나 백화점 식당가를 가도 한식당은 늘 붐빈다고 전한다. 그는 유명한 필라델피아 치즈 스테이크 샌드위치 가게에 한식 퓨전 메뉴가 생긴 것에 주목했다.
“미국 전통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 필라델피아 샌드위치 가게에 ‘불고기 치즈 스테이크 샌드위치’가 생겼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어요. 소고기에 불고기 양념을 하고 김치 슬라이스, 마요네즈, 고추장을 넣은 샌드위치인데 미국인들이 거부감 없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세상이 오는구나’ 싶었어요.”
두 한식 블로거 모두 미국인들이 한식을 주목한 이유를 K콘텐츠의 영향이라고 꼽았다. 이씨는 “2010년 블로그를 시작할 때만 해도 한국 교포가 주 구독자였지만 지금은 전 세계에 구독자가 있다”며 “정작 나는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보지 않는데 ‘<일타스캔들>에 나오는 도시락 반찬이 뭐냐’는 질문을 받고 거꾸로 드라마를 봐야 하는 일들이 종종 생긴다”고 말한다.
김씨는 “과거에는 한국 입양인이나 한국에서 군 복무를 한 미군들로부터 ‘그리운 맛’에 대한 레시피 질문이 많았는데 지금은 한국 드라마, K팝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많이 블로그를 방문한다”고 전했다. <오징어 게임>이 흥행했던 때는 달고나 만드는 법에 대한 문의가 쇄도했다.
쫄깃쫄깃한 떡 식감을 좋아하지 않기로 유명한 미국인들이 떡볶이를 별미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도 이채롭다. 글로벌 동영상 소셜미디어에서는 떡볶이 리뷰가 인기 콘텐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지화 전략이 주효했다
떡볶이로 동남아시아의 입맛을 잡아낸 국내 기업도 있다. 떡볶이 프랜차이즈 ‘두끼’다. 두끼는 베트남, 필리핀, 대만, 태국 등 8개국 146개 지점을 운영 중이다. 철저한 현지화 전략 덕이다. 떡의 식감을 선호하지 않는 외국인들의 기호를 파악하고 내놓은 것이 가래떡 대신 파스타와 흡사한 가늘고 긴 떡이다. 국가별로 선호하는 식재료도 달랐다.
“베트남은 피시볼과 해산물을 더 배치하고, 훠궈 문화에 익숙한 대만은 추가금으로 고기를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게 했어요. 태국은 크랩 튀김, 파인애플과 수박 같은 신선한 과일을 제공했습니다.”
로컬 식자재를 이용한 새로운 메뉴도 개발했다. 카사바로 유명한 인도네시아 매장에는 고구마 맛탕 대신 카사바 맛탕이 있다. 메뉴는 현지화하되 K푸드 매장이라는 정체성을 곁들어 한국어 인사는 기본, 음식 설명에 한국어를 병행하고 있다. 북미 시장 진출도 앞두고 있다. 두끼 측은 요즘 미국에서 인기 있다는 ‘회오리 감자’를 메뉴에 넣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매년 세계 각지에서 ‘한식요리 경연대회’를 개최하고 있는 한식진흥원은 “해산물이 풍부한 태국에서는 요즘 피시 소스로 간장게장을 만드는 것이 인기”라고 전했다. “과거에는 비빔밥, 불고기 등 전통 한식을 그대로 해외에 선보였다면 이제는 한식이 현지 입맛에 맞춘 음식으로 더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다”며 “한식의 현지화는 진입 장벽을 낮추고 한식이 글로벌 대중화되는 데 중요한 지점”이라고 짚었다.
이유진 기자 88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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