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된 구옥을 목공방으로…버리고 버려도 세월이 쏟아졌다 [ESC]

한겨레 2023. 8. 26.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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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송호균의 목업일기]송호균의 목업일기
창업의 시작 ‘공방 꾸미기’
몇년 전까지 노부부 살던 살림집
아내 ‘괸당’ 도움 덕 거의 공짜로
그릇·이불 등 치우고 또 치우기
살림살이로 가득한 구옥을 ‘목공방’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비워내는 일이 시급했다. 잡동사니를 내다버리는 건 기나긴 창업 과정의 시작이었다. 송호균 제공

목공을 배운다고 해서 누구나 창업을 하게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취미’의 영역에서, 많고 많은 교육공방의 ‘회원’으로서, 즐기고 배우면서 목공의 세계를 천천히 알아나가면 된다. 창업의 길을 선택하는 순간 너무나 많은 것이 바뀐다.

취미를 직업으로 삼고 싶은가? 차분하게 생각해보자. 당신의 고된 일상 속에서 잠시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곤 했던 일종의 ‘도피처’가 고스란히 그 일상의 영역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러므로 다음의 질문이 가장 중요하다. 그 일은 ‘여전히’ 즐거울 것인가?

창업 과정에선 이 부분을 별로 생각해 보지 못했다. 모든 게 너무 갑자기, 순식간에 진행됐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출근길이 행복한 걸 보면, 창업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다행이다. 스승의 공방 ‘레진우드’에서 도제로 일하던 시절, 독립을 꿈꾸긴 했다. 언젠가는 내 공간에서 나만의 작업을 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수준이었다.

“여보, 이 공방은 당신 것이오”

망설이던 내게 스승이 먼저 용기를 줬다. “창업해도 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말에 큰 자신감을 얻었다. 하지만초기 투자비용이 너무 크다면 진행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제주에 내려온 이후 직장에 다니며 가계를 지탱하는 역할은 아내가 해오고 있었다. 아내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면서까지 공방을 열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저렴한 비용으로 ‘공간’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공간이 나타나지 않으면 창업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비용이나 소음 등의 문제로 도심 안에 있는 상가 등은 배제했다. 제주에선 오래된 귤창고 등을 개조해 상업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하는데 최소한의 임대 기간만 채우고 비워줘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끈질긴 노력과 정성으로 공간을 리모델링한 수고는 보상받기 어렵다. 그렇다고 땅을 사서 새로 건물을 올릴 수도 없는 일. 제주 말로 ‘괸당’이 아니면 좋은 조건으로 공간을 구하는 건 어렵다고 생각했다.

괸당은 혈연관계에 기초한 일종의 ‘이너써클’이다. 요즘은 부작용도 많다고 하지만 괸당 문화는 육지에 의한 수탈의 역사 속에서 제주인들이 생존을 위해 선택한 삶의 방식이었다. 살려면 서로 뭉치고 도와야 했다. 부정적으로 볼 일만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다 이 집을 만났다. 서귀포 효돈동에 있는, 낡았지만 2차선 도로를 접하고 있는 구옥이다. 아내와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분의 부모님이 살던 곳인데, 몇 년 전부터 비워놓은 상태였다. 57.9㎡(17.5평)의 공간에 외장도 깨끗했다. 집 뒤로는 아름다운 월라봉이 자리잡고 있다. 대대적인 내부 공사를 해야 할 터이지만 어쨌든 상태는 좋았다. “아유 홍 과장(아내)님이 보증금이죠 뭐. 편하게 쓰세요.” 집주인의 따님이자 아내의 동료는 시원시원했다. 계약기간 4년에 원상복구 의무 없음. 보증금 없고 연세(제주에서 임차인이 한번에 내는 1년치 임대료)는 자세히 밝히긴 어렵지만 ‘거의 공짜’라고 해 두자. 이런 환상적인 조건이라니. 어느새 당신도 괸당이 되었구려. 그 뒤로 종종 아내를 ‘홍괸당’이라고 불렀다. 여보, 홍괸당. 이 공방은 당신 것이에요. 열심히 만들어 볼게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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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옥에서 변신한 ‘나무공방 쉐돈’의 외부 전경. 송호균 제공

수납장 열 때마다 떨리던 손

공간이 나타났으니 뭐라도 해야 했다. 포대 100장 묶음과 대용량 쓰레기봉투, 코팅장갑 한 뭉치를 샀다. 어차피 필요할 것 같아 장도리(빠루) 한 자루와 뭔가를 긁어서 벗겨내기 위한 스크래퍼 두 종류도 샀다. 지은 지 40년 된, 17.5평짜리 구옥. 오래된 벽지에선 눅눅한 세월의 냄새가 났다. 이 집을 작업이 가능한 목공방으로 바꿔가는 동안, 사야 할 물건과 장비 목록을 어림잡아보니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지만 일단은 이걸로 됐다. 문을 열고, 바닥에 짐을 던져두고, 집안을 천천히 돌아봤다. 어디를 봐도 물건, 물건,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집주인은 “모든 것을 임의로 처리해도 좋다”고 했다. 철거업체에 한꺼번에 맡겨도 되겠지만, 최소한의 비용과 최대한의 셀프 시공이라는 애초의 목표를 생각하면 일단은 비워내야 했다.

부엌에서 시작했다. 금속제와 유리, 소형가전, 일반쓰레기를 나눠 담기 시작했다. 금속제 밥그릇과 국그릇, 수저세트가 수북이 나왔다.일회용 나무젓가락도 끝없이 쌓여 있었다. 그저 종류별로 나눠 담을 뿐이었다. 담고, 옮겼다. 담고, 또 옮겼다. 이게 뭔 일인가 싶었지만, 이건 앞으로 이어질 끝없는 단순 반복 노동에 비하면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걸 나중에 깨닫게 된다.

오래된 벽지도 시험 삼아 뜯어봤다. 벽지와의 사투는 따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유리문에 부착돼있는, 세월이 너무 지나 삭아버린 필름은 물을 뿌려 벗겨내기도 했다. 여튼 본격적인 벽체 철거작업이 시작되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갔다.

다행스럽게도 남아있는 음식물은 별로 없었다. 다만 수납장마다 쥐똥이 그득해서 문을 열 때마다 긴장했다. 혹시라도 살아있는 쥐가 튀어나오거나 동물의 사체같은 게 들어있는 건 아닐까. 수납장을 여는 손은 가늘게 떨리곤 했다.

장롱 안 오래된 여성용 가방들과 이불에선 곰팡이가 피어올랐다. 옛날식 붙박이장에는 바래다 못해 핑크빛이 돼버린 신문지가 깔려 있었다. 1992년 7월10일치 조선일보였는데, 폐지 재활용을 다룬 전문가 대담이 실려 있었다. 대담자 중에는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도 있었는데, ‘공해추방운동연합 의장’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당시 이 신문은 “신문지를 모읍시다”라는 모토로 폐지 재사용 캠페인을 진행 중이었고, ‘폐지 회수율 66% 달성’을 목표로 신문지 수거 봉투를 제작해 배포했다고 한다. ‘종이신문’이 가장 강력한, 그리고 가장 널리 읽히는 뉴스매체였던 시절이다. 윤전기에서 나온 신문뭉치가 그대로 폐지로 되팔려가는 요즘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먼지가 풀풀 피어나는 방바닥에 앉아 잠시 쉬면서, 빨간 장갑을 낀 손으로 신문을 읽었다. 이 지면이 2022년 5월 서귀포 효돈의 구옥에서 발견된 것도 캠페인의 성과라면 성과일까. 끝없는 상념을 뒤로 하고 치우고, 또 치웠다. 비우고 또 비웠다. 쌓여가는 포대를 바라보자 막막함이 앞섰다. 이 공방, 잘 만들 수 있을까?

나무공방 쉐돈 대표

한겨레 기자로 일했다. ‘이대로는 도저히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내기 어렵다’고 생각해 2016년 온 가족이 제주도로 이주했다. 본업은 육아와 가사였는데, 취미로 시작한 목공에 빠져 서귀포에서 목공방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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