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가장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은 굶주린 사람...식량 위기, 한국도 안전지대 아니다"

허경주 2023. 8. 26.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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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식량 전문가·전 WFP 연구원
"20년만 최악의 식량 위기 올 수도"
식량난, 정정불안, 국제 분쟁도 불러
지난 6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시민들이 쌀을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 기후변화와 이에 따른 쌀 생산량 감소, 인도 등 주요 수출국의 수출 제한으로 쌀 대부분을 외국에서 수입하는 필리핀이 타격을 입고 있다. 마닐라=EPA 연합뉴스

아시아의 주식인 쌀 가격이 심상치 않다. 지난 10일 세계 곡물 시장에서 2008년 이후 15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급등했다. 지난해보다 50% 올랐다. 이상 기후로 생산량이 줄었고, 주요 수출국이 자국 식량보호를 위해 수출량을 크게 줄였기 때문이다.

연일 경고음이 울리지만 한국에선 '남의 나라 얘기'로 치부한다. 폭염·폭우 같은 기후 위기는 피부로 느껴지지만 식량 위기는 실감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한국 역시 식량 위기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경고했다. 아시아 최고의 식량안보 전문가로 꼽히는 폴 텡 싱가포르 난양공대 비전통 안보연구 센터 교수유엔 산하 세계식량계획(WFP) 기후 재해 위기대응 선임 어드바이저를 지낸 카튜사 파라 박사는 한국일보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기후 위기의 종착점은 식량 위기”라며 “세계인의 식탁뿐 아니라 인류의 생존까지 위협하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폴 텡 싱가포르 난양공대 비전통 안보연구 센터 교수.

‘쌀 부족’ 둘러싼 총성 없는 전쟁

①올해 3~5월 아시아에 역대급 폭염이 덮쳤다. ②무더위를 우려한 농민들은 파종 시기를 늦췄고, 뒤늦게 싹을 틔운 벼 역시 뜨거운 열기에 생장이 더뎠다. ③하반기 엘니뇨(동태평양 적도 부근 해수면 온도 상승)까지 발생하면서 경작지가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졌고 폭우와 홍수가 벼를 고사시켰다. 텡 교수가 요약한 쌀 부족 현상의 발생 이유다.

곡물 생산 벨트를 강타한 이상 기후는 식량 보호 무역주의를 부추겼다. 세계 쌀 수출의 40%를 차지하는 인도는 지난달부터 쌀 수출을 제한했다. 7억 명에 달하는 취약 계층에 값싼 먹거리를 제공할 수 있도록 대비한다는 이유에서다. 10월부터는 설탕 수출도 금지한다.

텡 교수는 “2015~2016년 엘니뇨가 발생했을 때는 동남아시아 쌀 생산량이 직전 2년보다 1,500만 톤 감소했다"며 "이상 기후가 더 잦아지고 올해 폭염·폭우를 동반한 ‘슈퍼 엘니뇨’까지 예고되면서 20년 만에 최악의 식량 위기가 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식량을 둘러싼 총성 없는 전쟁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했다.

10일 태국 방콕의 한 쌀 가게에서 주인이 쌀을 퍼 담고 있다. 방콕=AP 연합뉴스

쌀에 미래마저 위태로운 저소득국

직격탄을 맞은 건 수입 식량 의존도가 높은 저소득국가들이다. 필리핀·방글라데시 등은 인도·태국에서 쌀을 대거 수입해 왔다. 나이지리아·라이베리아 등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도 인도산 쌀 의존율이 80%에 달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에 따른 밀 공급 부족을 저렴한 수입쌀로 채워 왔지만, 쌀 가격이 오르면 대체재가 없다. 텡 교수는 “쌀은 동남아·아프리카인 총 칼로리 섭취량의 70%를 차지한다"고 지적했다.

식량 부족은 국가의 미래까지 위협한다. "식량 가격이 오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빈곤선 아래로 밀려난다. 어린이는 영양 결핍에 따른 발육 부진을 겪고, 생존이 급급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다. 이는 국가적 큰 손실로 이어진다”는 게 파라 박사의 분석이다.

올해 쌀 경작지가 가장 큰 타격을 입으면서 쌀이 주목받았을 뿐 다른 농산물·수산물·축산물 역시 기후 위기 앞에 위태롭긴 매한가지다.

지난해 10월 라이베리아 몬로비아에서 시민들이 쌀을 구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라이베리아는 인도산 쌀을 주로 수입하는데, 인도의 쌀 수출 금지와 이에 따른 가격 상승으로 식량난 앞에 놓이게 됐다. 몬로비아=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정권 붕괴, 기후 이주민 우려까지

식량 위기는 정정 불안과 국제 분쟁을 유발한다. 텡 교수는 “가장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은 굶주린 사람”이라며 “세계적인 식량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폭동과 시민 불복종 운동이 일어났고, 정권이 붕괴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2007~2008년 러시아 가뭄으로 인한 밀 가격 상승으로 북아프리카와 중동 빵 가격이 폭등하자 거리로 나온 사람들이 일으킨 ‘아랍의 봄(2010년)’ 혁명이 대표적이다.

먹고사는 것이 불가능해지면 삶의 터전을 떠날 수밖에 없다. 이른바 ‘기후 이주민’이다. 파라 박사는 “메콩강 하구 등 아시아 주요 쌀 생산지와 태평양 도서국에선 21세기 중반까지 기후 피해가 발생해 3억 명 이상이 다른 나라로 떠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고 언급했다.

카튜사 파라 전 유엔 산하 세계식량계획(WFP) 기후재해 위기대응 선임 어드바이저

“어떤 나라도 식량위기 자유롭지 않아”

한국은 안전지대일까. 텡 교수와 파라 박사 모두 "아니다"라고 했다.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20%대에 그친다. 밥상에 올라가는 곡물의 80%는 수입산이다. 글로벌 정치·경제 분석기관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의 지난해 세계식량안보지수 순위에서 한국은 조사 대상 113개국 중 39위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낮은 순위다. 식량 위기가 발생하면 선진국 중에선 한국이 먼저 취약해진다는 얘기다.

텡 교수는 “한국은 부유한 나라이기 때문에 당장은 위기를 피부로 느끼진 못한다”면서도 “기후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면 돈이 있어도 식량을 사지 못하는 상황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6월 인도 구와하티 외곽의 논에 벼가 무르익었다. 구와하티=AP 연합뉴스

그는 한국 소득하위 20% 가구가 처분가능소득의 절반을 식비로 지출하고 있다는 점도 거론하며 “저소득층이나 연금으로 노후를 보내야 하는 사람들이 음식을 사기 위해 더 많은 돈을 쓰게 되는 점도 국가와 개인에게 부담이 된다”고 꼬집었다.

인터뷰를 정리하며 파라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지구상 어떤 나라도 기후 변화가 일으키는 식량 위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처음엔 빈국과 저소득층의 문제로 시작하지만, 임계점을 넘어가면 결국 인류 모두의 문제가 된다. 한국뿐만 아니라 각국이 당장 즉각적이고 과감한 기후 행동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하노이= 허경주 특파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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