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경제 위기에도… 日애니 생존한 건 작품성보다 ‘상품화’
모든 뜨는 것들의 비밀
나카야마 아쓰오 지음|김지영·김유선·심지애 옮김|사회평론|376쪽|1만8000원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등 세계적인 흥행작들을 만든 일본 스튜디오지브리. 그런데도 지브리는 여러 차례 도산 위기를 겪었다. 게임으로 처음 출시된 포켓몬스터는 1000억달러에 이르는 경제가치를 만들었는데 그중 70%는 캐릭터를 상품화해서 만들어졌다. 일본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이미 뜬, 지금 뜨고 있는 것’의 바탕에는 훌륭한 작품성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걸작이 남긴 바큇자국을 따라 굴러가는 비즈니스의 바퀴”가 중요했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 저자는 일본 엔터테인먼트를 연구하는 사회학자이며, 게임 업계에 오래 몸담았고 엔터테인먼트 회사도 설립했다.
일본은 1990년대 이후 주춤한 경제성장을 ‘잃어버린 30년’이라 부르지만, 애니메이션·게임·캐릭터 등 엔터테인먼트 분야만큼은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저자는 일본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분야별로 나누고 탄생부터 이후 현재까지 흐름을 분석한다. 공연예술, 영화, 음악, 출판, 만화, TV, 애니메이션, 게임, 스포츠 등 9개 분야다. 잘 알려진 일본의 콘텐츠들이 탄생한 내부 사정을 볼 수 있어 흥미로운 동시에, 각 산업이 겪은 시행착오까지 담았다. ‘문화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바뀐 우리 상황에서 앞서 경험한 일본은 어땠는지 살펴보기에 좋은 책이다.
◇”비즈니스 개발·마케팅 인재가 더 모여야”
저자는 ‘괴짜’의 작가성만으로는 지속 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일본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수익 구조가 개발되고 자리가 잡히면서 급격히 성장했다. 큰 제작비가 걸림돌인 애니메이션 산업은 과자와 완구 출시로 수익을 거두는 모델로 성장했다. 수익 모델이 생기기 전 대표적인 실패 사례가 ‘우주소년 아톰’의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다. 만화로 모은 자산을 1960년대 애니메이션 제작에 쏟아부었는데, 작품이 히트했으나 제작비 부담으로 결국 1973년 도산하고 말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 역시 작품의 시리즈화·상품화를 거부하고 작품만으로 수익을 창출하겠다는 작가주의를 고집하다 적자에 허덕였다. 신작 만들기를 중단한 2014년부터 오히려 운영이 안정됐을 정도다.
반면 현재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귀멸의 칼날’을 제작한 애니플렉스는 사업성을 확보하면서 똑똑하게 성공한 케이스다. 모바일 게임 사업 등으로 이익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사 애니메이션 제작에 돈을 더 투자할 수 있었으며, 흥행 후 적극적인 상품화를 통해 수익을 확보했다. 직원이 2명인 벤처 회사가 처음 제안한 포켓몬 게임은 대기업 닌텐도의 체계적 지원이 없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저자는 “’재미있는 것을 만들고 싶다’는 크리에이터로서의 감각과 ‘수입을 얻을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고 싶다’라는 프로듀서로서 감각을 겸비한 인재가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더 많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성숙기에 더 도약할 기회 놓치면 안 돼
한때 떴으나 금세 정체되거나 시장에서 고립된 분야도 있다. 일본 게임은 1990년대 세계시장의 70~80%를 점했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북미에 밀리며 20~30% 수준으로 떨어졌다. 저자는 ‘산업 구조화’와 ‘인재 육성’의 부재에서 원인을 찾는다.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 기업은 게임 개발 환경을 대학에 배포하는 등 무료로 개방하고, 교육 시스템을 강화하는 한편 게임 개발자 회의에서 업계 여러 사례를 공유하는 등 집단의 힘으로 산업 발전을 도모한 반면, 일본 회사들은 노하우 공유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일반적인 ‘대기업 형태’로 변화하면서 급속도로 존재감을 잃었다. 영화와 만화도 마찬가지다. 1930년대만 해도 일본은 세계에서 제일가는 영화 생산국 중 하나였지만 이제 옛날이야기다. 이제는 내수 시장에 의존하고 있다. 일본의 대표 문화 상품이었던 만화는 웹툰이 등장하면서 한국에 위협받고 있다.
저자는 “미국이 산·관·학 협력 체제를 만들어 영화 분야에서 할리우드를 만들어낸 것 같은 기회는 일본에도 있었다”며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제대로 구조화하고 산업에 진입할 인재를 길러내 생태계를 회전시키는 흐름을 만들지 못하면서 일본은 더욱 비약해나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고 안타까워한다. “하나의 산업이 육성되는 데는 인재를 육성하는 대학과 스타트업을 길러내는 벤처 캐피털과 신흥 기업을 환영하는 문화, 다양성 넘치는 작품군, 수익화 과정의 시행착오를 허용할 수 있는 자본력 등 여러 요소가 어우러진 경제권(經濟圈)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한류 콘텐츠들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귀 기울일 만한 내용이다.
수요 측면에서 흥미로운 해설도 있다. ‘놀아본 세대가 놀 줄 아는 세대를 낳는다는 것’이다.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를 이르는 ‘단카이 세대’의 수요가 과거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길러냈고, 그들의 자녀 또한 엔터테인먼트를 마음껏 소비하는 데 ‘부모의 이해’를 얻을 수 있었으며, 또 그 경험치가 자식 세대인 Z세대로 이어져 산업을 돌리는 톱니바퀴가 되고 있다는 것. 그러나 젊은이 숫자가 점차 줄고 있는 시대에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성장하려면 계속해서 해외로 뻗어나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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