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엔 건축사, 퇴근하면 시인입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시와 건축은 정말 별개의 일입니다.”
시집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문학동네)를 낸 천서봉(52) 시인은 ‘건축 설계와 시작(詩作)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건축사로 약 25년 동안 일했기에, 그의 시에는 ‘건축학적 상상력이 돋보인다’는 평이 뒤따른곤 한다. 그러나 시인의 답은 솔직했다. “건축과 시의 영향에 대한 글을 청탁받곤 합니다. 그러나 시는 제 안의 욕구에서 나오는 반면, 건축은 타인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하나 공통점은 ‘제가 갈 수 있는 극한까지 가보려 한다’는 자세이죠.”
첫 시집 ‘서봉 氏(씨)의 가방’(2011) 이후 12년 만에 시집을 낸 시인의 지난 시간이 궁금했다. 그는 “현실은 2인분이다. 퇴근해야 시인이 된다”라고 했다. 낮에 도면을 그리며 시를 써보려고 한 적도 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고 한다. 퇴근 이후 아내 대신 밥을 차리고, 늦은 밤이 돼서야 비로소 시를 쓰는 상태가 된다. 얼마 전까진 3인분을 해야 했다. 지난 몇 년 사이 양친의 병간호를 도맡아 했고, 장례를 모두 치렀다. “저는 어떤 현상을 그대로 적지 않고, 훗날 그 기억을 떠올릴 때 나타나는 것들을 적습니다. 음식을 다 먹고 시간이 흘러 그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조차 잊힐 즈음에요.”
이번 시집에 실린 65편의 시 중에서 단 한 편 ‘나비 운용법’이 희망을 노래한다. “많은 사람들은 시에서 유머와 희망을 보길 원하기도 하지만, 제가 쓸 수 있는 건 절망적인 겁니다.” 건축학도인 그가 시를 쓰게 된 것도 점차 커져가는 마음의 상처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활발한 학창 시절을 보냈는데, 대학을 거치며 여러 실패를 경험했어요. 글을 쓰게 된 것도, IMF로 회사 합격 취소가 되거나 한 달에 한두 번 집에 가는 건축 일을 하면서였어요.”
앞으로의 목표를 묻는 질문에 그는 “이제 갓 40대를 벗어났는데, 평생 직장은 예전 이야기가 됐다”라고 답했다. “다음 시집이 언제 나올지는 확답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벌써 주변에서는 이직에 실직에 창업에 몸서리를 칩니다.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 저를 열어두는 것이 제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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