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요금 3억 없어서...수퍼컴퓨터 반쪽만 가동

최인준 기자 2023. 8. 26.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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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정보硏, 일부 서버 중단했다가 논란 커지자 뒤늦게 가동

지난 21일 대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에 있는 국가 수퍼컴퓨터 ‘누리온‘ 시스템의 일부 서버가 작동을 멈췄다. 수퍼컴에 들어가는 전기료가 예산을 초과하자 연구원에서 장비 절반의 전원을 꺼버린 것이다. KISTI가 지난 1988년 국내 첫 수퍼컴을 도입한 이후 고장이나 시설 점검·교체가 아닌 이유로 설비 가동이 멈춘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기료 인상으로 KISTI가 부족해진 예산은 고작 3억원 수준이다.

그래픽=김현국

문제는 가동 중단으로 KISTI에 돈을 내고 수퍼컴 서버를 사용하는 국내외 첨단 연구소들의 피해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KISTI 누리온은 민간과 공공에 설비를 개방하는 국내 유일 수퍼컴이다. 포항 방사광 가속기를 비롯해 국내와 공동 연구를 진행하는 유럽 입자물리연구소, 일본 고에너지연구소 가속기, 미국 중력파 관측 시설 라이고 등이 이 설비에 연구 데이터를 저장, 분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AI·바이오·우주개발·방위 사업 등 미래 첨단기술 개발에 필수인 수퍼컴에 대한 국가 차원의 전략 부재가 불러온 결과라고 지적한다. 가동을 멈춰야 할 정도로 전기료가 늘어났다면 긴급 예산을 요청했어야 하는데 이런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조대곤 KAIST 교수는 “수억원의 전기료를 확보하지 못해 국내뿐 아니라 해외 연구 프로젝트까지 멈춰 세운 국가적 망신”이라고 말했다. KISTI는 논란이 커지자 지난 25일 오후 서버 가동을 정상화했다. KISTI측은 “누리온 자체가 가동을 멈춘 것은 아니고, 서버 일부만 작동을 중단한 것”이라며 “누리온과 별개의 시스템”이라고 해명했다.

◇두 번 유찰된 차기 수퍼컴 도입

한국 수퍼컴의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KISTI는 당장 내년에 새로 들여올 차세대 수퍼컴 구축 사업도 난항을 겪고 있다. KISTI는 올 초부터 차세대 국가 수퍼컴(수퍼컴 6호기)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데 업체 선정조차 못 하고 있다. 입찰에 참여한 기업이 없어 이미 두 차례나 입찰이 유찰됐다. 과학계에선 “주요 선진국은 매년 수퍼컴 성능을 10배 이상 업그레이드하는데 우리는 따라가는 것도 제대로 못 하는 처지”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원인은 예산 책정 단계에서 글로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성형 AI 열풍으로 핵심 반도체인 GPU(그래픽 처리 장치) 가격이 급등하면서 당초 배정된 예산만으로 구입이 어려워졌다. 지난해 예비 타당성 조사(예타)를 통과한 새 수퍼컴 구입 예산이 2900억원 정도였는데, 해외 업체들은 8000억원 이상이 돼야 KISTI가 원하는 스펙의 수퍼컴을 공급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예타를 통과한 국가 사업은 외부 요인으로 사업 수정이 필요하면 다시 심의를 거쳐 예산을 조정하는 ‘타당성 재조사’를 요청할 수 있다. 수퍼컴 예타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최근 국가 R&D 예산 재조정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예산 증액을 요청하는 것이 부담일 수는 있다”면서 “하지만 가동 중단을 초래한 전기료 예산 부족이나 차세대 수퍼컴 예산 부족 모두 재검토를 요청했다면 충분히 막았을 사태”라고 말했다.

◇미·중·일, 매년 10배씩 업그레이드

수퍼컴은 신약 개발, 우주 탐사 등 미래 기술 수준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설비로 떠오르고 있다. 미래 첨단 분야에서는 수많은 데이터를 얼마나 빠르게 분석해 해결책을 마련하느냐가 국가적 경쟁력이다.

주요국들은 매년 조 단위 예산을 쏟아부으며 수퍼컴 연산 성능을 10배씩 높이고 있다. 미국은 지난 2012년부터 매년 1조원 이상을 수퍼컴 개발에 투자하고 있다. 미국은 IBM, 크레이 등 세계 최고 수준 수퍼컴 제조 업체를 보유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지난 3월 차세대 생성형 AI 개발을 목적으로 9억파운드를 투자해 세계 최고 수준 수퍼컴을 구축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달 소프트뱅크그룹의 생성형 AI 개발을 위한 수퍼컴 구축 사업에 53억엔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정부 산하 산업기술종합연구소가 수퍼컴 성능을 2.5배 키우는 사업에도 320억엔을 지원한다.

안준모 고려대 교수는 “수퍼컴은 미국이 2019년 중국 테크 산업 제재에 나설 때 가장 먼저 포함될 정도로 국가 전략 산업화된 분야”라며 “산업 경쟁력과 직결되는 기술인 만큼 공격적인 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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