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주정에 품격 입힌 고전적 문체의 매력[정보라의 이 책 환상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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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 40년'은 수주(樹州) 변영로(1897∼1961)가 술에 취해서 살아온 40년 주당(酒黨) 인생을 되돌아보며 쓴 에세이다.
'명정'은 어감이 왠지 멋지게 들리지만 술 취할 명(酩), 술 취할 정(酊)을 써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술에 몹시 취함"이라는 뜻이다.
독서의 계절 가을을 앞두고 있으니, 술 대신 수주의 에세이로 대리 음주(?)만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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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시인 변영로 취중 수필집
◇명정 40년/변영로 지음/144쪽·5900원·범우사
술 마시고 신발 잃어버리고, 모자 잃어버리는 건 다반사다. 뱃사공을 고용해서 한강에 배를 띄우고, 절친한 시인 오상순(1894∼1963)과 함께 밤새 달을 바라보며 술 마시고 담배 피운 일화는 운치 있긴 하지만 알코올과 니코틴 소모량이 너무 많아서 읽다 보면 내 위장까지 막 아파진다. 심지어 대여섯 살 나이에 어른들이 마시는 술이 너무 마시고 싶어서 높은 술독에 닿으려고 책상이나 궤짝을 쌓아놓고 기어오르다가 와르르 쾅 넘어졌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역사의 흐름과 개인적 삶이 맞닿는 지점들이 ‘명정 40년’에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면 일제강점기 수주가 술에 몹시 취해 밤늦게 귀가하던 중에 일본 순사를 마주친 일화가 있다. 이때는 일제가 강제로 정한 통행금지 시간이 있던 때다. 그 통금시간을 어기고 밤중에 거리를 걷는 수주를 발견한 일본 순사가 일본어로, 게다가 당연하다는 듯 반말로 “오이! 오이!(야! 너!)” 하고 부른다. 그러자 수주는 화가 나서 “오이가 난다!” 하고 순사에게 날아차기를 시전하고 도망쳤다는 이야기이다. 이 일화의 제목이 ‘오이가 난다’인데, 일본어로는 “‘어이, 너’가 뭐냐!”라는 뜻이지만 한국어로는 채소가 비행한다는 뜻으로 들려 중의적인 재미가 있다. 폐쇄회로(CC)TV가 없던 시절이기에 망정이지 이 엄혹한 시대에 일본 순사를 발로 찼다가 만약에 잡혔다면 수주가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는 상상할 수 없다.
치기(와 취기) 가득한 흔한 주정꾼처럼 보이지만, 수주는 한국사의 가장 어두운 시대를 저항하며 뚫고 나온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독립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하고,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저항했던 논개를 주인공으로 시를 쓴 애국자였다.
‘명정 40년’을 나는 처음 유학 갈 때 가지고 나가서 외국에서 지내는 내내 반복해서 읽었다.수주가 구사하는, 인터넷과 외래어가 범람하기 이전 시대 한국 지식인의 유려하고 유쾌한 고전적인 한국어가 비할 데 없이 매력적이었다. 독서의 계절 가을을 앞두고 있으니, 술 대신 수주의 에세이로 대리 음주(?)만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한다.
정보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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