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자의 민낯… 실록으로 엿보는 황제의 원초적 욕망

이소연 기자 2023. 8. 26.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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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에게 이야기해서 예쁜 여자를 몇 명 골라서 데리고 오라."

1406년 4월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1360∼1424)가 조선 태종(1367∼1422)에게 보낸 사신은 이 같은 황제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영락제가 '조선으로부터 말 3000필을 받은 대가로 은 1000냥을 지불한다'는 칙서를 함께 보내기는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명분이었고, 황제의 본의는 차마 글에 담지 못한 말 속에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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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
공녀들 외모 하나하나 흠 잡고, 입맛 없다며 젓갈 보내라 요구
명실록에선 황제의 말 윤색-미화… 조선왕조실록엔 날것 그대로 실려
◇황제의 말과 글/정동훈 지음/268쪽·1만8000원·푸른역사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위쪽 사진)는 재위 기간(1402∼1424년)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글로 남기기 싫은 개인적 요구는 말로 전했다. 영락제는 주로 공녀와 불경을 필사할 종이, 부처님 사리 등을 요구했다. 아래쪽 사진은 궁중에서 환관들과 즐기는 명나라 5대 황제 선덕제를 그린 ‘명선종행락도’의 일부. 선덕제는 조선에 “진기한 짐승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고 명실록에 기록됐지만 실은 “좋은 매와 사냥개가 있거든 이를 찾아 바치라”고 했다. 푸른역사 제공
“조선 국왕에게 이야기해서 예쁜 여자를 몇 명 골라서 데리고 오라.”

1406년 4월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1360∼1424)가 조선 태종(1367∼1422)에게 보낸 사신은 이 같은 황제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영락제가 ‘조선으로부터 말 3000필을 받은 대가로 은 1000냥을 지불한다’는 칙서를 함께 보내기는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명분이었고, 황제의 본의는 차마 글에 담지 못한 말 속에 숨어 있었다.

명나라 황제의 ‘언서(言書) 불일치’를 폭로한 책이다.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를 연구해온 서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등 국내 사료와 ‘명실록(明實錄)’을 비교, 분석했다.

명은 황제가 한 말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기록한 ‘선유성지(宣諭聖旨)’를 대부분 파기했고, 명실록엔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이 윤색한 결과만 담았다. 반면 성지를 받은 고려·조선의 사료에선 황제가 전한 날것의 말이 그대로 확인된다. 황제는 점잖은 글엔 담지 못하는 속내나 기록으로 남기고 싶지 않은 욕망을 전하기 위해 선유성지를 고려와 조선의 왕에게 내렸다.

황제의 말과 조선의 대응에선 당시의 비대칭적 외교관계가 그대로 엿보인다. 태종은 영락제가 공녀를 요구한 1408년 4월 이후 7개월간 심사를 거쳐 공녀 5명을 뽑아 보냈는데, 당시는 아버지 태조(1335∼1408)의 상중이었다. 영락제는 공녀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1409년 5월 또다시 사신을 보내 앞선 공녀들의 외모에 대해 하나하나 흠을 잡으며 “왕은 지금 찾아놓은 여자가 있거든 많으면 두 명, 적으면 한 명이라도 다시 보내라”고 했다.

저자는 두 차례 정변을 거쳐 즉위한 태종이 집권의 정당성을 명 황제가 보낸 고명(誥命·외국 국왕을 책봉할 때 작성한 황제의 명령문서)에 크게 의지했기에 이 같은 무리한 요구를 받들 수밖에 없었다고 봤다.

영락제는 사망하기 두 달 전에도 조선 사신에게 “짐이 늙어 입맛이 없으니 밴댕이젓이나 곤쟁이젓, 문어 같은 것을 좀 가지고 오라. … 아울러 스무 살 이상 서른 살 이하로 음식 잘하고 술 잘 빚는 시비(侍婢) 대여섯도 뽑아 보내라”는 명을 내렸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나온다. 세종(1397∼1450)은 환관들이 전하는 명 선덕제(1399∼1435)의 요구가 정말 황제의 명이 맞는지 의심하기도 했다. 세종실록에는 1429년 사신으로 온 조선 출신 환관 김만이 석등잔을 요구하자 “사신이 황제의 명이라 하여 석등잔을 요구하는 것이 너무 심하다”고 한 기록이 있다. 등불을 켜는 돌로 만든 그릇인 석등잔까지 요구한 건 사적이고 자질구레하다는 게 저자의 해석이다. 이에 조선은 명 조정에 보낼 문서에 이 같은 요구를 기록하는 방안도 궁리했다. 세종의 의구심을 선덕제도 눈치챘던 것 같다. 그해 말 선덕제는 “조정에서 요구하는 모든 물건은 반드시 어보를 찍은 칙서에 근거해 지급하라”는 칙서를 조선에 전했다.

저자는 명 황제 가운데 성군으로 꼽히는 선덕제의 이미지는 왜곡된 것임을 우리 측 사료를 통해 밝힌다. 명실록엔 선덕제가 1429년 9월 “왕국(조선)에 진기한 짐승이 많다고는 하나 짐이 바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니 앞으로는 바치지 말라”고 했다고 나온다. 이는 선덕제의 인자한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로 꼽혀 왔다. 그러나 세종실록엔 그해 11월 선덕제가 “좋은 매와 사냥개가 있거든 이를 찾아 바쳐 왕의 아름다운 뜻을 더욱 보이도록 하라”는 칙서가 도착했다고 나온다. 조선 조정은 실제 매와 사냥개를 명에 바쳤다.

명나라뿐일까. 저자는 “역사 기록에 남은 황제의 글은 대부분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고 지적했다. “기록에 묘사된 황제는 언제나 성인과 고전의 가르침을 준수하고 유교적 덕목에 기초하여 선정과 덕정을 펼치는 절대자였다. 그러나 그런 인간이 있을까?”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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