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학습 위주 영재학교, 중도이탈 속출
7개 학교서 올해만 18명 이탈
“자격지심과 열등감 때문에 눈물로 지새운 밤이 많아요.”
여현주 씨(39·여)는 중학교 3년 내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다가 2000년 한국과학영재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선행학습을 했음에도 수업을 따라가기 버거워 입학 후 계속 학원을 다녀야 했다. 1학년 2학기부터 대학교재로 수업을 시작하자 선행학습 부족으로 진도를 따라가지 못한 상당수는 전학을 가거나 자퇴를 했다.
이를 악물고 3년을 버틴 여 씨는 대구의 한 의대에 합격했지만 이를 포기하고 부산교대로 진학했다. 초등학교 교사가 돼 영재학생들에게 자신이 받은 교육과 다른 교육을 제공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경기 광명교육지원청 장학사로 활동 중인 여 씨는 “선행학습도 장점은 있지만 선행학습 경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11세에 서울과학고에 입학한 백강현 군이 학교폭력을 호소하며 자퇴 의사를 밝힌 가운데 영재교육 시스템을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선행학습과 조기입학을 골자로 한 이른바 ‘속진 교육’ 위주로 학습 과정이 짜인 탓에 영재학교에서 중도 이탈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학교정보 공시사이트인 ‘학교알리미’ 등에 따르면 올해 영재학교 7곳에서 다른 학교로 전학가거나 학업을 중단하는 등 중도 이탈한 학생은 18명으로 집계됐다. 영재학교 중도 이탈 학생은 점차 늘고 있다. 2015∼2017년만 해도 연간 2∼7명에 불과했지만 2019년부터 최근 5년간 중도 이탈 학생은 87명에 달한다.
“영재학교 반쪽 교육” 5년새 87명 이탈
흔들리는 K-영재교육
조기 입학생, 급우 관계에 어려움… “정서적 교류 늘려 적응 도와야”
美등 해외선 특정 과목만 따로 교육… "선행학습보다 심화 교육 확대를"
한국의 경우 영재학교 입학 전형에 연령 제한을 두지 않는다. 교육부에 따르면 영재학교 입학생 중 중학교 조기 졸업생은 지난해 기준으로 7.3%에 이른다. 그런데 중도 이탈 학생 상당수가 조기 졸업한 1학년이다.
최수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수학교육혁신센터장은 “백 군처럼 조기 입학한 학생들은 학교에서 호칭부터 ‘형’ ‘언니’ 등을 써야 하는 상황을 힘들어 한다”며 “일반 학급에서 얻을 수 있는 정서적 교류 없이 능력만 키우면 된다는 식의 영재교육은 반 쪽짜리 교육”이라고 말했다.
선행학습 위주인 수업 방식도 문제로 지적된다. 영재교육은 크게 ‘속진 교육’과 ‘심화 교육’으로 나뉜다. 선행학습과 조기입학·졸업 등으로 압축적 학습을 시키는 게 속진 교육이다. 반면 심화 교육은 토론이나 실험 등을 통해 창의력과 비판적 사고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2000년 제정된 영재교육진흥법은 두 가지 교육을 병행하도록 했다. 별도의 영재학교를 통해 과학, 예술 등 특수분야에 대한 속진형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한편 대학 부설 영재교육원 등을 통해 영재교육 저변을 확대하는 심화형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심화형 프로그램 인기가 떨어지는 추세다. 류지영 KAIST 영재정책센터장은 “과거에는 특목중, 특목고 입시에서 영재교육원 수료 학생들에게 가산점을 줬는데 이런 혜택이 사라지면서 영재교육원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고 했다. 한국교육개발원에 따르면 2012년 영재학급·영재교육원 교육을 받은 학생은 11만3418명이었지만, 지난해는 6만5668명으로 반 토막이 났다. 반면 같은 기간 영재학교 학생 수는 4905명에서 6850명으로 40% 가까이 늘었다.
● 미국 등에선 동급생과 시간 보내다 별도 교육
미국 등에선 영재 학생들이 정규 수업을 듣다가 일부 시간에 별도의 장소에 가서 영재교육을 받는 ‘풀아웃(Pull-Out) 프로그램’이 보편적이다. 수학에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 학생들의 경우 수학 수업에 한해 영재 지도교사의 수업을 듣는 식이다. 대부분의 시간은 동급생들과 보내면서 우정을 쌓을 수 있다.
이스라엘은 시험과 면접 등을 통해 영재를 선발한 뒤 방과 후 또는 주 1회 영재교육센터나 교내 영재학급에서 교육한다. 호주에선 친구·교사·학부모의 추천을 받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창의성·지능 검사 및 면담을 실시해 영재교육 대상자를 선발한다. 풀아웃 프로그램 외에도 특별 활동 ‘클럽’ 형태로 교육이 진행되기도 한다.
송인섭 숙명여대 교육학과 교수는 “영재교육은 타고난 특성을 개발하는 교육인데, 한국에선 대학 입시를 위한 과정으로 전락했다”며 “영재 학생들의 특성을 잘 살릴 수 있도록 선행학습보다 심화 교육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현우 기자 woojoo@donga.com
이상환 기자 payback@donga.com
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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