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왜 '경제 모르는' 엔지니어를 경제수석 임명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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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 수출 한국의 길을 열다 ① 서른세 살 초대 경제수석
한국전쟁의 폐허에 갇혀 있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갖춘 선진국으로 일어서기까지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일등공신들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선입국 의지를 실천에 옮겨 한국을 세계 제1의 조선 국가로 만든 신동식 ㈜한국해사기술 (KOMAC) 회장도 그 반열에 들 인물이다. 신 회장에게는 ‘조선업의 아버지’란 수식어 외에도 국가건설기획자 (nation building architect) 라는 별명이 붙어있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대한민국 초대 경제수석에 임명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참여하고, 과학기술 발전 계획을 수립 집행하여 한국기술연구원(KIST) 설립과 대덕연구단지 조성 등 경제발전의 기반을 닦았기 때문이다. 중앙SUNDAY는 한국 경제사의 산 증인을 인터뷰해 묻혔거나 잊힌 비화를 발굴하고 교훈을 탐색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92세인 지금까지 경영 일선을 지키며 새로운 기술과 미래 먹거리 창출에 도전하고 있는 현역 최고령 조선인 신동식 회장의 구술사로 첫회를 시작한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지 않소. 바다에서 살 길을 찾아야지요. 고기를 잡든지, 배를 만들든지, 짐을 나르든지, 청와대에 들어와 나와 함께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 힘써주시오. 마침 존슨 대통령이 내준 전용기에 자리가 많이 남으니 나하고 같이 돌아갑시다.”
1965년 5월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린든 존슨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국빈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미국 체류중이던 조선 전문가 신동식을 불러 독대했다. 그는 서른 세 살의 젊은 엔지니어에게 “함께 대한민국 조선을 키우고 나아가 한국 경제를 살리자”고 설득했다. 신 회장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선급협회(ABS)에서 검사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5·16 직후 대한조선공사 기술고문과 경제기획원 장관 고문으로 2년간 일하다 더 넓은 세상에서 새로운 경험을 쌓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한지 2년이 지난 때였다.
담당 부처·기업들 중화학공업에 회의적
김포공항에 내리니 청와대 의전 차량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이후락 비서실장에게 “특별히 데려온 사람이니 1급 정무비서관으로 발령내라”고 지시했다. 이 실장은 집무실로 내려오자마자 정일권 국무총리,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민주공화당 의장 등을 거론하며 “당신 ‘빽’이 누구야?”라고 다그쳤다. 신 회장은 “조선 기술자이고 해사 전문가인 저를 대통령이 어찌 알고 찾아 이 자리에 왔다”며 “저의 상관은 대통령과 비서실장 두 분뿐”이라고 답했다. 그제야 이 실장은 얼굴을 폈다.
첫 업무는 정일권 총리를 수행해 지방을 초도순시하는 것이었다. 외국 생활을 오래했기에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한국의 실정을 확인하라는 배려였다. 저녁마다 정 총리와 얼굴을 맞대고 발전 방향을 논의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가까운 사이가 됐다. 그런데 한 달 간의 초도순시를 마치고 청와대로 복귀하니 책상이 없어졌다. 원래 회의실로 쓰던 방에 사무실을 만들었는데 자리를 비운 사이 기존 비서관들이 책상을 들어낸 것이었다. 신 회장은 “사극에서나 보던 일을 직접 겪어보니 권력이란게 참 무섭구나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이런 해프닝이 있고 한달쯤 지났을까. 이 실장이 신 회장을 불러 “자네, 경제수석을 해야겠어”라고 말을 던졌다. 처음으로 수석비서관 직제를 도입하는 비서실 조직 개편이 이뤄졌다. 경제 1·2수석, 정무수석, 민정수석 등을 신설하고 그 밑에 비서관 5~6명씩을 배치했다.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대통령실의 조직 뼈대가 그 때 만들어진 것이다. 박 대통령은 예산과 외환을 담당하는 제1 경제수석에 김학렬, 실물경제를 담당하는 제2 경제수석에 신 회장을 각각 낙점했다. 당황한 신 회장이 “경제학자도, 관료도 아니고 경제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맞지 않다”고 고사하자 “대통령에게 따지라”는 답이 돌아왔다. 감당하기 어려운 자리라는 고민에 대통령을 찾았다. 박 대통령이 말했다.
“국민이 굶지 말고 살아보자고, 경제 한번 살려보자고 온갖 전문가들을 만나고 다녔다. 다들 물가부터 잡아야 한다, 쌀을 증산해야 한다, 환율을 안정시켜 고용을 늘려야 한다는 고언을 쏟아냈다. 뭐 하나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더라. 그런데 당장 일자리를 만들어야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굶어죽는 국민이 없어질테고, 나무와 유리가 있어야 부서진 집을 고치고, 정유회사를 세워야 휘발유를 뽑아내 자동차와 공장을 돌릴텐데, 그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외국에 나가서 돈과 기술을 끌어오려면 영어를 잘해야 하고, 국제적인 안목을 갖고 산업 노하우를 알아볼 전문 지식이 있어야 해. 그게 바로 임자 같은 사람 아닌가. ”
경제를 모르는 경제수석, 그것도 신설된 대한민국의 초대 경제수석 자리는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탄생했다. 외자 유치를 통한 산업화가 국가의 운명을 가르는 지상 과제로 믿었던 박 대통령의 결단이었다. 66년 경제수석 임명장을 받은 신 회장은 중장기 과제를 고민했다. 당시의 1차산업과 경공업 중심의 경제 구조로는 장기적 발전이 어렵다고 봤다. 고용과 기술 축적, 수출 증진 등의 시너지를 달성하려면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재편이 필요했다. 당시 내수용 경공업은 처음부터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고품질 제품을 생산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신 회장은 중화학공업 중에서도 조선을 주목했다. 자신의 전문분야이기도 했지만, 초기 투자비용을 감수하고 한 번 궤도에 올려놓으면 수많은 고용과 후방 연관산업을 책임질 수 있다는 장점에 착목한 것이다.
한국, 고부가가치 선박 점유율 세계 1위
위원회의 첫 개가는 대만에 참치 어선 20척을 수출한 것이다. 신 회장은 67년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이 경제 협력자금 614만달러를 대만에 지원해 국제입찰로 어선을 건조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적자가 나도 좋으니 선박 수출의 물꼬를 트라”고 지시했다. 청와대와 상공부, 대한조선공사 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 회장이 미국 체류 당시 쌓은 네트워크를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68년 5월1일 타이베이에서 진행한 입찰에서 척당 30만4000달러의 최저가격을 써냈다. 서울에서 준비한 예정 가격(36만달러)을 썼다면 2위인 서독(34만2575달러)에게 넘겨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입찰에는 성공했지만 납품까지는 먼 길이었다. 제대로 만들 수 있겠느냐는 대만 선주들의 불신과 외국산 기자재 도입의 어려움, 69년 8월1일 시작한 조선소의 총파업까지 첩첩산중이었다. 하지만 기자재를 설치하면서 배를 조립하고, 4개 팀을 구성해 5척씩 건조하고 먼저 마치는 팀이 다른 팀에 합류하는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식의 돌관공사 끝에 12월30일 마지막 배를 인도할 수 있었다. 어선 수출이 성공한 덕에 수출 총액 7억281만달러를 기록하며 그 해 정부의 수출 목표(7억달러)를 간신히 달성할 수 있었다.
현재 바다에 떠다니는 5만t 이상 선박의 85% 이상이 ‘메이드 인 코리아’ 다. 지난해 전세계 발주량의 37%인 1559만CGT(표준화물선 환산 톤수)를 수주했고, 특히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컨테이너선, 초대형 원유운반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 분야에서는 압도적 세계 1위다. 세계 최고의 조선국가로서 우뚝 서게된 밑거름은 바로 이 때 뿌려진 것이었다. 신 회장은 “대만 선박 수출은 단기적으로는 10억원의 적자를 낸 실속없는 장사였지만, 불가능에 도전해 성과를 거둔 투지와 경험, 기술은 향후 조선이 우리나라의 수출 효자로 떠오르는 밑거름이 됐다”고 회고했다. 〈계속〉
※정리:김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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