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뇌과학] 내 기억이 내 아이에게 유전될 수 있을까?
의도하지 않더라도 나의 습관이나 경험들을 내 아이들이 배우고 따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같은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끼리 생활 패턴과 행동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관찰하며 배울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찰을 통한 학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나머지 어떨 때에는 나의 기억과 경험이 내 아이들한테 통째로 유전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비단 가족 구성원 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도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이를 세대를 거쳐 지속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인간 생명의 귀중함은 우리 자신에게 내재된 본능과 같다고 여긴다. 악독한 범죄자나 천하의 패륜아일지라도 그들의 생명을 죄값으로 뺏는 것에는 항상 논란이 있으며 인간 존재가 다른 가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는 생각에 대부분 동의한다.
그러므로 더 나아가 낙태, 줄기세포 연구, 유전자 조작, 임상 시험 등 의학과 과학이 다루는 연구 주제 중 인간의 생명과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행위들을 조심스럽게 규제하려는 이유도 모든 인간은 소중하며 자칫하면 그 존엄성이 깨지는 것을 막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동등하게 귀중하다는 생각은 우리 유전자 안에 없을 확률이 훨씬 높다. 인간의 존엄성은 근대철학에서 신 대신 인간을 중시한 이념에서 생겨난 것이며 그 전에는 인간의 삶은 신과 가까울수록 소중하고 멀수록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며 소중하다는 본능이 이미 존재했다면 불가능했던 사상이다. 오히려 인간이 동등하게 소중하다는 생각은 사회적 합의를 거쳐 오랜 시간 동안 세대를 거쳐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전달되고 전파되다보니 너무 당연해지고 원래 내 머릿속에 담겨 있던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이처럼 생물학적 형질 뿐만 아니라 경험, 사상, 문화 등도 학습을 통해 세대를 거쳐 전달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진화학자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생물학적으로 유전되는 정보의 매개체인 ‘유전자(gene)’에 대치되는 개념으로 생물학적으로 유전되지 않아 ‘비유전적’이지만 다른 개체 및 세대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기억 정보들(문화 요소)들의 요소나 단위를 ‘밈(meme)’이라 부르자고 제안했다.
최근에는 ‘유행 요소’로 많이 쓰이는 밈이지만 사실 비유전적 기억 전달이 가능한 정보 단위를 뜻하는 것이었다. 밈은 유전자가 아니지만 유전자처럼 정보를 전달하는 비유전적 매개체이다. 자연선택과 생식 등을 통해 유전자가 전달되고 선택되는 것처럼 밈도 사회 구성원들간 소통을 통해 전달되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 폐기되거나 변형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세대간 기억은 오직 밈을 통해서만 전달될까. 후천적인 경험만이 유일하게 세대를 걸쳐 지식을 전달하는 통로일까. 최근 연구 경향에 따르면 일부 경험들은 유전적 전달이 가능하며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생물학적 메커니즘들이 존재한다는 증거들도 점차 쌓여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경험이 유전적으로 세대간 전달된다는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프랑스 박물학자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이다. 그는 용불용설(用不用說; Theory of Use and Disuse)이라는 가설을 내세워 모든 생물이 현재의 경험을 통해 획득한 특정 형질을 다음 세대에 전달함으로써 진화의 과정을 거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species)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진화한다는 관점을 설명하기 위해 당시 유행하던 이론, 즉 ‘획득 형질의 유전’ 개념을 자신의 이론에 접목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획득형질의 유전 개체가 경험한 것을 유전시킬 수 있다는 개념은 현대 생물학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없어 모두 폐기됐다. 밀렵꾼들이 상아를 노리고 코끼리를 마구 잡아대면 후세 코끼리들의 상아가 짧아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데 이는 큰 상아를 가진 코끼리들이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상아를 줄이는 ‘획득 형질’을 발현하고 이를 물려주기 때문이 아니라 짧은 상아를 가진 코끼리가 생존에 유리해졌기 때문이다.
다음 세대에 생물학적으로 생체정보를 물려주는 수단은 생식세포에 존재하는 유전자 밖에 없다. 유전자에는 여러 형질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는 매체이고 남성과 여성이 각각 갖고 있는 매체의 복사본 절반씩을 섞어 하나로 만들어 자손에게 완성된 매체를 전달한다.
그러므로 지식과 경험을 유전하기 위해서는 그 정보들이 어떤 흔적으로든 유전자에 새겨져야 하고 특히 생식 세포에 그 흔적이 남아야 한다. 물론 획득한 형질이 유전자 정보를 변화시킬 정도로 강력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방사능에 오염된 음식이나 물을 섭취해 내 생식세포의 유전자에 변형이 생겨나면 내 자손은 변형된 유전자를 물려 받게 되어 나와는 다른 유전정보를 갖고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험과 학습이 유전자 자체에 변형을 유발할 정도로 생식세포에 강한 효과를 줄 가능성은 거의 없다.
1999년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대 랄프 톨리안 교수팀은 기존의 진화론을 약간 비트는 흥미로운 발견을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doi.org/10.1038/43425). 코끼리 상아의 예시와 같이 식물과 동물 모두 위협적인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생존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화가 진행되기 마련인데 진화론적 관점에서는 이는 생존에 유리한 형질 정보를 담은 유전자를 갖춘 개체가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개체는 죽어서 결국 살아남는 개체의 유전형질만 대물림 되는 ‘적자생존’의 원칙이 작동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식물은 포식자가 싫어할만한 시각적 특징이나 냄새, 맛, 독성 등을 갖추도록 진화할 것이며 동물은 특정 기관이 발달하거나 변화하여 포식자를 더 잘 회피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그런데 톨리안 교수팀이 발견한 것은 포식자에게 잡아먹히지 않을 정도의 공격을 받아서 생존에 무리가 없는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물과 식물들의 자손들은 포식자에 대응하는 방어 메커니즘이 공격을 받지 않은 개체에서 유래한 자손들보다 더욱 높아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진화론에서 설명하는 적자생존의 원칙에 벗어난 현상일 뿐만 아니라, 획득 형질이 다음 세대에 전달될 수 있는 비유전적 메커니즘이 일부 존재할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2010년도에 들어서 드디어 비유전적인 방식으로 형질을 다음 세대 물려줄 수 있는 분자적 증거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2014년에 국제학술지 '사이언스'(10.1126/science.1255903)에서는 하버드 의대 및 캠브리지대 공동연구진이 생쥐가 세대를 걸쳐 대사질환 위험성을 높이는 인자를 물려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암컷 생쥐들이 임신 기간 동안 영양이 부족한 환경을 겪게 되면, 그 암컷들에서 태어난 새끼들은 정상 암컷에서 태어난 새끼들보다 낮은 몸무게와 대사질환을 갖고 태어난다. 흥미로운 것은 엄마 생쥐(1세대)의 영양실조는 배 속의 새끼들(2세대) 중 수컷의 정자 내 유전자들에 후성유전학적(epigenetic) 각인을 새긴다는 것이다.
그 결과 후성유전학적 각인을 받은 수컷 생쥐(2세대)에게서 태어난 새끼들(3세대)의 대사질환 발병률은 할머니 생쥐(1세대)처럼 비정상적으로 증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스위스 연방 공과대 및 취리히대 연구팀의 연구결과에서도 발견된다(10.1038/nn.3695). 어릴 적 강력한 스트레스를 받은 생쥐의 정자에서도 마이크로 RNA(microRNA; miRNA)의 발현 변화를 일으켜서, 스트레스성 행동 및 대사 변화가 대물림 될 수 있었다.
스트레스를 받은 생쥐의 정자를 추출해 정상적인 엄마의 난자에 인공수정한 결과, 그 자손들은 대를 이어서 이미 스트레스성 불안 및 우울 행동과 대사 변화(혈중 인슐린 농도 감소 및 글루코스 대사속도 저하)를 보였다. 아빠가 받은 스트레스 경험이 생식세포의 정자에 영향을 미쳐서 다음 세대에도 대물림 됐던 것이다.
유전자가 변하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경험이 되물림 됐을까. 생식세포가 갖고 있는 유전자 서열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어도 유전자 정보의 결과물이 달라질 수 있는 정교한 메커니즘이 생물체에 존재한다. 바로 후성유전학적 메커니즘이다.
유전물질인 DNA에 메틸화 등의 표지를 붙여서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단백질의 결합에 영향을 미치거나, 마이크로 RNA등이 유전정보를 갖고 있는 DNA에서 생성된 RNA에 직접 결합해 유전자 발현도에 영향을 미치는 등이 모두 후성유전학적 형질 변환에 기여한다. 후성유전학적 변화는 방사능처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정보를 담은 생식세포 내 DNA 염기서열에 변화를 주지 않지만 이미 존재하는 DNA에서 RNA 또는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제할 수 있으므로 DNA 염기서열 변화만큼이나 형질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게다가 후성유전학적 변화는 세포 분열 과정에도 지속될 정도로 안정적이고 오래가며 환경에서 유래한 자극이나 경험에 의해 유동적으로 켜지고 꺼질 수 있다. 따라서 후성유전학적 변화가 해당 세대의 생식세포 내에서 벌어지고 그 생식세포가 수정에 성공해 후속 개체를 낳는 것에 성공한다면 내가 겪었던 경험이 생식 세포 내 후성유전학적 분자 변화에 담겨서 자손에게 전달될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환경에 의해 수동적으로 겪었던 경험들 말고도 능동적으로 학습한 정보도 후성유전학적으로 다음 세대에 전달될 수 있을까? 2023년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에 발표된 연구(10.1038/s41467-023-39804-8)에 따르면 연합 학습(associative learning)에 의해 형성된 기억도 후성유전학적 메커니즘을 통해 후세에 전달될 수 있었다.
연합 학습은 두 가지 연관성이 없는 정보를 연합시켜 기억으로 저장하는 것이라 쉽게 생각하면 된다. 무조건적으로 생체가 반응할 수 있는 정보, 쾌락이나 공포와 같은 것을 느끼게 하는 무조건적 자극(unconditioned stimulus; US)과 나와 상관없는 중립적인 자극 (conditioned stimulus; CS) 정보들이 연합된다면 장기 기억으로 저장될 수 있고 그 후 중립적인 자극을 만나도 무조건적 자극을 떠올려 반응하게 된다.
예를 들어 전등불이 켜질 때마다 앉은 의자에서 전기가 흘러 아프다면 ‘전등불’이라는 조건적 자극은 고통과 공포와 연관되어 기억하게 되고, 이는 전등불이 켜질 때마다 흠칫 놀라거나 공포 반응이 발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선충과 같은 무척추동물마저도 연합 학습이 가능하다. 자슬레이버(Alon Zaslaver) 이스라엘 헤브루대 교수 연구팀은 예쁜꼬마선충(C. elegans)를 이용해 이 선충에게 연합 학습을 시켰다.
선충이 좋아하는 냄새 자극이 있는 환경에 노출시킬 때 먹이를 오랫동안 주지 않아 굶게한 것. 이것이 반복되면 선충들은 선호하던 냄새를 점차 기피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특정 냄새 자극이 먹이가 없다는 정보와 연합되어 기억되기 때문이다. 나중에 냄새 자극에 대한 선충의 회피행동정도를 측정함으로써 특정 후각 정보가 잘 학습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게 된다.
그 다음에 위와 같은 회피행동에 대한 연합학습을 수행한 선충과 그렇지 않은 선충의 자손들 각각에게 냄새 자극을 노출시켰다. 놀랍게도 연합학습을 수행했던 선충들의 자손들은 부모세대와 같은 회피행동을 똑같이 보였다.
부모세대와 달리 자손세대는 태어나면서부터 지속적으로 충분한 먹이가 주어진 환경에서 성장해왔기 때문에 특정 냄새 자극에 대한 회피행동은 부족한 먹이에 의한 대사 변화나 스트레스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역시 예쁜꼬마선충의 후성유전학적 메커니즘이 학습에 의해 작동하였기 때문이었다. 유전자 발현에 관련되어 있는 히스톤 단백질, 마이크로 RNA 관련 신호체계가 연합학습에 의해 변화했고 이것이 후성유전학적 유전자 발현 조절 메커니즘을 유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후성유전학적 메커니즘은 정자를 통해 후세에 전달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손 세대의 예쁜꼬마선충은 부모세대의 연합기억을 물려받아 어디에 저장하고 있었을까. 예쁜꼬마선충이 후각정보를 처리하는 신경세포는 AWC ON/OFF 신경세포라 불리는데 처음 연합학습을 수행한 선충은 AWC ON/OFF 에 모두 기억 정보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기억을 물려받은 자손세대 선충의 기억정보는 AWC OFF 신경세포에 남겨졌다고 하는데, 자손세대가 이 기억을 떠올릴 때 AWC OFF 신경세포의 활성을 광유전학 및 화학유전학적 기법을 통해 조작하는 것만으로도 기억 정보가 충분히 조작되기도 했다 .
예쁜꼬마선충을 이용한 연구사례가 ‘모든 기억이 유전될 수 있다’라고 정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후성유전학적 스위치를 생식세포에서 켤 수 있는 스트레스나 공포와 같은 특정 환경 자극과 관련된 형질 획득 또는 일부 학습 정보들이 유전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라마르크가 주장했던 ‘획득 형질의 유전’은 아주 특정한 경우에만 발생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후성유전학이라는 새로운 유전자 발현 조절 메커니즘이 생식세포 내에서 작동함으로써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 편으로는 과연 예쁜꼬마선충이 자손세대에 물려주었던 연합학습 기억의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생식세포를 통해 전달된 후성유전학적 특징들이 어떻게 무슨 형태로 소수의 신경세포에 기억정보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아직도 생명체가 어떻게 배우고 저장하는지를 이해하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박형주 한국뇌연구원 한국뇌연구원 신경혈관단위체 연구그룹장 ]
Copyright © 동아사이언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