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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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잘 놓고 다닌다.
"엄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서진이가 이런 말을 한 건 처음이다.
나와 친한 김은지 시인은 거절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곧잘 사양하곤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술을 좀 먹자고 한다든가, 부다페스트 레지던스를 같이 신청하자고 한다든가 하면 요령껏 잘도 거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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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마음 안 다칠 '틈'이 될 수도
이소연 시인
물건을 잘 놓고 다닌다. 도서관 작가의 방에 노트북을 두고 왔다. 작업실에 가서 글을 쓰면 딱 좋을 텐데. 도서관에 들르려니 글을 쓰기도 전에 진이 빠진다. 남편에게 부탁해볼까? 남편은 차도 있으니까. 전화를 했다. 끊어진다. 왠지 쎄한 이 느낌. 실수를 한 것 같다. 문자가 왔다. “교회.”
교회에서 점심까지 먹고 온다는데 나는 카톡 창에 노트북을 두고 와서 어쩌고저쩌고 떠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문을 벌컥 열고 집 안으로 들이쳤다. 노트북을 놓고 온 것은 너고 나도 내 일정이 있는데 왜 갑자기 이런 걸 부탁하냐는 것이었다. 나는 혹시나 되는가 해서 물어본 것뿐이라고 안 되면 내가 가려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떠보는 게 얼마나 나쁜 심보인지 알아? 떠보는 말은 천하에 쓸모없는 말이야!”
이병일 시인이 마저 화를 내고 나갔고 나는 아들과 부대찌개를 먹었다. 아들이 말했다. “엄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서진이가 이런 말을 한 건 처음이다. “아빠가 쓴 청소년 시집을 읽어봤는데, 거기 보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쓰여 있어. 그런데 지금은 반대로 말해. 그러니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웃음이 터졌다. 자기가 쓴 책을 아들이 읽어봤으면 좋겠다며 그렇게 권하더니 그게 자기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서진이가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명의 저자인 이병일 시인의 글을 근거 삼아 삶의 모순을 집어내는 수준의 대화까지 한다는 것이 놀라워서 웃음이 났다.
집에 돌아온 이병일 시인이 서진이 말을 전해 듣고는 아들 무서워서 말도 함부로 못 하겠다며 한바탕 웃었다. 아이가 선생이라더니 오늘 일이 글을 쓰고 사는 우리 부부에게 언행일치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됐다.
싸운 건 싸운 거고 나는 이병일 시인의 말에 설득됐다. 요지는 어떤 요청은 때로 거절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거절하기 힘들었던 여러 예를 들며 나를 설득했다. 나는 보통 제안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선택은 상대방에게 달려 있다고 믿었다. 독자를 직접 만나는 자리를 좋아하는 나의 성격 때문에 나와 같은 ‘켬’ 동인이자 절친한 친구인 주민현 시인은 한 달에 10회 정도 ‘모임에 올 수 있냐’는 제안을 받아왔다. 주민현 시인은 내가 부를 때마다 선뜻 와주었다. 술을 한잔하며 넌지시 이병일 시인의 거절론에 대해 말해줬더니 “언닌 진짜 너무 많이 불러” 하는 게 아닌가! 이후 나는 아주 작은 제안에도 한 번씩 이게 꼭 필요한가 생각해보는 일이 늘었다. 내 제안을 상대가 편하게 거절할 수 있는가도 짚어본다.
한편, 나는 어려운 사람이 나에게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할 때도 단단하고 굳은 마음으로 “그건 좀 힘든데요” 하고 말하고 싶기도 하다. 나와 친한 김은지 시인은 거절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곧잘 사양하곤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술을 좀 먹자고 한다든가, 부다페스트 레지던스를 같이 신청하자고 한다든가 하면 요령껏 잘도 거절한다. 처음엔 섭섭했지만, 헛된 기대를 품게 하지 않아서 좋다.
저마다 언행일치를 하려고 노력하고 잘 제안하고 잘 거절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마음이 상하고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생기기 마련이다. 서진이 말을 생각한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고 늘 혼만 났는데 이 작은 꼼수가 서로의 입장이 상충할 때 작은 틈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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