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골 폭죽 ‘강철군단’ 조련…“매직은 없다, 준비만 있을 뿐”

정영재 2023. 8. 26.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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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오디세이] K리그 포항 스틸러스 김기동 감독
포항 스틸야드에서 작전 지시를 하고 있는 김기동 감독. [사진 포항 스틸러스]
‘족보 없는 축구는 가라’

프로축구 K리그가 열리는 날, 포항 축구전용구장인 스틸야드 응원석에 걸리는 걸개다. 1973년 4월 포항제철 실업축구단으로 창단한 포항 스틸러스는 50년째 이름과 연고지를 바꾸지 않은 유일한 프로축구단이다.

이회택·허정무·최순호·황선홍…. 한국 축구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감독을 역임했다. 그 ‘족보’를 이은 김기동 감독도 포항의 레전드 출신이다. 그는 포항(1991~92, 2003~11)에서 뛴 227경기를 포함해 K리그만 총 501경기 출장해 필드플레이어 최다출장 2위에 올라 있다. 현역 시절 김기동은 작은 체구(171㎝)에도 수비형 미드필더로 쉼 없이 뛰는 ‘철인’이었다.

2019년 김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이후 포항은 ‘극장골 팀’이 됐다. 극장골이란 정규시간 90분 이후 종료 직전 터지는 동점골 또는 역전골을 말한다. 포항은 올 시즌에만 7개의 극장골을 터뜨렸는데, 희한하게도 수비수나 교체 투입된 선수가 주인공이었다.

포항 스틸러스는 모기업 포스코의 지원이 줄면서 매년 키 플레이어가 빠져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김 감독은 늘 상위권을 지켰다. 올 시즌도 K리그1 12개 팀 중 2위에 올라 있고, 대한민국 최강 클럽을 가리는 FA컵에서도 4강에 진출했다.

지난 8일, FA컵 준결승(태풍으로 순연)을 위해 제주에 온 김 감독을 서귀포 KAL호텔에서 만났다.

롤 모델 지도자 없어, 내가 롤 모델

Q : 왜 유독 포항은 극장골이 많을까요?
A : “저희가 동계훈련을 선수들이 싫어할 정도로 좀 많이 해요. 여름에 파워와 근력이 떨어지면 처질 수밖에 없는데 시즌 중엔 경기-휴식-경기로 이어지기 때문에 체력을 회복할 틈이 없어요. 겨울에 적립한 체력을 빼먹으면서 가는 거죠. 제가 5년째 몰아붙인 힘든 동계훈련이 성과로 이어지니까 선수들도 믿음이 생겼어요. 겨울에 만들어 놓은 체력이 경기 막판에 치고 나갈 힘이 되는 거고, 거기서 극장골도 나온다고 봅니다.”

Q : ‘기동 매직’이라는 표현은 어떻습니다.
A :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하는 장면이 계속 나오니까 팬들이 그렇게 불러 주시는데, 세상에 매직이 어디 있습니까. 선수·코치들과 함께 고민하고 준비하는 거죠. 경기 흐름이 계획대로 가지 않거나 돌발 변수가 나왔을 때 얼마나 정교한 플랜B, 플랜C가 있느냐가 승패를 좌우한다고 생각해요. ‘매직은 없다. 준비가 있을 뿐’입니다.”

Q : 롤 모델로 삼는 지도자가 있나요.
A : “저는 김기동입니다. 제 스타일대로 축구를 할 거고, 누구를 롤 모델로 삼는 게 아니라 내가 롤 모델이 되겠다는 마음입니다. 선수 시절 12명의 감독을 모셨는데 그분들의 좋은 점을 받아들이고, 선수들이 싫어하는 건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죠. 너무 강압적이거나 자신의 틀 속에서 전혀 변하지 않는 지도자를 선수들은 싫어합니다.”

Q : 본인의 현역 때와 비교하면 지금 선수들은?
A : “축구에 더 진심인 것 같아요. 전에는 축구보다 다른 생각이 많고 폭음하는 선수들도 적지 않았죠. 지금은 거의 없습니다. 오래 축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몸 관리에 열심이죠. 반면에 우리 때와 비교하면 근성이 조금 약한 것 같아요. 최악으로 힘들 때 치고 나가는 힘은 절실함에서 나오거든요. 요즘 친구들은 경기 못 뛰면 팀 옮겨달라고 하는데 저는 ‘다른 팀 간다고 널 쓸 것 같아? 여기서 새는 바가지는 거기서도 샌다’고 팩폭을 날립니다.”

Q : 백성동·박승욱·임상협·정재희 등 한번 좌절했거나 2,3부에 있던 선수들을 되살렸는데요.
A : “우리 예산 안에서 눈여겨봤던 선수들을 영입했죠. 잘 나갔던 선수들이 왜 침체됐을까 고민했고, 단점보다는 장점을 봤어요. 30살 넘은 선수한테 단점을 자꾸 얘기하면 짜증나거든요. 끄집어낸 장점을 팀에 어떻게 녹여낼까 궁리했죠. 그 친구들의 공통점은 볼을 잘 다루고 포지셔닝(위치선정) 이해가 빨라요. 선수는 상대가 힘들어하는 공간, 우리 공격이 풀릴 수 있는 위치를 찾아가야 하거든요.”

Q : 선수들이 감독을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A : “사람들이 ‘형님 리더십’이라고들 하는데 선수는 불편할 수밖에 없어요. 감독은 감독이지 어떻게 형님이 됩니까(웃음). 다만 세심하게 체크하다 보니 표정만 봐도 ‘무슨 일이 있구나’ 알 수 있어요. 선수들 고민이라 해 봐야 이성 문제, 집안 문제, 아니면 부상이 있는데 참고 뛰는 것 정도죠. 편하게 얘기하다 보면 예상했던 것과 95%는 일치합니다. 제 오랜 경험에서 나온 거죠.”
‘철인’으로 불렸던 현역 시절 김기동. [중앙포토]
김 감독은 매년 시즌이 끝나면 정들었던 선수 몇 명과 이별한다. 좋은 조건을 제시받고 팀을 옮기는 선수가 계속 나오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개운치 않게 헤어진 선수들도 있다. “국가대표가 된 A선수처럼 지금도 기분이 좋지 않은 케이스가 있었어요. 저는 늘 ‘우리가 돈이 많은 구단은 아니지만 너희가 성공할 수 있도록 내가 돕겠다. 여기에 담을 수 없는 그릇이 되면 언제든 보내주겠다’고 동기부여를 했어요. 누구든 떠날 수 있지만 저와 최소한의 소통을 하고 축하 받으면서 떠나면 얼마나 좋겠어요.”

창단 50년 포항, 지원 부족 아쉬워

Q : 선수들과 운동할 때 가장 강조하는 건?
A : “기분에 따라 훈련 태도가 바뀌면 안 된다는 겁니다. 기분 좋다고 신나서 오버하고 기분 나쁘다고 축축 처지면 팀 분위기를 해치는 겁니다. 포항이라는 팀의 50년 전통과 문화가 지금까지는 잘 이어져 왔거든요. 훌륭한 선수가 훌륭한 팀을 만드는 게 아니라 훌륭한 팀이 훌륭한 선수를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Q :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았는데요.
A : “한국 축구 스타의 산실이었는데 요즘은 국가대표 한 명 나오기 힘든 팀이 됐어요. 모기업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건 알지만 좀 아쉽죠. 지금 쓰는 돈에 50억원만 더 지원하면 우승에 도전할 수 있고, 못 하면 옷 벗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12개 팀 중 11위의 예산을 가지고 2등을 하고 있는데 이것만도 기적이에요. 근데 이러면 안 되거든요. 투자하는 팀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게 맞죠.”

Q : 라이벌 울산 현대를 보면 부럽겠네요.
A : “솔직히 좀 부럽죠. 감독이 원하는 선수를 뽑아서 좋은 자원을 갖고 가니까요. 그렇지만 우리 선수들도 좀 부족하고 미생(未生)이지만 함께 준비해서 만들어 가는 과정이 재미있기도 합니다. 동해안 더비(포항-울산 라이벌전)가 힘든 건 경기 자체에 대한 부담도 있지만 그 다음 경기에 너무 큰 영향을 준다는 겁니다.”
김 감독은 축구계에서 소문난 골프 실력자다. 4언더파까지 기록한 적이 있고, 2016년 축구인 골프대회에선 2언더파로 메달리스트가 됐다. 은퇴할 무렵 아내 조현경씨가 “1년 동안 골프에 올인 해서 프로 테스트를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할 정도였다. 김 감독은 “그렇게 되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취미가 없어지는 거다. 골프를 직업이 아닌 친구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 감독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그가 솔직히 답했다. “5년째 팀을 맡으면서 우승에 대한 고민, 좋은 선수를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어요. 하지만 천년만년 이 팀에 있을 수는 없죠. 더 나은 환경에서 뛰어보고 싶은 건 선수나 감독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김 감독 휴대전화의 프로필 메시지에는 그의 철학이 담겨 있다. ‘어제의 찬사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과거가 아닌 현재에 있으니까. 오늘은 나의 것이다.’

■ “같은 팀서 뛰는 아들, 공 잡을 때마다 실수할까 심장 내려앉는 듯”

김준호
포항 스틸러스 등번호 66번은 김준호(20·사진). 김기동 감독의 아들이다. 포지션도 아버지 현역 때와 같은 중앙 미드필더고, 등번호도 아버지(6번)와 연관이 있다.

프로 3년차인 김준호는 182㎝, 74㎏의 날렵한 체격에 기동력과 패싱력이 뛰어나고 중거리슈팅 능력도 갖췄다. 붙박이 중앙 미드필더 신진호가 인천으로 이적하면서 올 시즌 출장 기회가 늘었다. 이을용-태석(서울), 신태용-재원(성남), 이기형-호재(포항) 등 대를 이어 K리그에서 활약한 부자(父子)는 꽤 있다. 그런데 K리그1에서 아들이 아버지 감독 밑에서 뛰는 경우는 처음이다.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 김 감독은 “처음 경기에 넣었을 때는 준호가 공을 잡을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어요. 실수할까 봐. 아무래도 다른 선수를 보는 잣대보다 엄격할 수밖에 없잖아요”라고 말했다.

‘아빠 찬스’라며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은 없을까. 아직은 별 뒷말이 없다. 김준호가 포철동초-포철중-포철고로 이어지는 ‘스틸러스 유스 성골’ 출신인데다 또래에서는 누가 봐도 인정할 만한 실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준호가 고등학교 3년간 33㎝나 컸어요. 아직 밸런스나 파워가 완성된 단계가 아니죠. 구단에는 ‘3년만 지켜보고 안 되면 내보내도 좋다’고 했어요. 다행히 올해 들어 많이 좋아진 느낌입니다”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철인’도 자식 일은 뜻대로 안 되는가 보다.




정영재 문화스포츠 에디터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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