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요리는 428 원칙…냉채 4, 큰접시 2, 작은접시 8가지

2023. 8. 26.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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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사부의 중식만담] 슬기로운 요리 주문
불도장(佛跳牆). 해삼·전복·오골계·상어지느러미·돼지등심·표고 등이 들어가는 최고급 요리 중 하나다. 푸젠·광둥 같은 남쪽 지역에서 유래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잡탕 세 개”

어느 날 점심 손님 셋이 자리에 앉자마자 호기롭게 외쳤다. 50여 년 전 중식당 성수원에서 처음 요리를 배울 때였다. 나는 홀과 주방을 오가며 일하고 있었다. 뚝섬에 있는 가게 건너편이 경마장이었다.

잡탕은 ‘팔보채 동생’ 쯤 되는 일품요리다. 잘못 들었나 하고 확인하니 “잡탕 셋”이라는 짜증 묻은 답이 돌아왔다. 주방에 주문을 넣자 이상하다며 1인당 하나가 맞는지 다시 물어보라고 했다.

“양이 많을 텐데요. 괜찮겠어요?”

“아, 글쎄 뭔 말이 이리 많아. 세 개가 맞다니까 그러네”

손님 지갑이 두툼한가 봐, 매상 좀 오르겠네 생각하며 요리를 내가니….

“엇, 이거 뭐야, 이 음식은 우리가 시킨 게 아닌 것 같은데…”

화를 내던 손님이 곧 실수를 깨닫고 얼굴이 벌게졌다. 짬뽕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 헛나왔다고 했다. 빨간 짬뽕이 막 나오던 시절이었다. 잡탕이나 짬뽕이나 여러 재료를 섞어 만들기는 마찬가지이니 헷갈릴 수 있지만 황당했다. 이렇듯 주문 착오로 손님도 주방도 곤란한 일이 종종 생긴다. 중국이나 대만에 여행을 가면 더 하다.

음식 주문은 디엔차이(点菜)라고 한다. 타오찬(套餐)은 요리 몇 가지로 구성한 세트메뉴, 콰이찬(快餐)은 맥도날드 같은 패스트푸드 세트메뉴, 샤오츠(小吃)는 볶음밥이나 짜장면 같은 간단한 식사, 디엔신(点心)은 만두·전병 같은 주전부리를 말한다. 정식 코스요리에는 만한전석처럼 석(席)이 붙는다.

요즘은 차림표에 사진을 붙여놓거나, 식탁에 주문용 태블릿이 있는 가게가 많아져 편리하다. 돼지(肉)·소(牛肉)·닭(鷄)·새우(鰕)·전복(鮑)·면(麵)·밥(飯) 같은 한자 몇 가지를 알면 요리를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스마트폰은 척척박사 아닌가. 대중식당에서는 자오파이차이(招牌菜·간판요리) 또는 잔파이(金牌·인기요리)라고 쓰인 음식을 고르면 무난하다. 신경을 써야 하는 자리가 문제다. 해외여행이라면 일정을 마무리하는 근사한 저녁, 한국이라면 거래처 접대, 어르신 팔순, 세 번 미뤘던 팀 회식 같은 자리 말이다.

이럴 때 코스 구성 원칙을 알아두면 편하다. 요리 나오는 순서를 이해하면 그만큼 식사가 즐거우니까. 화북 요리 본류인 노채(魯菜·산둥요리)를 통해 알아보자. 428만 기억하면 된다. 순서대로 나가는 ▶쌍품냉채(双品冷菜) 4가지 ▶대건열채(大件熱菜·큰접시 요리) 2가지 ▶소완(小碗·작은접시 요리) 8가지를 말한다.

냉채는 접시 하나에 2가지씩 8가지가 나간다. 대건열채 1가지가 나가면 뒤따라 소완 4가지가 나간다. 냉채는 소라·전복·훈어·주꾸미·새우·해파리·닭·송화단·오향장육처럼 다양한 재료로 만든다. 냉채를 먹으며 술 한 잔하다 보면 메인요리인 대건열채가 나온다. 돼지는 닭보다 못하며 닭은 생선보다 못하다(肉不如雞 雞不如魚)는 속담처럼 열채의 중심은 생선인 경우가 많다. 물고기가 풍성한 황하·장강 일대가 특히 그렇다. 대건열채로 전가복(全家福·전복요리)·홍민계(紅燜雞 ·닭요리)·청증조어(淸蒸鯛魚·도미요리)·당초리어(糖醋鯉魚·잉어요리)·홍소어시(紅燒魚翅·샥스핀요리)·해삼주자(海參肘子·해삼요리) 등을 많이 낸다. 소완은 왕새우튀김·자춘결·깐풍기·총소해삼·송이관자·산라탕· 팔보밥·빠스(拔絲·맛탕) 등이 있다.

요리는 순서에 따라 ▶재료 중복 없이 육·해·공 골고루 ▶서로 다른 조리법으로 ▶계절·사철요리가 어울려서 ▶색깔의 조화를 이루며 물 흐르듯 이어진다. 18가지 상용조리법을 재료에 따라 선택하니 ▶튀김·찜·볶음 ▶매콤·담백·달콤한 맛 ▶브라운소스·화이트소스가 자연스레 교차한다. 요리가 다 나온 뒤 밥·면 같은 식사가 필요하면 따로 주문한다. 칠순·팔순 같은 경사에 먹는 428석은 장수와 건강을 의미하는 면이 반드시 나간다. 대건열채 하나를 줄인 416석은 대개 결혼식용이다.

하지만 428석은 이제 옛 요리가 됐다. 간편식이 대세이고 입맛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고급 호텔 중식당도 마찬가지다. 타이베이에 있는 어느 5성급 호텔 중식당 차림표를 보자. 냉채로 흑돼지(叉燒皇)·새끼돼지(金陵燒乳豬)·두부(鵝汁脆滷豆腐)·해파리(陳醋海蜇頭)를 내고, 요리로는 송이(松茸瑤柱燉花膠)·바닷가재(百合龍蝦球)·게살(焗釀鮮蟹蓋)·전복(鮮鮑魚扣鵝掌)·우럭(金銀蒜蒸青斑球)을 낸다. 식사는 새우볶음밥(鮮蝦燒鵝炒飯), 디저트는 팥죽(陳皮紅豆沙)과 딤섬(文華迎美點)이다. 정통이라고 내세우고 있지만 내용은 약식 세트메뉴다.

서울에 있는 한 5성급 호텔도 크게 다르지 않다. 냉채(特品盤), 해삼(金湯烏龍海蔘)·전복(紅燒原隻鮑魚)·바닷가재(蒜茸蒸龍蝦)·송로안심구이(松露香煎牛肉), 식사, 디저트(甜點) 순서로 낸다. 더 높은 가격대에는 캐비어·불도장·제비집 요리도 들어간다. 서울에서 428을 맛볼 수 있는 중식당이 있기는 하지만 차림표에는 없다. 준비에 시간이 걸리고 공들인 만큼 수지가 맞지 않아서다. 정통요리를 만나기 힘든 시대가 됐지만, 그래도 고급식당 요리에는 428 정서가 깔려있다. 자연환경이 다른 지역은 음식도 다르고 순서도 조금씩 다르다. 남쪽 광둥 지역은 서구문화를 일찍 받아들여서인지 탕(수프)이 메인요리 앞에 나온다.

음식 주문 때 조심할 점이 있다. ‘아무거나’ ‘빠른 거’ ‘쥔장 맘대로’ 했다가는 망하는 수가 있다. 심보 고약한 주방장이라면 이런 ‘봉’에게 오래된 식재료를 떨이한다. 묵은 닭고기에 향이 센 양념을 입히고 바싹 튀겨내면 손님들은 그저 엄지를 치켜세운다. 혀는 양념에 쉽게 속는다. 그래서 격식 있는 자리를 예약할 때는 식당 경리(經理·매니저)와 상의하면 실수가 없다.

※정리: 안충기 기자

왕육성 중식당 ‘진진’셰프. 화교 2세로 50년 업력을 가진 중식 백전노장. 인생 1막을 마치고 소일 삼아 낸 서울 서교동의 작은 중식당 ‘진진’이 2016년 미쉐린 가이드 별을 받으며 인생 2막이 다시 바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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